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당하기가 이렇게 어렵나요. 감독과 배우들은 물론이고, 촬영 음악 의상 무술감독까지, 크레딧을 훑어보면 분명 드림 팀인데…… 저를 까탈스러운 관객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웬만하면 감동하고 충격 먹고 파안대소하기를 아끼지 않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영웅>은 저를 압도하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는 영화였습니다. 그러니 영화를 재미있게 본 분들은 더 이상 이 글을 읽지 않는 게 건강에 좋을 듯싶네요. 생각이 다르면 서로 멀리하는 게 최고지요. 늘 같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영웅>에 시큰둥한 분들이 옳거니 맞장구를 치며 끼리끼리 놀아보자고 혹할 만한 내용이 이어질 것이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제가 이빨이 약해서 오징어도 잘 못 씹거든요. 마음이 약해서겠지요. 그래서 <영웅>을 놓고도, 화살이 메뚜기떼처럼 하늘 가득 날아가는 장관도 한두 번이지, 물론 스펙터클만으로도 관객을 시종 압도할 수 있어, 하지만 그러려면 어설픈 꿍꿍이속을 깨끗이 버려야 한다는 것도 모르나, 아니면 <라쇼몽>이 장난인 줄 아느냐…… 그런 말 못합니다. 그 좋은 배우들 데려다 놓고 장예모는 기껏 ‘감독의 예술’밖에 못하는구나, 탄력과 깊이는 부드러움에서 나오는 건데 이건 너무 딱딱해, 창이 활처럼 휘는 인상적인 컷만 찍어내면 뭐하나, 영화는 갈수록 잔뜩 굳어서는 마침내 만리장성이나 보여주고…… 하는 식으로 투덜대는 제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데리고 사는 컴플렉스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싫은 소리 못하는 거. 그럼 도대체 뭐 하자는 수작이냐구요?
저는 만만한 영화를 보고 나면 장난을 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해집니다. 비판이나 분석은 그만한 식견을 갖춘 분들이 맡아서 해줄 일이구요, 제 경우는 그저 엉뚱한 의문이 고개를 내밀어 영화를 비틀어달라고 부추기는 거지요. 가끔은 영화를 보는 도중에도 그런 충동에 시달리곤 합니다. <영웅>은 꽤 심각한 영화 아닙니까. 결말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세계사가 왔다갔다할 판이니, 감히 딴 생각 하며 볼 수 있는 영화가 못 되지요. 그래서 아주 딴 생각은 못했습니다만, 영화를 보는 내내 속으로 이렇게 군시렁거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십보 백본디……
거의 왕년의 유머 ‘니기미 김진기……’에 맞먹는 페이소스로 제 뒷골을 간지럽힌 그 의문. 바로 <영웅>의 시대에, 온갖 영웅들이 날뛰던 그 땅에서 탄생한 심오한 진리. 오십 걸음이나 백 걸음이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일설에 의하면 반올림의 유래가 되었다는 그 놀라운 통찰에 대해, 평소의 저는 그리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랬습니다. 다른 걸 같다고 해서야 되겠느냐는 소박한 입장이었지요. 오십은 백이다? 약분해서 1=2. 그런 식으로 나가다 보면 막가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두 배나 되는 차이를 태연스레 무시할 수 있는 그 시원한 배포가 떫기도 했겠지요. 그런데 참, 제가 지금 느닷없이 무슨 거리 재는 산수 문제를 풀고 있는 겁니까.
