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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 증거가 없다고? 이 영화가 바로 문화적 증거” <귀향> 언론 시사회
2016년 2월 5일 금요일 | 이지혜 기자 이메일

<귀향> 언론 시사회가 4일 오후 2시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열렸다. 이날 시사회에는 조정래 감독과 주연배우 최리, 서미지가 참석했다.

<귀향>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구성된 픽션으로 일본군에게 위안부로 끌려가 죽은 소녀들의 영혼을 어린 만신이 귀향시킨다는 이야기다. 영화를 연출한 조정래 감독은 <두레소리>와 <파울볼>을 연출한 바 있다.

시사회 후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는 기자들의 열띤 질문이 이어졌다. 특히 일본인 취재 기자가 ‘영화 속 학살장면은 정치적 의도가 가미된 픽션이 아니냐’는 식으로 묻자 조정래 감독이 격앙된 어조로 답변하기도 했다. 조정래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화가 나는 게 위안부 피해 증거가 없다는 말이다. 증언집도 많을뿐더러 이 영화 자체가 문화적 증거가 되길 바란다”고 답했다.

아래는 조정래 감독, 그리고 최리와 서미지 배우와의 일문일답이다.

첫 인사
감독: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다.
최리: 처음이라서 많이 떨린다. 타향에서 죽은 소녀들을 귀향시키는 ‘은경’ 역을 맡았다.
서미지: 어린 시절 위안부로 끌려 간 ‘영희’ 역을 맡았다. 본격적인 영화 출연은 <귀향>이 처음이다.

어린 만신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캐릭터를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감독: 강일출 할머니의 ‘태워지는 처녀들’이라는 그림을 보고 이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다. 그 그림을 보고 많은 충격을 받았다. 소녀들이 타향에서 불타며 외롭게 돌아가셨으니 영화에서나마 고향으로 모시고 싶었다. 영화가 한 번 상영될 때마다 한 분의 영혼을 고향으로 모신다는 생각으로 영화 속에 무녀를 등장시켰다. 사실 이 영화는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다. 위안부 피해 여성의 문제는 전세계의 인권 문제다. 유태인 학살이 유태인 개별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범죄, 인권의 문제인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가 해외에서 시사회를 했다고 들었다. 해외 반응은 어떻던가?
감독: 얼마 전 외국에서 후원 시사회를 진행했다. 정말 많은 교민들과 미국인, 정치인들이 왔다. 현지분들이 ‘미국인이 영화를 보고 펑펑 우는 건 처음 본다’고 말하더라. 미국 문화에서는 슬픈 영화를 봐도 슬픔을 참는 게 미덕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로툰도 시장님이 펑펑 울고 나서는 ‘이 영화는 파워풀한 영화다, 전세계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셨다. 말할 필요도 없이 교민들도 많이 우셨다. 그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브라운대에서도 상영을 했다고 들었다. 학생들의 반응은 어땠나?
감독: 와세다 대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여학생은 너무 많이 오열했다고 말했다. 그 분은 나를 계속 따라다니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런 사실이 있었단 걸 몰랐으며 몰랐다는 게 부끄럽다고도 했다.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봤으면 좋겠다고 대화를 나누었다. 브라운대 시사회에서는 거의 80% 이상이 미국인 학생으로 채워졌다. 브라운대의 한 교수님은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모여 영화를 본 건 처음이라고 하셨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원래 15분 예정이었던 Q&A도 한 시간 이상 진행됐다. 정말 많은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영화를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하다고, 수 백 번은 말한 것 같다.

많은 배우들이 재능기부 식으로 참여했는데.
감독: 손숙 선생님을 비롯해 오지혜 씨 등 정말 많은 배우들이 재능기부에 가깝게 출연해주셨다. 재미교포 분들도 많이 출연하셨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중점을 둔 건 원어민이 제대로 일본어를 구사하는 것이었다. 일본관객들이 이 영화에 영화적으로 공감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배우를 구하기까지 지난한 세월이 이어졌다. 그런데 재미교포 분들이 온갖 궂은 일을 다 하시면서까지 출연해주시더라. 특히 ‘정민’ 역을 맡은 강하나 양은 재일교포 4세로 제주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위험한 상황인데도 촬영에 임해주신 재일, 재미교포 분들과 일본 사회에서 모금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시나리오가 만들어지고 개봉하기까지 14년이 걸렸다. 어떤 일들이 있었나?
감독: 제작기간이 오래 걸렸지만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간 건 4월부터 6월까지다. 하루 2회차 분량으로 총 44회차를 촬영했다. 강행군이었다. 그런데 막상 촬영을 끝내고 나니 후반작업비가 없어 클라우드 펀딩으로 모금을 했다. 8.15 광복절에 나눔의 집 할머니들께 이 영화를 상영하겠노라고 약속한 게 있어 빨리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영화 제작기와 이야기가 담긴 15분짜리 미니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서 보여드렸다. 15분 동안 기쁘긴 커녕 가슴 떨리고 긴장이 돼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할머니들은 그걸 보고 우시면서 많은 좋은 말씀들을 해주셨다. 이후 부족한 비용은 시민들이 모금 해주셨고 후반작업 제작진들도 터무니 없이 적은 진행비로도 정말 열심히 해주셨다. 2002년 아무 것도 모른 채로 할머니들을 만났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남자로서의 죄의식이 들었다. 항상 내 곁엔 할머니들이 함께 계셨다.

