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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영진, 아리랑 고개를 다시 넘다
아리랑 | 2003년 5월 28일 수요일 | 박우진 이메일

한국 영화사에 빠지지 않는 전설적인 작품이 하나 있다. 바로 일제 강점기였던 1926년 개봉 당시 관객의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 민족의 울분을 달래주었다는 나운규의 <아리랑>이다. 국내에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직접 목격하기 어려웠던 이 영화를 확인할 기회가 생겼다. 이두용 감독이 리메이크하기로 결정한 것. 풍문으로만 떠돌던 <아리랑>이 2003년 극장에 내려앉는다.

나운규 탄생 100주년을 기념, 제작된 <2003 아리랑>은 원작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 만들어졌다. 흑백 무성 영화에 변사를 도입하고 18프레임으로 찍었다. 관객이 낯설어 하는 건 당연하다. TV 코미디물에서나 간간이 볼 수 있었던, 변사가 영상을 간섭하는 방식과 18프레임을 통해 분주해진 인물들의 행동은 원작의 역사적 무게를 덜며 <아리랑>을 다가가기 쉬운 코미디로 만든다. 미친 영진과, 영희를 향해 죽자 사자 달려드는 기호의 오버 액션 역시 한 몫 한다.

<아리랑>은 한 마을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영진을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는 하지만 영희와 현구, 영진을 사랑하는 명순, 영희에게 흑심을 품은 기호 등 조연들 역시 주연 못지 않게 저마다의 사연을 구구절절 쏟아 놓는다. 그 뿐 아니라, 빚을 갚지 못해 천가의 첩이 된 젊은 과부며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주모, 다리 밑에 사는 거지 남매까지 돌아다보는 넓은 아량을 갖췄다. 보편화되어 있는 할리우드식 단선적 내러티브와는 전혀 다르다. 자칫 산만해질 수 있는 이런 구성은 그러나, 87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완결된 느낌을 준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변사의 앞 뒤 설명과, 모든 사연이 일제 시대 민족의 아픔이라는 통일감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 마을의 풍경을 일일이 간섭하는 전지적 시점 변사의 추임새가 흥겹다. 변사를 맡은 최주봉 아저씨의 입담이 구수하다. 관객이 봐야할 것, 알아야 할 것을 일일이 지정해 주기에 내러티브를 따라가는 것이 편하다. 초창기 영화가 관객과 소통하던 촌스러운 방식도 현대 관객에게는 새로운 경험이다.

줄곧 흑백 화면을 고집하던 영화는 한 순간 컬러로 바뀐다. 기호가 영희를 겁탈하려는 순간, 이를 바라보던 영진이 문득 분노하며 낫을 드는 장면에서다. 관객 역시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이런 전환은 수수하지만 <아리랑>을 ‘다시’ 만든 감독의 개입이다.

그러나 <매트릭스 2 리로디드>의 흥행 몰이에 도전하려는 이 야심찬 영화가 왜 하필 지금 다시 만들어 졌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아리랑>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변사는 끊임없이 ‘우리 영진이’와 ‘불한당 같은 천가(혹은 기호)놈’을 대비시킨다. 일본은 아니지만, 여전히 강대국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틈틈이 반미의 깃발을 흔들고 있는 국민 감정에 호소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아리랑>이 남북 동시 개봉을 추진하며 민족주의에 기대려고 해도 무리가 있다. 전후 맥락은 지워지고, 우리네 억울한 사연들만 나열하며 감상에 호소하는 이 순진한 민족주의는 일제 강점기를 직접 체험했던 당시 관객들에게는 공감을 불러 일으켰을 지 몰라도, 지금 관객들에게는 피상적인 신파로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것은 빡빡한 검열 속에서 태어난 원작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2003년, 할 줄 아는 말이라곤 ‘빠가야로’밖에 없는 일본 순사처럼 역사를 바라보는 다른 시점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채 좁은 시각으로 역사의 단편적인 현상만을 훑는 이 영화가 ‘리메이크’ 이상의 의미를 갖기란 힘들어 보인다.

1 )
ejin4rang
한국정서영화   
2008-10-1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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