영화를 본 분들은 알겠지만, <영웅>에서 백 보의 거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에 비하면 나머지는 다 하찮습니다. 가령, 이야기가 처음에는 이런 줄 알았는데, 다음에는 저런 것으로 파헤쳐지고, 사실은 이도 저도 아닌 제 3의 진실이 있었다, 그게 뭔데? ‘天下’야…… 뭐 이런 닳고닳은 겉멋과 냄새나는 구호에 현혹될 필요는 없습니다, 없고요. 화면 색깔 바꿔가며 요란을 떤다고 될 일도 아니지요. 아, 퍼뜩 또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 것들은 죄다 연막이고 위장이 아닐까? 제가 간파한 대로, <영웅>은 오로지 ‘백 보’에 관한 영화가 아니겠는가. 장예모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테니, 우리끼리 조용히 얘기해 보지요. 왜 백 보인가, 백 걸음의 거리여야만 하는가……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해 책임지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시황(영화에서는 아직 황제가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부르겠습니다)이 안전할 수 있는 거리의 최소값을, 말을 바꾸면 자객의 최대 사정거리에 해당하는 디폴트 값을 백 걸음으로 매긴 근거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알아서 알아내라는 걸까요? 실제로 저는 그 점에 신경쓰느라 영화의 굉장한 장면들을 온전히 감상하지 못했습니다. 구십구 보도 아니고 백일 보도 아니고 왜 백 보인가, 그저 꽤 먼 거리의 상징일 뿐인가, 그렇다면 정말 오십보 백본디, 백 걸음 떨어져서 죽일 수 없다면 오십 걸음에선들 가능할 텐가…… 제가 괜한 억지를 부리고 있나요?
아닙니다. 처음에는 저도 가벼운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생각할수록 이것은 중요한 문제라는 확신이 듭니다. 요는 <영웅>이 갖춰야 할 것은 ‘거리의 미학’이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이미 건드리고 있으니까요. 훌륭하게 보여주기도 하지요. 모든 대결이 피할 수 없는 거리. 자, 영화와의 거리를 좀더 좁혀 볼까요. 이연걸(영화 속 이름은 ‘무명’이지만 그냥 그렇게 부르겠습니다)이 백 보 안으로 진입해서 진시황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갑니다. 이십 보, 십 보……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고조되는 긴장은 격조 있습니다. 진시황과 이연걸 사이에는 수많은 등잔불이 가로놓여 있군요. 진시황은 그 불꽃들의 흔들림으로 이연걸의 마음을 읽습니다. 대결이지요. 어떤가요? 괜찮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거기까지라는 거죠. 그 팽팽하게 당겨진 거리가, 안타깝게도 너무 쉽게 무너져 버립니다. 감독이 거리를 놓친 거죠. 진시황이 지나치게 멋있습니다. 물론 굉장한 인물이었겠지요. 하지만 이건 영화잖아요. 영화니까 더 멋있게 가도 할 말 없는 거 아니냐구요? 그렇죠, 더구나 전설에 착안한 영환데 문제될 게 없지요. 문제는 다시 <영웅>이 스스로 그어 놓은 반경 ‘백 보’의 생명선으로 돌아오면 발견됩니다. 생명선이 곧 사선인 매혹적인 경계가 사라진 거지요. 무슨 소립니까. 자신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이 적 안에 있었다며 눈물로 감동하는, 더군다나 자신의 칼을 자객에게 내주고는 돌아서서 ‘劍’이라는 글자에 담긴 평화의 진리를 깨우치는 이 영화의 진시황은, 애초에 백 보의 거리와는 어울리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니까 이연걸이 필생의 업으로 연마한 ‘십보 필살’의 신기가 무색해질 수밖에요. 그래서 홧김에 화살받이가 되어 죽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이연걸이……
큰일났습니다. 저에게 허락된 지면(화면이라고 해야겠네요)의 분량을 훨씬 넘겨버린 거 있죠. 제 글이 <영웅>을 닮아가나 봅니다. 벌려놓기만 하고 수습이 안 되는…… 저는 그래도 한결 낫지요. 대충 얼버무리면서 끝내도 무슨 큰 욕을 먹겠습니까. <영웅>은 어떤가요?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결국 자막이 뜨죠?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죠? 지가 쌓았나요? 그러니까 말이죠, 처음부터 긴장할 거 하나도 없었다구요. 영화에서 진시황이 죽을 리가 없으니까. 말하자면 <영웅>은 결과를 알면서도 흥미진진한 <형사 콜롬보>식의 고급 드라마가 되었어야 하는데, 오십보 백보가 되어 버렸으니 원…… 뭔가 달랐어야죠. 최소한 열 걸음과 백 걸음은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줬어야죠. <영웅>이 그걸 못하는 바람에 제가 다른 얘기를 못하고 글을 맺어야 한다는 게 애석할 뿐입니다. 이 영화, 그래도 옥이 많이 섞인 티라고나 할까요. 특히 칼싸움할 때 나는 소리…… 아! 그 소리 정말 죽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