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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쾌락의 단맛같은 짧은 여운, 그리고 긴 아쉬움! | 2004년 10월 28일 목요일 | 심수진 기자 이메일

나이가 들수록, 책장을 들추거나 혹은 불편한 의자에 등짝을 붙이고 멍하니 스크린을 응시하다 보면, 누군가의 표현처럼 삶의 표면 위를 스치는 타자들이 결국엔 자기 존재의 분신들에 다름 아니라는 인식에 씁쓸한 조소를 머금게 된다.

‘애인 하나쯤은 훈장으로 달고 있어야 하고, 불륜을 만드는 건 보험드는 거랑 비슷한 것’이 지금 우리들 삶의 일상다반사인지 아닌지 확언할 길은 없어도, 적잖은 소설과 영화에 나오는 그 흔들리는 욕망의 주체들이 다만 소수의 얘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 말이다. 끈적거리게 혼탁하고, 건조하고, 우울한 현실의 단편들, 또 자아의 부스러기들. 이것들이 섞이면서 꾸며지는 픽션, 영화.

영화 <주홍글씨>를 보며, 새삼 이런 새로울 것 없는 생각에 잠시 사로잡히게 된 건 그 등장 인물들 때문이다. 강력계 형사인 ‘기훈(한석규)’에겐 안개꽃같은 느낌의 청초한 아내 ‘수현(엄지원)’이 있다. 그런데 그에겐 수현과는 상반된 느낌의 매혹적인 정부 ‘가희(이은주)’도 있다.

각기 다른 미(美)를 지닌, 두 여자를 욕심스럽게 끌어안고 있는 기훈. 아마도 첼리스트인 아내와는 클래식 선율에 몸을 맡기듯, 기품있으면서 사려깊은 정사를 나눌 그는 재즈 싱어인 정부, 가희와는 재즈 멜로디를 닮은 농밀하면서도 즉흥적인 템포의 체액을 공유한다. 기훈과 가희의 격정적이지만, 불안함이 꿈틀거리는 합체를 표현하기 위해, 카메라 역시 어딘가 썩 유쾌하지 않은 리듬감으로 화면을 주조한다.

이 세 사람의 관계망 한 켠에, 또 다른 여자 ‘경희(성현아)’가 포개진다. 기훈이 수사하게 된 살인 사건에 관계된 인물로, 머리통이 부서진채 숨진 한 남자의 미망인이었던 것. 고양이 눈빛을 한, 묘하게 색정적이고 어두운 그녀를 기훈은 용의자로 여기고, 강도를 높여가며 추궁해가지만 뚜렷하게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 갑갑한 상황과 함께, 표면적으로 쿨함을 가장한 기훈과 가희의 사랑에도 균열이 스며든다. ‘수현을 사랑하냐’는 가희의 말에 기훈은 ‘나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널 사랑하는 건 아냐’라는 이기적인 대답을 내뱉는다. ‘한 남자에게 구속받는 삶따윈 선택하지 않을 듯’ 자유로운 영혼을 나풀거렸던 가희 역시, 비가 질척거리는 어느날 참을 수 없는 ‘절제’를 깨고, 수현과 기훈의 삶을 침범하듯 ‘무서운’ 기운을 흩뿌리고 사라지기도.

이러한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주홍글씨>는 한 발짝 비켜서면, 뻔한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는 영화가 되지 않기 위해 이런 저런 고급스런 포장지를 덧씌웠다. 『이방인』의 뫼르소를 연상시키는 냉소적인 캐릭터의 기훈이나 느끼하지 않은 음악, 흑백과 블루톤의 느낌이 혼융된 섹슈얼한 장면 등 주로 화면의 세련된 기교에 기댄 장치들로 진부함을 탈피하려는 몸짓을 보이는 것.

하지만 전후 상황과 긴밀하게 연결되기 보다 점프 컷처럼 툭툭 튀는 <주홍글씨>의 개운하지 않은 이음새는 이 영화가 몰아가는 ‘스릴러’로서의 힘에 제대로 탄력을 주지 못한 채 적잖은 물음표들을 남겨놓는다. 처음 남녀의 어긋난 욕망이 빚어놓은 치정 사건인 듯 비춰지는 살인사건은 기훈-수현-가희의 삼각 관계와 분명 다르지만 엇비슷한 분위기를 공유하며 <주홍글씨>의 한 축을 형성한다.

그런 가운데 이 영화는 살인사건의 전모가 경희의 거짓말 게임인지, 아닌지 관객들을 살짝 궁금하게 만드는 가운데, 가희에게 뻗어오는 뭔가 불길한 기운을 또 하나의 궁금증으로 유발시킨다. 스릴러의 재미는 이러한 궁금증을 절묘하게 해소시키는 연출의 수완. 그러나 이를 밝혀내는 방식에 있어 <주홍글씨>는 뜻밖의 반전이면서도, 어이없게 납득해야 하는 불만족을 남겨놓는다.

오히려 인상깊게 새겨지는 건 자동차 트렁크 안에서 벌어지는 기훈과 가희의 파국이다. 마치 웃기는 코미디같은 상황으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좁은 공간에 갇히게 된 두 사람을 비추는 장면들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부분.

일초라도 빨리 조준해 범인을 쏘려던 기훈의 ‘권총’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하는 가희를 ‘안락사’시키는 도구로 변용된다. 에로틱한 욕망을 실현하는 근사한 단초이기도 한, 남녀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육체는 그 어둠컴컴한 트렁크 안에서 물리적인 더위를 이기지 못한 무능력한 육체의 황량한 결과물로 전락한다.

‘불륜’이 처단되는 방식에 있어 기훈과 가희의 이 처량한(?) 파국은 웃음에서 울음으로 전환되는 감정의 추이를 통해 욕망의 겉잡을 수 없는 어둠을 들춰낸다. 온 에너지를 이 부분에만 쏟아부은 듯, 오랜 시간 멈춰진 <주홍글씨>의 카메라는 트렁크 안에서 꺼내진 기훈이 미칠 듯이 절규하는 장면에서 자신의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파국의 강도 높은 마침표를 찍는다.

<이중간첩>의 실망스런 컴백 이후, 한석규가 선택한 신작으로 일찌감치 주목을 끌었던 <주홍글씨>. 하지만 그 치열함 한 켠으로, 캐릭터의 인위성을 느끼게 하는 왠지 모를 불편함으로 파고드는 한석규의 연기, 이은주를 포커스하는 동안 성현아, 엄지원이 맡은 캐릭터의 그 작지 않은 강렬함이 맛깔나게 구현되지 못한 성근 구성은 높은 기대만큼 배가된 아쉬움을 형성한다.

김영하의 소설을 모티브로 한 <주홍글씨>는 일견 평온하게 흘러가는 우리들 일상의 짖궂은 파멸, 욕망의 악마성을 건드렸지만, 섬뜩해지는 여운의 파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쾌락의 그 짧은 단맛처럼 말이다.

9 )
sedi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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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09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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