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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332시간’… 초과 노동과 저임금이 일상인 사람들
2017년 10월 1일 일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사진출처: pixaby
사진출처: pixaby
‘12 ON 12 OFF’ 영화산업노동조합(이하 ‘영화노조’)이 제작해 배포해온 스티커 문구다. 12시간 일하면 12시간은 쉬어야 한다는 뜻이다. 영화 촬영 현장의 현실을 알기 어려운 일반인에게는 좀 의아한 권고일 것이다. 하루에 12시간이나 일을 한다고? 속사정을 알면 씁쓸한 마음이 앞선다. 영화노동자는 경우에 따라 24시간 연속으로 일하고, 두 달 동안 단 하루도 쉬지 못하기도 한다. 한 달 동안 꼬박 322시간을 일한 경우도 있다. 일한 만큼의 임금을 온전히 보상 받는 건 ‘꿈’같은 일이다. 어쩌다 한 번 생기는 예외적인 일이 아니다. 영화노동자에게는 비일비재한 일상이다.

24시간 연속 근무, 그마저도 임금 체불로 소송
한 달에 무려 ‘332시간’, 두 달 동안 휴일 없는 경우도
초과 노동 대가? 조금이라도 받으면 운 좋은 것

경력 12년 차인 조명팀 스탭 A씨는 올해 2월 진행된 모 영화 촬영 현장에서 24시간 연속으로 근무했다. 아침에 출근해 다음 날 아침까지 퇴근하지 못했다. 하루 8시간을 초과해 일할 시 1.5배, 12시간 초과 시 2배 임금을 지급하기로 한 노사 간 단체협약은 무용지물이었다. 제작사가 애초부터 실제 일한 시간과 상관없이 미리 정해진 계약금과 잔금 형태로 임금을 지급하는 도급계약을 요구한 까닭이다. 영화산업 내에서 도급계약은 저임금의 주범이다. 아무리 오래 일해도 미리 약속한 임금만 지급하면 된다. 공교롭게도 한 달 반가량 이어진 촬영이 중단되고 제작이 무산되면서 A씨는 잔금에 해당하는 임금마저 받지 못해 현재 소송을 진행 중이다.

2008년 영화계에 발을 들인 미술팀 스탭 B씨는 최근 크랭크업한 모 영화 촬영장에서 지난 3월 한 달 동안 꼬박 332시간을 일했다. 산술적으로 1주일에 80시간 이상, 하루에 11시간 이상 일한 셈이다. 그동안 B씨에게 주어진 ‘온전한’ 휴일은 단 하루였다. 실제로 촬영이 진행된 날은 19일, 즉 19회차지만 배우가 연기하기 전 미리 세트를 완성해야 하는 ‘선세팅’ 작업이 필수적인 미술팀의 업무 특성상 촬영 없는 날에도 근무가 계속됐다. B씨는 대구에서 서울, 서울에서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며 ‘선세팅’ 작업을 진행했다. 노사 간 단체협약에 따르면 실제 촬영이 진행되지 않는 날에도 불가피하게 일을 해야할 경우 하루 10시간을 초과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현실이 원칙과 다를 뿐이다.
 B씨가 3월 한달간 일한 기록
B씨가 3월 한달간 일한 기록
경력 3년 차인 미술팀 스탭 C씨는 열악한 여건에서 장시간 초과 노동을 경험한 후 “노동에 대한 공포감이 생겼다”고 말한다. 지난 상반기 개봉한 모 영화 촬영 당시 C씨는 폭우가 쏟아지는 야외 촬영장에서 25시간을 버텼다. 오는 추석 연휴 개봉을 앞둔 모 영화 촬영 현장에서도 두 달 동안 휴일 하루 없이 일했다. 계약서에는 주 2회 휴일이 명시돼 있었지만 경우에 따라 쉬는 날에도 아침 8시부터 자정까지 일했다. 초과 노동의 대가로 손에 쥔 건 30시간에 해당하는 임금 20만 원 가량이었다. 실제 일한 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지만, 그마저도 제작사 인심이 좋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C씨의 설명이다. C씨는 이전에 참여했던 네 편의 작품에서도 줄곧 비슷한 상황을 겪었지만 단 한 번도 초과 노동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아본 적 없다.


