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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 강령
상품적 가치가 분명 있는 영화다 | 2004년 4월 20일 화요일 | 꼭도 이메일

일본 영화가 국내 영화시장에서 차지하는 미미한 점유율과는 별개로, 98년 일본대중문화 개방 이후, 국내엔 소수지만 열성적인 일본 영화팬 층이 형성되어 왔습니다. 일본영화는 시네마테크의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되었으며, 각종 영화제마다 로망 포르노부터 고어 영화까지, 각양각색의 일본 영화를 상영하고 있지요.

구로사와 기요시는 그런 다양한 채널을 통해 국내에 가장 활발히 소개된 일본 감독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일반 극장에서 그의 영화는 <도플갱어> 한 편만이 개봉되어, 소수의 관객만이 관람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큐어>나 <회로> 등이 진작 수입되었으나, 몇 년째 개봉시기만 가늠하고 있고요.

기요시의 국제적 명성이나 평단의 열렬한 지지에 비추어 본다면 이건 거의 부당하다 싶은 무관심이었지요. 그렇다고 영화수입사측을 전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었습니다. <큐어>나 <회로>는 분명 비범한 완성도를 보이는 영화지만, 극장 개봉을 하기 위해 ‘수지타산을 초월한 예술적 사명감’을 요구하는, 상업성이 희박한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실존한다.”며 존재론을 설파하는 <회로>의 해괴한 유령은 이채롭기는 할망정 팝콘과 함께 즐기기에 너무 낯설고 진지할 테니까요.

이번에 <강령>과 <밝은 미래>가 동시 개봉된다는 사실은, 이 두 영화가 배급사와 극장주들에게 가혹한 시련을 주지 않을 만큼의 상품가치는 갖고 있음을 방증합니다. 실제로 <강령>은 그의 다른 공포영화에 비해 장르의 컨벤션에 충실한, 그다지 낯설지 않은 공포영화이고, <밝은 미래>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품은 청춘영화입니다. 기요시 영화의 상품성을 점치는데 적당한 영화들인 셈이죠. 그러나 개봉작으로서 <강령>은 납득할만한 선택이지만 그렇다고 최선의 선택은 아닙니다. <강령>은 여타 일본 공포영화처럼 옥죄는 듯한 공포감을 주지 않을뿐더러, 기요시 공포영화의 미덕도 놓친, 어중간한 영화거든요.

기요시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데에는 그의 공포영화 덕이 크지만, 그 명성은 가령 나카다 히데오의 그것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나카다 히데오는 ‘공포가 주는 쾌감’이라는, 공포영화의 ‘효과’에 관심을 두는 반면, 기요시는 ‘적절성’ 때문에 공포영화를 선호합니다. 죽음과 파멸, 현대사회의 폭력성과 고립감 같은 주제의식을 드러내기에 공포영화가 가장 적합한 장르적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옴 진리교의 마인드 컨트롤과 무차별 살인이 일본인들에게 준 충격은 공포영화라는 장르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영상화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고, 실제로 그것은 <큐어>의 일상적인 살인씬과 <카리스마>의 이유 없는 폭력 등으로 재현되었습니다.

실제로 기요시는 관객을 무섭게 하는 데 도통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기요시가 자주 사용하는 의미 없는 소음과 불길하고 음산한 공간은 그에게 공포감를 극대화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곧잘 공포의 타이밍을 놓치거나 공포의 순간에 철학적이고 난해한 대사를 읊조려 잔뜩 긴장하고 있는 관객의 김을 빼놓고 맙니다. 대신 다양한 의미의 층위를 제공하는 영화적 사건들은 관객의 심층의 불안을 자극하지요. 기요시의 영화가 공포감을 준다면 그건 즉물적 차원의 자극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흔드는 파멸의 추락감 때문입니다.

이런 경향과는 달리 <강령>의 초반부는 익숙한 공포영화의 장치들이 적극 사용되어 제법 무섭습니다. 빈 공간을 응시하는 카메라, 명암이 반복되는 조명, 멀리 보이는 흐릿한 실루엣 같은 것들 말이죠.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초반부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맙니다. 등장인물들에게 어떠한 위해도 끼치지 않는 유령들은 전혀 위협적이지가 않거든요. 이렇게 공포의 효과를 잃어버린 영화가 그렇다고 기요시의 다른 공포영화처럼 ‘심층의 불안감’을 자극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령 유령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 공포감은 <회로>처럼 절심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불안에 쉽게 잠식당하는 존재의 불안정한 기반을 드러내기엔 플롯에 우연이 너무 많이 개입해 있고요. 악의에 찬 운명이 주인공들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은, 주인공들이 죽은 자의 영혼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부부이고 보니, 그 보편성에 쉽게 동의하기 힘듭니다. 뜬금없는 결말은 열려있다기보다 무책임하게 팽개쳐진 듯 보입니다. 결국 <강령>은 보통의 공포영화팬이나 기요시 영화팬, 어느 쪽도 만족시키기 힘든 애매한 영화가 되어버렸습니다.

