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검색
검색
소박하고 정겨운 시골 밥상
기쿠지로의 여름 | 2002년 8월 19일 월요일 | 박우진 이메일

사실 이 영화를 작년 이맘때쯤 보았었는데, 그 날은 유난히도 무더웠던 기억이 난다. 발끝으로 빨아올린 아스팔트의 열기가 정수리까지 치밀어 올라 자연발화라도 할 것 같던, 지하철이며 버스에서 부딪혀 오던 끈적끈적한 낯선 살갗에 괜히 심술이 나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싱그러운 웃음 한 번 지어주지 못했던 그런 날이었다.

한 아이와 중년 사내가 길을 떠난다 뭐 그 다음은 좀 뻔한 거 아냐 여정에 도사리고 있는 순간 순간의 위기를 함께 헤쳐나가며 둘은 서로를 의지하게 되고 세상에 찌든 중년 아저씨는 아이의 순수함에 점점 마음을 열 테고 고로 간단치 않았던 여행을 무사히 끝내고 아이는 한 뼘쯤 자라서 돌아오겠지

아이와 어른을 짝 지워서 여행 보내는 낡은 설정에 이 영화 반쯤은 먹고 들어가네 식의 건방진 영화 관람 태도는 그러나,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일본 특유의 황당하고 촌스러운, 그래서 때로는 유치하게까지 느껴지는 코미디에 헤죽헤죽 웃고 있는 내 모습이라니. 여름이라면 질색이던, 천상 '겨울에 태어난~' 얼음 덩어리 우진군이 스크린이 뿜어대는 따뜻한 여름 풍경에 흐물흐물 녹아 내린 기괴한 장면. 아무래도 그 땐 더위를 단단히 먹었었나보다.

[기쿠지로의 여름]은 수더분하고 살갑다. 영화를 이어나가는 에피소드들은 평범하지만 잘 어울려 사람냄새를 폴폴 풍긴다. [배틀 로얄]의 비정함으로 기억되는 기타노 다케시의 무표정마저 무심한 듯 묵묵하게 풍겨나는 인간미로 발현된다. 하지만 마냥 착한 플롯이 이 영화의 미덕은 아니다.

'엄마 찾는' 고달픈 여행 끝에 만난 어머니는 아이가 품었던 숭고한 모성의 환상을 산산이 깨뜨린다. 아이를 덮고 있던 어머니의 그늘, 거짓된 진실을 벗겨내며 [기쿠지로의 여름]은 정통 성장영화의 연장선에 선다.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그렇게, 어린 우리를 감싸고 있던 안락한 거짓을 벗고 알몸으로 세상에 나서는 것, 거친 삶의 공기에 긁히면서.

어머니를 제외한, 더욱이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등장인물은 모두 남자다. 남자들만의 세상을 꾸려 나가는 감독은 마치 새로운 연대를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여성의 연대를 강조하는 여성영화의 거울상같은 이 영화는 사실 '남성영화'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기타노 다케시의 가족관과도 연결된다. '가족이란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라는 질문에 '누가 보지만 않으면 내다버리고 싶다'던, 가족에 대한 회의가 그로 하여금 또 다른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하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성장영화의 형식을 빌려 남녀가 만나 결혼하고 아이 낳고 가족에 속박되어 가는 '정상적' 인간관계에 반기를 들고 싶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기쿠지로의 여름]이 세련된 풍미를 갖춘 영화는 아니지만, 소탈한 심성이 그리운 사람에게 적당한 온기를 전해주는 영화다. 어디 시간의 흐름이 늦춰진 시골 마을로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 사람에게 또한.

2 )
ejin4rang
여름이 왓으면   
2008-10-16 15:51
kangwondo77
리뷰 잘 봤어요..좋은 글 감사해요..   
2007-04-27 16:03
1

 

1

 

1일동안 이 창을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