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기억하기에 <블러디 발렌타인>은 발렌타인 즈음해서 개봉 소식이 들렸다. 제목을 시기에 맞추겠다는 계산이었을 게다. 게다가 당시 미국에서도 적잖은 흥행 성공을 거두던 터라 그 여세를 몰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포영화는 역시 여름시즌! 이라는 오랜 전통 아래 7월 23일로 날짜가 연기됐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극장으로 들어와 공포영화로 한기를 느끼라는 의도였으나, 슬슬 장마가 온다니 이를 어쩌나? 그러나 걱정할 일 없다. <블러디 발렌타인>은 장마를 뛰어넘을 3D 입체영화라는 복안을 갖고 있다. 3D로 공포영화 본 적 있나? 없음 말을 하지 말자고.
쿠엔틴 타란티노가 극찬한 1981년작 <피의 발렌타인>을 리메이크한 영화, TV 드라마의 젊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영화, 무식하게 잔인한 고어 영화 등등 <블러디 발렌타인>에는 여러 수식어가 붙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이것이 세계 최초의 Full 3D 호러영화라는 점이다. 오프닝의 제작사 로고부터 영화 마지막의 엔딩 크레딧과 짧은 보너스 영상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3D 입체 영상으로 무장했다. 여기까지 듣고, 도끼 같은 게 갑자기 객석으로 날아오는 수준이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50% 정도 답으로 인정해주겠다. 물론 입체 영상이라는 이름에 맞게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할 장면이 여럿 등장하긴 하지만, 그 외의 일반적인 장면까지 모두 3D 입체라는 점이 기존의 어떤 영화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영화만의 새로움이다.
영화를 보는 것이 중요하지, 입체 영상을 경험하는 것이 뭐가 중요하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거다. 그야말로 핸드폰 액정으로 보나, PC 모니터로 보나, 스크린으로 보나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얘기다. 지금까지 2D 영화들이 스크린에 영사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수준에 그쳤다면, 3D 입체영화는(굳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장면이 아니더라도) 모든 장면에서 3차원, 말 그대로 입체를 경험하게 해준다. 영화 속의 모든 사물이 질감과 양감을 갖고 있으며 미장센은 공간감마저 지녔다. 단순히 포커스 인/아웃을 통해 거리감이 ‘있어 보이게’ 하는 효과가 아니라 실제 거리감을 ‘느끼게’ 해준다. 기존 영화들은 프레임 이미지를 보여주기에 급급했지만 <블러디 발렌타인>은 관객을 직접 프레임 안으로 데려다 놓는다. 하여 이 영화를 3D로 보지 않은 사람들은, 감히 말하건데 영화의 반도 못 본거다. 이 영화는 줄거리를 말하고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설명되는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블러디 발렌타인>이 3D만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놀이동산에서 경험했던 10~15분 길이의 입체영상이 아닌, 영화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재미 역시 중요한 요소다. 영화는 광산주의 아들 톰(젠슨 애클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과거 톰은 실수로 다섯 명의 동료를 죽이고 해리를 혼수상태에 빠뜨리는 사건을 일으켰다. 1년 뒤 의식을 찾은 해리는 미치광이 살인마가 되어 22명을 잔인하게 죽이고 그들의 심장을 꺼내는 엽기 행각을 벌이고 사라진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광산을 처분하기 위해 다시 고향을 찾은 톰은 경찰이 된 친구 엑셀(커 스미스)과 그와 결혼한 옛 연인 사라(제이미 킹)을 만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미치광이 해리도 다시 부활해 더욱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죽여 나간다.
영화는 끔찍한 살해 장면이 볼거리인 전형적인 슬래셔 영화다. 여기에 <스크림>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와 같은 젊은 감각을 섞어 익스트림 슬래셔라는 이름을 달았다. 빠르고 강렬한 화면 속에 청춘스타들을 등장시켜 감각적인 화면을 구성했다. 사실 내용에서 획기적일 것은 없다. 그저 슬래셔 영화들이 지닌 관습적인 특징을 드러낼 뿐이다. 곡괭이를 주무기로 사용하는 살인마는 이 무식하고 잔인한 살인 도구로 찍고 가르고 꽂고 으깨는 등 예상되는 모든 잔인한 사용법을 보여준다. 객석을 향해 날아오던 곡괭이가 머리에 박히고, 머리를 관통시킨 곡괭이를 천장에 꽂거나, 턱에 박힌 곡괭이를 앞으로 잡아당겨 치아와 턱뼈가 객석을 향해 우수수 떨어지게 한다. 의도적으로 3D 입체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한 앵글도 있지만, 공포영화 특유의 잔인한 장면이 입체 영상과 더해져 그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아쉬운 점은 치밀하지 않은 전개 방식이다. 초반부터 살인마를 등장시키는 전개 자체는 속도감이 있지만, 캐릭터의 설명이 불충분하고, 사건의 인과 관계도 타당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공포영화 특유의 프레임을 통한 임팩트는 나쁘지 않지만, 시퀀스 전체를 아우르는 흥미진진함은 다소 부족하다. 그나마 마지막에 누가 범인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장면은 흥미롭다. 사실 살인마가 광부 마스크를 쓰고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등장했을 때부터 예상됐던 일이긴 하지만 그나마 영화가 프레임에 의존하지 않고 시퀀스의 긴장감을 주는 유일한 부분이다. 살인마는 마스크 덕분에 현장에서 유유히 빠져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속편에 대한 암시보다는 피의 발렌타인은 끝나지 않는다는 공포영화의 고전적인 엔딩이다.
<블러디 발렌타인>은 공포영화로서의 평가 이전에 영화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작품으로 거론될 것이다. 최초의 Full 3D 입체영화라는 점과 함께 그동안 애니메이션이나 SF, 어드벤처에 국한됐던 3D 입체영화 장르를 공포영화로까지 넓혔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 1950년대에 이미 <밀랍의 집> <크리처스 프럼 더 블루라군> <더 마스크> 등의 작품이 호러와 3D 입체영화의 결합을 시도한 적이 있긴 하지만, Full 3D로 제작한 것은 처음이다. 입체영화의 효과를 잘 드러내기에 공포영화처럼 좋은 장르도 없다. 하지만 3D 입체상영 시설을 갖춘 극장이 국내에 많지 않다는 것은 안타까운 부분이다. 곧 드림웍스와 픽사를 위시한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이 3D로 제작되고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나 스티븐 스필버그의 <틴틴> 등이 3D로 개봉되는 시점에서 3D 입체영화 상영 환경의 부족은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극장은 극장만이 줄 수 있는 영화 관람의 특별한 매력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기다.
2009년 7월 13일 월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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