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검색
검색
슬픔을 담은 우아한 기록
파 프롬 헤븐 | 2003년 5월 23일 금요일 | 임지은 이메일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파 프롬 헤븐>은 본질적으로 슬픔에 관한 영화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 오뉴월의 장의행렬, 철책에 갇힌 동물의 포효, 산길에 흩어진 비둘기 깃, 그리고 휴가 마지막 날― 안톤 슈낙이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서 살면서 마주치게 되는 각종 슬픔들에 대해 열거하고 있듯,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면 세상은 그야말로 슬픔투성이. 깊은 밤 홀로 버스를 타고 가다 문득 병원의 소독약 냄새를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슬픔은 언제고 우리를 기습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무엇이든 하지 않을 수 없다. 석세스 스토리의 주인공처럼 성공하기 위해 미친 듯 내달리든, 꽤나 자주 사랑스럽기보다는 성가셔지는 연인을 만들든, 영화나 음악이나 장난감 속으로 도피하든 간에,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 각자가 생각해낸 가장 좋은 방법으로 최대한 슬픔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기 위해서. <파 프롬 헤븐>의 그 여자가 선택한 방법은 예쁘고 안온한 자신만의 성을 꾸리는 것. 착한 사람들만 모여 허허 웃으면서 살아가는 천국은 어쩌면 조금은 심심한 곳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쨌든 캐시 위태커(줄리안 무어)는 꽃밭 같은 자신의 성안에서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남편이 남자와 키스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면서 애써 감춰두었던 균열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부부는 ‘동성애라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함께 의사를 찾지만, 한 번 생겨버린 구멍은 쉽사리 메꿔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공들여 가꾼 성이 막 무너지려는 그 순간에 캐시에게도 더없이 사랑스런 사람이 생겨버렸다는 것. 흑인 정원사 레이몬드에게 막연한 연민만을 간직하고 있던 그녀는 그의 섬세한 마음을 발견하면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둘의 마음이 서로 이끌리는 그 순간, 애써 찾은 공감대는 험악한 추문으로 둔갑해 그들을 위협한다.

50년대 미국 코네티컷 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파 프롬 헤븐>은 단지 시대적 배경 뿐 아니라 영화의 토대 자체를 50년대에 두고 있는 영화. 크레딧의 글씨체에서 스크린을 닫는 “Fin"자막까지, 혹은 음악에서부터 로맨틱하게 부풀린 머리와 잘록한 허리의 드레스를 걸친 줄리안 무어까지 영화는 50년대의 우아한 자취 속에 푹 젖어들어 있다. 거기 더해,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와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이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이라는 놀랄 만한 사실. 두 영화는 모두 후세에 와서 더 높이 평가되는 50년대의 거장 더글라스 서크의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All That Heaven Allows>을 리메이크한 작품들이다.

서크의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에서 제인 와이먼이 연기한 상류층 미망인과 그녀의 젊은 정원사 록 허드슨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힘든 사랑에 빠진다. 허락 받지 못한 사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파스빈더가 늙은 독일 여성과 젊은 아랍인 노동자의 만남을 통해 메스로 난도질하듯 차갑게 그려낸 이 주제는 <파 프롬 헤븐>에 와서 다시 변주되는 한편 원작과 좀더 가깝게 다가선다. 한편 <하늘.....>과 <불안...>이 신분이 낮은 남자의 매력적인 육체에 매혹되는 여성의 감정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면, <파 프롬 헤븐>의 사랑은 철저히 정신적인 느낌을 준다. 기실 흑인인데다 홀아비이며, 자신의 고용인인이기도 한 레이몬드에게 캐시가 빠져들게 되는 순간은 그의 외피가 아닌 보석 같은 마음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동성애란 단어조차 입에 담지 못하며 “그 치욕적인 것”으로 돌려 말하는 시대, 흑인이라는 이유로 돌을 던지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시대,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이 함께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험악한 스캔들이 되는 시대는 사실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충분히 우스운 것으로 비쳐질 만 하다. 일례로 동성애라는 ‘치욕스런 병’을 고치기 위해 프랭크가 정신과를 찾았을 때 의사는 엄숙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완치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전기치료를 시도해 보자”는 처방을 내린다. 순간 객석에는 웃음이 감돌지만, 어쨌든 그 ‘유머’는 적어도 <파 프롬 헤븐>이 의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마치 수십 년의 간극을 모른 체 하듯 진지하게 우아하고도 야만적인 50년대로 걸어 들어가며, 결과적으로 충분한 현재성을 지닌다.

<파 프롬 헤븐>안에는 처연하되 질척하지 않으며, 비참함과는 다른 진짜 슬픔이 살아 숨쉰다. 정말이지 영화가 살려낸 감정의 결과 매혹적인 스타일이 거둔 미학적 성취 중 어느 쪽에 더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할 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 심지어 흑인 남자와 ‘추문’을 뿌린 캐시를 이웃들이 적대감 가득한 얼굴로 노려보는 순간에도 관객들은 지난 시대의 우스꽝스러운 자취보다는 이 세계 안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는 슬픔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Fin, 고풍스런 크레딧이 화면을 장식한 후 영화관을 나서며, 그 여자의 아름답고 슬픈 눈동자를 아주 오래도록 뇌리에서 지워버릴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1 )
ejin4rang
슬프지만 아름답다   
2008-10-16 10:02
1

 

1

 

1일동안 이 창을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