영화산업 ‘특례’로 지정한 근로기준법 제59조
사실상 장시간 초과 노동 ‘방치’
노사 간 서면 합의 이루어지지만 ‘명목상’
 영화노조 안병호 위원장
영화노조 안병호 위원장
상식을 뛰어넘는 영화노동자의 초과 노동과 저임금이 관행처럼 이어질 수 있었던 건 근로기준법 제59조의 영향이다. 근로기준법 제59조는 영화산업을 비롯한 26개의 산업의 근로시간과 휴게시간을 ‘특례’로 지정하고 있다. 특수성이 인정 돼야 하는 산업인 만큼 1주일에 52시간으로 제한돼있는 노동 시간을 그 이상으로 연장하고, 쉬는 시간도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골자다. 영화노동자 A씨, B씨, C씨가 초과 노동을 일상처럼 받아들이고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없었던 밑바탕에는 근로기준법 제59조라는 ‘법적 허용’이 공고하게 깔려있다.

지난 14일(목)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서 진행된 ‘근로기준법 59조 완전폐기 결의대회’에서 영화노조 안병호 위원장은 “근로기준법이라는 게 노동자를 보호하고 인권을 보장해주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영화산업에 적용되는 59조는 ‘너희는 특수한 환경이니까 더 오래 일하고 덜 쉬어도 된다’고 말한다. 영화는 노동보다 창작물에 가깝다는 핑계가 영화노동자를 혹사하는 합리화 논리로 이용된다”고 지적했다. 또 “초과 노동에 대한 수당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초과 노동 시간을 제한하는 쪽이 더욱 합리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노동자가 근로기준법 59조에 의거한 초과 노동을 ‘거부’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필수적으로 선행돼야 하는 사용자(제작사)와 근로자대표 간 서면 합의에 동의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제작사라는 ‘갑’과 임금 계약을 맺는 ‘을’의 입장에서 ‘조금 더 촬영하자’는 제안에 퇴짜를 놓을 만한 배짱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A씨는 지난해와 올해 근로자대표로 참여한 두 작품에서 각 팀의 팀장급에게 일일이 의견을 물은 뒤 초과 노동 여부를 결정하고 서면 합의를 이행한 적이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민주적인 경우”라고 불릴 만큼, 영화 촬영 현장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는 영화노동자 56%
설문조사에 “노예” 언급도
근로기준법 제59조 ‘축소’ 아닌 ‘폐기’ 필요
 '12ON 12OFF' 스티커
'12ON 12OFF' 스티커
올해 6월 영화노조에서 영화노동자 128명을 대상으로한 근로시간 관련 설문조사에서 ‘하루 평균 일하는 시간’ 항목의 답변은 ▲10시간 초과 12시간 이하(44명) ▲12시간 초과 13시간 이하(31명) ▲13시간 초과 15시간 이하(28명) ▲15시간 이상(13명) ▲8시간 초과 10시간 이하(12명) 순으로 집계됐다.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하는 영화노동자가 전체의 56%를 차지했다. 열 명 중 한 명은 15시간 넘게 일했다. 같은 설문조사에 따르면 ‘일주일 노동일수’는 ▲5일(53명) ▲6일(44명) ▲7일(18명) ▲4일(10명) ▲3일(3명) 순으로 나타났다. 절반에 가까운 영화노동자가 주 2회 휴무를 보장받지 못했다.

초과 노동의 고단함을 증언하는 현장의 목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8월 영화노조에서 영화노동자 171명을 대상으로한 주휴일 관련 설문조사에서 총 59명이 ‘휴일 관련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작성했다. 답변의 절대다수는 ‘쉬는 날을 보장받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노예”라는 두 글자로 자신의 상황을 압축한 답변도 눈에 띄었다. “현장편집일을 하다 보면 휴일에도 잔업을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보상이 일관적이지 않다”, “’선세팅’과 뒷정리, 반납 등을 전담하는 미술, 소품팀에게 주휴일에 쉬거나 휴일근로수당을 받는 건 꿈 같은 이야기” 등 영화산업 현장에서 근무해도 팀에 따라 특수한 형태의 초과 노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답변도 포함됐다.

영화노조 안병호 위원장은 “영화노동자도 그저 남들과 비슷한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다. 주말에 쉴 수 있고, 평일에 다섯 시간 이상 잘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이다. 장시간 초과 노동을 방치하고있는 근로기준법 59조는 폐기돼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노동자의 초과 노동을 사실상 무제한 허용하고 있는 근로기준법 제59조는 1961년 처음 만들어졌고, IMF 시기를 거치며 수정돼 현재 형태를 띠게 됐다. 논란 끝에 지난 7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소위를 거쳐 ‘축소’ 논의가 이루어졌다. 현재 26개에 해당하는 산업을 10개로 줄인다는 계획이다. 영화산업은 줄어든 10개 산업에 여전히 남아있다. 9월 정기국회에서 해당 사안이 최종적으로 다뤄질 예정이다.




2017년 10월 1일 일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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