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검색
검색
현대판 전설의 고향과 할리우드의 감성이 만났을 때
| 2003년 1월 13일 월요일 | 서대원 이메일

우리가 7000원이라는 화폐를 지불하며 영화를 보러 가는 이유는, 영화의 메커니즘을 통해 지난한 현실로부터 탈주, 또 다른 외부의 세계를 경험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호러 영화는 그 외부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음과 동시에 그토록 진저리 난 현실의 질서로 다시금 편입하고 싶은 욕망 또한 불러들이는 기이한 장르다. 다시 말해,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화시키는 일반적인 영화와 달리 호러 영화는, 보는 이가 공포의 가해자와 피해자 양 측 모두의 입장에서 서서 피학적 공포감과 가학적 카타르시스를 맛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링>의 경우는 이 같은 호러 영화의 큰 틀에서 조금은 벗어나 미묘하게 와 닿는다. 아마도 음침하고 불길한 공포의 기운을 나르는 매개체가 비디오라는 미디어 때문이 아닌지.

영화는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나 나이트 샤말란의 <식스 센스>처럼 피 한 방울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관객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 온다. 물론, 기괴스러운 눈동자를 확연히 노출시킨 채 극도의 불안함 속에서 죽은 듯한 사람들을 형성한 공포의 대상에 대해서도 영화는 함구하고 있다.

고어 버빈스키의 <링>은 나카타 히데오의 <링>을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또한 수년 전 김동빈 감독도 일본 영화 <링>을 재현해 한반도에 바이러스를 유포시킨 바 있다. 결국, 일본에서 한국을 경유해 미국까지 <링>의 죽음의 바이러스는 자기 증식을 한 셈이다. 북미 대륙을 초토화시키며 확실히 감염시킨 할리우드 판 <링>은 한 마디로 원작보다 비주얼적인 측면에 많은 비중을 둔 미스터리 호러 물이다. 동양적 색채가 가해진 호러 영화를 그다지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 파란 눈을 가진, 자신들의 정서에 부합하고자 버빈스키는 저주가 담긴 내러티브와 캐릭터 역시 그들식대로 조금 비틀었다.

아시아의 <링>은 원혼이 스멀스멀 화면에서 기어 나오는 마지막 한방을 위해 전반 중반이 희생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을 정도로 조금은 밋밋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한국의 <링>은 마지막 그것조차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버번스키 감독은 이 점을 이미 간파,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영화를 요리했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진한 선홍빛의 피 같은 죽음을 알리는 표식들과 비디오 테이프의 화면 구성, 지극히 할리우드적으로 죽은 이들을 묘사한 형상은 이야기의 긴장감과는 또 다른 영화적 재미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특히, 배의 갑판위에서 길길이 날뛰는 거대한 말이 등장하는 신에서는 이전의 공포 영화에서는 감지되기 힘든 강렬함이 느껴질 정도이다. 결국, 영화의 이미지는 한국과 일본의 <링>에 비해 한층 세련되고 역동적이고 차갑다는 말이다.

인물들의 캐릭터를 보자면 레이코 역을 맡은 레이첼(나오미 왓츠)은 아득한 모성애를 보여주기엔 다소 버겁지만 그런 대로 잘 소화해내고 있고, 레이첼과 함께 공포의 근원을 탐사하는 노아(마틴 헨더슨)는 일본의 다카야마와는 달리 영적인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이성적이며 역할 역시 미미하다. 원귀인 사마라(다베이 체이스)는 나카타 히데오의 사타코가 성숙한 여자였던 반면에 어린 소녀로 등장한다. 레이체의 아들인 에이단(데이비드 도프먼)은 사마라와 영적 교감을 나누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소년으로 업그레이드돼 나온다.

위와 같은 캐릭터들의 성격을 통해 우리는 동양과 서양이 기대고 있는 정서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마라가 성인에서 아이로 에이단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소녀으로 설정된 것은 서구가 어른보다는 아이들을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닌 비이성적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오멘>처럼. 또한 공포의 실체에 접근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할리우드의 <링>은 노아가 비현실적 힘이 전혀 없음에 따라 과학의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장치를 빌려 이성적으로 비이성적인 사건들을 풀어 나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불길한 저주의 모태 역시 이러한 자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링>은 마녀 사냥식으로 기이한 힘을 지닌 모녀를 사회가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원한이 시작되고, 서구의 <링>은 사회 대신 좀더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문제인 가족의 아동학대로 저주가 비롯됐음을 보여준다.

비주얼에 방점을 둔 <링>은 그만큼의 할리우드적 재미와 시각적 공포감을 자아내는 데 있어서는 분명 성공했다. 하지만 역으로 보여 주는 형식의 강점은 보여 지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을 무력화시키는 의도치 않은 우를 범하기도 한다. 일례로 놀이동산의 공포체험관에 들어갔을 때, 화들짝 놀랄 만한 대상들이 빈번하게 출현하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즐거워하기는 한다. 하지만 반복학습에 따라 그 전율적 순간의 충격은 반감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영화가 일본의 <링>보다 한 수 아래로 느껴지는 것은 결정적 막판 장면, 사마라가 화면에서 기어 나오는 장면 때문이다. 원작의 <링>은 그 음산한 분위기에 맞게끔 사다코의 현실세계로의 진입을 롱테이크(길게 찍기)로 표현한 반면 할리우드는 점프 컷을 이용한다. 게다가 사마라의 모습은 안타깝게도 온갖 풍상을 겪으며 원한이 사무친 여자로 칭하기에는 어색할 정도로 너무나도 선이 굵고 덩치가 좋은 남성적 이미지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전설의 고향>풍의 헤어스타일과 복식에 얼굴은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의 살인마? 하지만 현대판 <전설의 고향>이라 할 만한 원작 <링>에다 할리우드적인 감성을 불어넣어 이 정도까지의 이미지와 공포감을 조성했다는 것은 정말이지 기대이상의 성과이다.

끝으로, 비디오 시청시 어김없이 나오는 "불법 비디오는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울 수 있습니다”라는 공익광고 문구, 가감없이 바로 <링>을 두고 하는 말이다.

뱀다리
영화 <링>의 공포의 증식 과정을 보면 대단히 비인간적인 현실 세계의 생존 법칙과 유사하다. 영화의 내러티브를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염사 비디오 테이프를 본 후 살아남기 위해서는 테입을 복사한 후 누군가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는 룰을 파악할 수 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지금 여기 또한, 물리적 이상의 피를 튀겨가며 자기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야 한다. 정당성이 만족스럽게 부여되지 못한 이 명제가 옳다면 <링>은 자본주의가 초래한 숙명적 운명을 저주로서 극대화시켜 투영시키고 있는 것이다.

4 )
loop1434
이때부터가 시작   
2010-02-19 00:50
gaeddorai
난 왜 제이호러가 전혀 무섭지 않을까   
2009-02-22 21:52
ejin4rang
재미있겠네요   
2008-10-16 15:15
js7keien
공포의 정서가 동서양이 다름을 확연히 보여준다   
2006-10-03 16:45
1

 

1

 

1일동안 이 창을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