# <강령>에는 공포 영화 사상 가장 유명한(?) 장면과 매우 유사한 장면이 나옵니다. 패러디일까요, 아니면 패스티쉬(따라하기)? 또, 이 영화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점들이 둘 있습니다. 첫째, 그 ‘도플갱어’의 의미는 무엇일까? 둘째, 아무 하는 일도 없는 초난강은 왜 나온 것일까?

그에 비해 <밝은 미래>는 훨씬 호감이 가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기요시는 사람 사이의 소통가능성과 미래에 대해 이례적으로 낙관적입니다. 그의 다른 영화들은 기요시를 염세주의자로 규정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만큼 비관적이었습니다. 타인의 의사에 일방적으로 조정당하거나 타인에게 불가해한 폭력성을 드러내는 그의 이전 영화에서 이해와 공감에 기댄 ‘소통’의 가능성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영화가 <인간합격>처럼 가족드라마의 외형을 띄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족 간의 유대를 회복하려는 요시이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나며 그는 갑작스런 죽음을 맡게 되지요. 그의 비관적 상상력은 <카리스마>나 <회로>에서 보듯이 심지어 ‘멸망으로 치닫는 세계’라는 과격한 방식으로 시각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기요시는 조심스럽게 희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니무라는 마모루의 아버지와 불완전하나마 세대를 극복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고, 마모루의 마지막 유언처럼 앞으로 ‘가기’ 위해 마모루의 아버지로부터 삶의 기술들을 익혀나갑니다. ‘다시 시작하겠다’는 니무라의 희미한 미소는 젊음의 혼란과 방황을 견뎌낸 ‘성장’의 징표일 것입니다. 무책임하고 즉흥적인 행동을 일삼던 고등학생 패거리가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롱 테이크로 잡아낸 마지막 장면에선 어쩐지 안심이 되고 즐거워지고 맙니다. 얼마간의 실패와 방황은 피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세상에 희망은 남아있다는 감독의 믿음 때문이겠지요.

<밝은 미래>의 풍부한 문학적 메타포는 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연약하지만 독을 품어 위험하기도 한 ‘해파리’는 젊은 날의 상처받기 쉬운 불안에 대한 절묘한 상징으로 읽힙니다. 도쿄라는 거대도시의 민물(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체질을 바꾸지만 결국 바다로 돌아가고 마는 해파리의 모습은 묘한 해방감을 느끼게 합니다.

<강령>과 <큐어>는 일종의 시금석 같은 영화들입니다. <강령>에 관객이 들지 않는다면 <큐어>나 <회로>같은 그의 탁월한 공포영화는 개봉하기 더욱 힘들어질 것입니다. <밝은 미래>가 실패한다면 <인간합격>같은 그의 非공포영화들도 극장에서 만날 기회를 잃고 말 것입니다. <강령>과 <밝은 미래>의 실패로 인해, 전혀 새로운 공포의 감각과 냉정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묘한 감동을 맛볼 기회를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비단 수입사나 극장주만의 손해는 아닐 것입니다.

# <밝은 미래>는 느슨한 구조와 밋밋한 전개로 다소 지루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다기리 죠와 아사노 타다노부라는, 매력적인 배우들이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어, 적어도 여성 관객분들은 졸 틈이 없을 거예요. “내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면 기다리고, 너를 가리키면 가는 거야.”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며 스크린 밖 관객에게 “안녕”이라고 말하는 아사노 타다노부의 환상적인 미소는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강렬한 인상을 남길 것입니다.

4 )
ejin4rang
아쉽다   
2008-10-15 16:58
callyoungsin
분명히 뭔가 느껴야 하는걸 준다   
2008-05-16 16:17
qsay11tem
잔인함이 눈에 거슬려요   
2007-11-24 13:19
js7keien
공포영화를 보면서 공포나 잔인함이 아닌 "허탈함"을 느끼길 원한다면   
2006-10-0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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