[중앙일보 기선민]
막장. 갈 데까지 다 갔다는 의미의 이 단어가 드라마와 만났다. 10월 전국 시청률 41.3%(TNS미디어코리아)로 종영한 SBS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이 대표적이다. 시청률이 방영 내내 상승 곡선을 그린 '효자 드라마'였지만, 시청자단체와 언론에서는 '막장 드라마'라며 거세게 비판했다. 아버지부터 아들까지 온 집안이 바람이 나거나, 처와 첩을 한 방에서 데리고 자는 식의 상식을 초월한 불륜 설정 탓이었다. 분명 문제가 있는 내용임에도 시청률이 치솟자 방송가에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드라마를 욕하면서 나도 모르게 보게 되는 이유는? 최근 연일 자체 최고 시청률 기록(11일 17.7%)을 경신 중인 SBS 일일극 '아내의 유혹'을 TV칼럼니스트 정덕현씨와 함께 들여다봤다. 이 드라마는 불륜·배신·복수 등의 비상식적 설정으로 네티즌들로부터 '통속 3종 세트'라는 비아냥을 사고 있다. 정씨는 “사람들이 드라마를 욕하면서도 계속 보는 이유는 드라마를 게임처럼 소비하기 때문”이라고 전제했다. 드라마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이입할 대상을 찾아 아바타(분신)로 삼은 후, 그 대상이 처한 현실을 함께 즐기는 게임이다. 정씨는 “이런 '게임'같은 드라마는 대부분 억압적 상황을 과장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중독성도 강하다”고 분석했다.
분석1. 익숙하고 단순한 구조게임이니만큼 구조가 복잡하면 곤란하다. 감정이입하는 걸 방해받기 때문이다. '아내의 유혹'은 현모양처 은재(장서희), 은재를 강제로 범해 결혼했지만 곧 싫증내고 바람피우는 남편 교빈(변우민), 자기 부모의 교통사고 보상금을 떼어먹은 은재 부모에 대한 복수를 위해 단짝 친구의 남편 교빈을 유혹하는 애리(김서형)가 주인공이다. '착한 아내가 나쁜 남편과 더 나쁜 불륜녀한테 당했는데 끝내 복수한다'는 설정이다. 선(당하는 아내)과 악(공격하는 남편과 불륜녀)의 구분이 명확하다. 당연히 선이 승리한다. '조강지처 클럽'과 '아내의 유혹' 제작진 모두 드라마의 주제를 '권선징악'이라고 얘기하는 부분은 눈여겨볼 만하다.
분석2. 공감 가는 대상 찾아 빠져들기드라마 속에서 자신이 빠져들 만한 대상이 있어야 한다. 성별·연령과 관계없이, 자신의 경험이나 판타지가 결부된 캐릭터가 주로 선택된다. '아내의 유혹'처럼 권선징악적 주제면 열에 아홉은 피해자를 심정적으로 편들게 된다. 은재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난 착하디 착한 인물. 어찌 보면 바보스러울 정도다. 단짝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남편한테 배신당하고, 시어머니한테 구박당한 후 끝내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쓰고 시댁에서 내침을 당한다. 7년 만에 임신에 성공하지만 바람난 남편의 낙태 위협에 바닷물에 빠지기까지 한다. 이보다 더 불쌍할 수는 없다.
분석3. 대상을 괴롭히는 악역은 필수악역은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의 핵이다. 악역의 행태가 자극적이고 상식을 초월할수록 중독성이 점점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은재 시어머니 미인(금보라)은 며느리에게 “가난뱅이 땟국물을 아직도 못 벗었다”며 매사에 구박하고 뺨까지 후려친다. 며느리가 가져온 죽 그릇을 집어던지는 일쯤은 예사다.
애리는 상투적인 악녀다. 교빈을 이미 신혼 초에 유혹했던 그다. 애리의 계략으로 은재는 임신한 채로 시댁에서 쫓겨난다. 교빈은 부동산 졸부 아버지 덕에 건달처럼 사는 구제불능 인간형이다. 애리의 오피스텔에서 은재에게 발각되자 한다는 말이 “이 여자가 꼬리쳐서 그냥 넘어간 거야”다. 이들 셋은 그저 악할 뿐, 악한 행동을 하는 이유에 논리나 개연성은 거의 없다.
분석4. 드라마가 아니라 드라마 속 악역 욕하기이쯤 되면 욕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나뉘기 시작한다. '아내의 유혹'을 보며 “사이코 드라마 아니냐”며 혀를 차는 시청자들은 이탈한다. 계속 보는 사람들은 욕을 하긴 하되, 드라마 자체가 아니라 드라마 속 악역을 욕한다. 악역을 욕하는 과정에서 후련함(카타르시스)을 느끼고 결과적으로 드라마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실제로 '아내의 유혹' 시청자 게시판에는 “이 재수 없는 것들은 벼락맞아 죽었으면 좋겠다” “바람피운 애리, 하늘이 가만 두지 않을 거다”는 식의 원색적 비난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설정 속에 이미 푹 빠졌기 때문에 혀를 차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분석5. 저비용, 높은 시청률굳이 톱스타를 쓸 필요가 없는 것이 이런 '게임처럼 소비되는' 통속극의 공통점이다. 익숙한 구조에 자극적인 요소만 적당히 끼워넣으면 되기 때문이다. 연기력이 어느 정도 갖춰진 배우가 처절하게 불쌍한 역(예컨대 '조강지처 클럽'의 김혜선·오현경)이나, 누가 봐도 돌 던지고 싶은 못된 역(가령 '조강지처 클럽'의 안내상)을 잘 해내면 '배우들의 발견'이라는 찬사가 따라붙기도 한다. 이렇게 통속극이 시청률 고공행진을 계속하게 되면 방송사 입장에서는 욕 먹는 걸 알면서도 선호하게 되고, 새로운 형식과 주제에 도전하는 드라마들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