배우로서 쉽지 않은 작품에 출연했다. 영화를 본 소감이 어떤가?
최리: 고등학생 때 감독님께서 시나리오를 전해주셨다. 너무 큰 역할이라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런데 강일출 할머니께 한 시간 동안 얘기를 듣고 나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이 역할을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처음엔 영화를 봐도 울지 않을 것 같았는데 영화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알려졌으면 좋겠다.
서미지: 처음에는 인터넷으로 시나리오를 봤다.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 정말 많이 울었다. 이 작품에는 꼭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오디션에 참가했다. 꼭 배우가 아니더라도 다른 방식으로라도 이 영화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영화를 찍으면서 영화를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국민 여러분이 도와주신 덕에 영화가 개봉하게 돼 정말 감격스러웠다. 나비가 고향으로 날아드는 장면에서는 타향에서 돌아가신 소녀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뜻깊은 영화에 참여하게 돼 영광이다.

실제 일본인도 출연했다고 들었다.
감독: 실제 일본인들도 출연해 열연하셨다. 안타깝게도 편집에서는 없어졌다. 자비로 비행기를 타고 와 출연해주신 그 분들께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이해해주셨다. 편집한 이유는 러닝타임이 길어진다든가 드라마적으로 중언부언했기 때문이다. 마음 아프다.

인권이 유린되는 장면들이 세트장을 통해 표현됐다. 땅을 파고 시체를 넣거나 위안부가 모여있는 세트장을 준비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을 것 같았는데 에피소드가 있나?
감독: 제작진들과 함께 틈만 나면 나눔의 집의 역사관을 돌아봤다. 나눔의 집 아래에는 위안소의 모델과 실제 기물들이 있다. 좀 기괴한 얘기지만, 나눔의 집 역사관은 신기할 정도로 한기가 심하다. 역사관의 자료와 고증을 바탕으로 세트를 짓고 고사를 지내 촬영을 하는데 거기서도 한기가 돌았다. 세트장에만 들어가면 너무 추워졌다. 스텝들이 정말 힘들어했다. 다들 강건한 사람들이었는데도 우는 게 일이었다. 다들 최선을 다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일본이 나쁘다, 일본 제국주의를 고발하자는 영화가 아니다. 일단 영화를 통해서나마 타향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고향으로 모시고 싶었고 영으로나마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서 만든 영화다. 한 마디로 <귀향>은 치유의 영화다. 정치적인 영화가 아닌 휴먼 드라마로 많은 분들이 봐주셨으면 한다. 아직까지 고통 받고 계신 마흔 여섯 분의 할머니들이 치유 받고 영령들이 마음을 푸실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실제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만나 뵙고 인터뷰 하며 기억에 남는 게 있나?
서미지: 촬영 전에 나눔의 집을 방문해 할머니들을 마주했다. 할머니들은 아직까지도 일본어를 구사하시며 영화를 꼭 만들어달라고 우셨다. 마음이 아팠다. 내 두 손을 꼭 붙잡고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 영화 속에서는 일본군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던 장면이 등장한다. 그 학살이 어느 정도가 사실인 건가?
감독: 앞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강일출 할머니의 ‘태워지는 처녀들’이라는 그림에서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 20만 명의 조선인 여성들이 전장에 끌려갔고 238명만 돌아왔으며 지금은 46명만 살아계신다. 많은 일본인들이 위안부 피해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하지만 증언집에 학살에 대한 수많은 기록들이 남아있다. 소용없다고 판단하면 산에 끌고 가 죽여 버린다는 얘기가 많다. 위안부 증언집은 죽음의 기록이다. 산 자가 죽은 자에 대해 말한다. 이 영화를 만들고 시사회를 진행하면서 가장 화가 나는 말이 증거가 없다는 말이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은 증거로 취급하지도 않는 현실에서 내 영화가 문화적 증거로 남았으면 좋겠다. 2014년 10월 24일, 티저 영상을 찍어 공개했다. 이 영상은 정민이가 ‘아버지, 아버지’하며 달려가는 장면만 있다. 그런데 많은 외신 기자들이 정말로 그렇게 어린 소녀들이 끌려갔냐고 물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끌려갈 때의 나이가 평균 16세다. 이 영화가 개봉된 뒤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난 미국에서 만난 일본인들이 내 손을 잡으며 고맙다고 말할 때 구원을 받은 것 같았다. 미국의 한 보수 잡지가의 기자는 내게 여자로서 고맙다고 말하기도 했다.

마지막 인사말
감독: 영화에 관심 가져주신 내외신 기자에게도, 스텝들에게도 감사하다. 개봉을 앞두고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렇게 영화를 개봉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내게 영화를 만들라고 말씀하시기 보단 우리가 알려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셨다. 그 말씀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알 수 있게 도와주셨으면 좋겠다.
최리: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봐주셨으면 좋겠다. 이 영화가 나오기까지 도와주신 시민들에게 정말 감사하다.
서미지: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두서없이 대답한 것 같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하다.

2016년 2월 5일 금요일 | 글_이지혜 기자(wisdom@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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