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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 우주로 가다
솔라리스 | 2003년 4월 21일 월요일 | 임지은 이메일

정신과 의사인 크리스 켈빈(조지 클루니)은 자살한 연인 레아(나타샤 맥켈혼)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행성 솔라리스를 탐사중인 친구 자바리안이 도움을 요청한다. 캘빈이 도착한 우주정거장 프로메테우스에서는 듣던 대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책임자인 자바리안 박사는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태였고, 대원들은 불안정한 모습으로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혹은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누구도 들여보내려 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냐”고 추궁해봐도 납득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던 캘빈은 오래지 않아 스스로 그 의미를 알게 된다. 우주 공간의 그의 방안으로 이미 죽은 레아가 찾아든 것. 행성 솔라리스는 사람들의 기억을 실체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그리던 모습 꼭 그대로 다시 돌아온 레아는 캘빈의 기억이 만들어낸 ‘방문자’였다.

SF의 이름을 달고 있는 <솔라리스>는 그러나 우리가 얼핏 그 장르에서 떠올리게 되는 것들 중 어느 것도 갖추고 있지 않다. 예컨대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홍채인식시스템과 같은 때론 흥미롭다 못해 소름끼치는 미래 사회의 소묘들, 주로 지구인에 적대적인 외계인, 전투― 물론 막막한 우주를 항해하는 대원들은 하나같이 어떤 상대와 싸우고 있지만, 그 ‘적’은 그들 자신의 마음일 따름이다. 대신 영화는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오르페우스의 오랜 전설을 다시 써내려 간다. 그리고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지옥으로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여정을 감싸는 노랫가락은 <솔라리스>에서 딜런 토마스의 시로 대체된다. 그리고, 죽음은 우릴 지배하지 못하리(And death shall have no dominion). 육신이 사라져도, 혹은 서서히 미쳐간다고 해도.

캘빈은 물론 전문가―정신과 의사―로서 승무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솔라리스로 향하게 되지만, 그의 행보는 명백히 죽음을 무릅쓰고 지옥으로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그것에 비유할 만 하다. 이미 앞서 그 행성으로 보내진 군인들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인데다, 자바리언의 메시지가 전달되기 전 묘사되는 캘빈의 무미건조하고 창백한 일상은 혐의를 한층 더해준다. 한편 자바리언은 캘빈을 설득하며 “경험과 배경으로 미루어볼 때 자네 이상으로 적합한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얼핏 듣기로는 의사로서의 캘빈의 유능함을 암시하는 말 정도로만 해석되는 그것이 실은 ‘상처를 가지고 있으며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음’을 의미한 말이었다는 사실을 관객은 곧 알아채게 된다. 캘빈의 마음이 만들어 낸 ‘비지터’를 통해.

나는 상대를 사랑하는 것일까, 내 머리 속 혹은 마음속에 깃든 상대의 기억을 사랑하는 것일까. 나의 기억이 만들어낸 그녀는 그녀 자체인가. 질문의 답을 찾아내는 일은 고단한 여정 끝에 에우리디케를 마주한 오르페우스의 심경을 두 줄 내외로 정리하라, 는 종류의 논술 문항처럼 황망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처음 관람했을 때의 혼란스러움을 고스란히 껴안고 두 번째로 본 <솔라리스>에서 진정성을 읽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캘빈과 레아 사이를 오가는 섬세한 감정의 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더버그 다운―혹은 평소에 비해 훨씬 절제된―세련미는 영화를 잘짜인 소설보다는 시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확실히 우주 공간, 발전된 기술력이 주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옷들을 공기처럼 걸쳐 입은 채 우리 마음속에 있는 공통의 원형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란 매력적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영화 속에 포함될 수 있는 <솔라리스>가 ‘원형’으로서 선택한 것은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 먼저 나온 두 작품들의 잔영을 우선 걷어내고 본다면(물론 리메이크 영화로서 결코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사실은 전제해두고) 소더버그의 <솔라리스>는 꽤 잘 만들어진 한편의 신비로운 사랑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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