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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우그러진 콜라컵이 되기까지
일렉션 | 2003년 12월 20일 토요일 | 임지은 이메일

재색을 겸비한 금발의 새침떼기, 인기 있는 스포츠맨, 학생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는 교사, 그리고 물과 기름처럼 집단에 섞이지 못하는 교정기 낀 여학생... 이쯤 해서 태클 한 번쯤은 익히 들어올 만 하다. 그래 그래. 문제의 교정기 여학생이 신데렐라로 거듭나 인기남과 달콤한 사랑 어쩌구 저쩌구. 그러다 교내 미인 선발대회에서 못된 학우들의 흉계로 돼지피를 뒤집어쓰고... 아, 이건 호러물 <캐리>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상기한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지만 그저 그런 틴에이저용 로맨스영화와는 절대로 같은 카테고리 안에 묶을 수 없는 영화도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이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일렉션>이라는 반증을 위한 완벽한 범례가 존재하기 때문. 발랄한 리즈 위더스푼이 유명한 금발을 빛내며 교복차림 여고생으로 등장하지만 의외롭게도 <일렉션>은 퍽 영리한 정치풍자영화다. 비록 영화 속 중심 사건은 평범한 고등학교의 학생회장 선거에 불과하지만, 학교는 정치판에 대한 탁월한 요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캐릭터들의 천태만상에 힘입어 총알이 날아다니고 유혈이 낭자한-물론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의미지만-전장의 옷을 입는다. <일렉션>, <어바웃 슈미트>로 평단의 찬사를 받은 알렉산더 페인은 소박한 재료로 진짜 재미있는, 뿐만 아니라 생각할 거리가 가득 포진해 있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재간을 당당히 입증한 감독.

재색을 겸비한 여학생 트레이시 플릭(리즈 위더스푼)은 학교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 스스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인지하고 있다는 것. 자신의 잘남을 너무 잘 아는 나머지 단 한 순간도 드러내지 않고는 못배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가장 적확한 우리말 단어는 “재수없다”일 텐데, 트레이시가 바로 그 짝인 거다. 그래서 귀염성 있는 미모에도 불구 왕따의 삶을 사는 아가씨다. 여기 또 한 명의 인물. 윤리 교사 짐 맥칼리스터(매튜 브로데릭)은 학교측과 아이들에게 두루 신망이 높은 모범교사다. 허나 사랑스런 양떼들 중에도 오직 하나 눈엣가시가 있으니 그게 바로 트레이시.

야심가인 트레이시는 미래를 위해 거쳐야 할 관문으로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다. 한편 그녀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짐은 트레이시의 독주를 저지하기 위해 교내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맨 폴 메츨러를 후보로 긴급 수혈한다. 거기다 레즈비언인 폴의 동생 태미(제시카 캠벨)까지 자신을 버리고 오빠에게 간 여자친구에게 복수하기 위해 선거에 한 몫 끼어들면서 선거는 혼전양상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초조해진 트레이시는 어느 날 몰래 다른 후보들의 포스터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태미는 이 사건을 뒤집어쓰고 후보에서 탈락한다. 선거는 다시 양자대결로 굳어지고, 이제 초조해지는 건 짐 쪽. 그리하여 짐 맥칼리스터는 트레이시를 누르고 폴을 학생회장으로 앉히기 위해 급기야 선거결과를 조작하기에 이른다.


이쯤해서 한번쯤 짚고 넘어가 보기로 하자. 막말로 나잇살이나 먹은 어른인 짐은, 그것도 도덕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왜 어린 여고생을 그토록 핍박하지 못해 안달인 것일까. 이유는 명쾌하다. 트레이시가 자신보다 강자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레이시는 절친한 동료교사와 염문을 뿌려 교직에서 내쫓기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내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어쩌지 못하는 매혹이 뒤섞여 짐은 바야흐로 무시무시한 위기감에 휩싸인다. 물론 빼놓아서는 안될 요인 한 가지는 얄미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늘 아주 하찮고 사소한 이유들이 되기 쉽듯, “그저 얄미워서”라는 감정 역시 <일렉션>에 있어 아주 중대한 동인으로 작용한다.

아닌게 아니라 리즈 위더스푼이 탁월하게 연기해낸(<금발이 너무해>의 엘 우즈 보다 더 적역이다!) 트레이시란 캐릭터의 가공할 위력은 짐의 치졸함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관객들마저도 그 증오를 납득하지 않을 수 없게 할 지경. 영화는 전체적으로 심술궂게 과장되고 희화화되어 있지만, 특히 평소 이성적인 표정으로 무장한 리즈 위더스푼의 망가진 얼굴을 난데없이 포착하는 스톱모션들은 가히 압권이라 할 만 하다. 시사만평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정치인의 탐욕스런 캐리커쳐를 방불케 하는 명장면들.

그렇게 생각할 만한 또 한 가지 힌트는 트레이시가 바로 전형적인 정치인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근본은 유순하지만 사람들의 말에 쉽게 휩쓸리는 폴 메츨러는 인기에 영합하는 소위 포퓰리스트로 해석 가능하다. “한심한 행사. 바보 같은 공약들. 선거에 관심 있는 건 사실 후보들 뿐 아닌가?”라는 일갈로 선거 연설을 대신하는 태미는 물론 냉소적인 아나키스트. 아니, 아나키스트라고만 정의 내리기엔 대다수 보통사람의 심경을 너무나 적절히 대변하는 태미는 실은 영화 속에서 가장 진심이 느껴지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일렉션>은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트레이시도 비웃지만, 사실 가장 가혹하게 다루고 있는 대상은 짐 맥칼리스터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특정 후보를 배제하기 위해 투표조작마저 불사하는 ‘도덕주의자’ 짐은 변질된 이상주의(아닌 게 아니라 영화 속 짐은 트레이시를 향해 몇 번이나 “저 아이가 크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짓밟을까”라고 개탄하듯 중얼거린다)가 그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날카롭게, 그리고 동시에 포복절도할 만큼 우스꽝스럽게 입증하는 인물. 심지어 아내와의 잠자리에서 트레이시를 상상하기까지 하는 짐은 겉잡을 수 없이 타락해 가는 와중에도 그럴싸한 자기변명을 주워섬기기 바쁘다. 사실 영화를 흥미롭게 하는 진짜 핵심은 짐 맥칼리스터의 처절한 타락의 역사와 조우하는 것.

후일담처럼 등장하는 영화의 라스트씬도 징글징글하게 심술궂기는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쫓겨나고 아내로부터도 외면당한 짐은 새로운 도시에서 나름의 삶을 다시 꾸려나간다. 어느 날 그가 보게 된 광경은 성공가도를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음에 분명한, 한층 더 자신만만해진 모습의 트레이시. “이제 난 평온하다. 저 아이는 앞으로만 내달리느라 영원히 개인적인 행복이란 건 영원히 모르고 살겠지. 불쌍한 아이 같으니.” 그러나 도닦은 신선 같은 나레이션과는 반대로, 짐은 들고 있던 콜라컵을 트레이시가 타고 있는 차를 향해 힘껏 내던지고는 쏜살같이 내뺀다. 요컨대 아무리 해탈한 척 해도 그의 존재란 어차피 우그러진 콜라컵일 따름이라는 것. 뭐 그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의 일생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진짜 행복’을 영원히 모르거나, 혹은 찌그러진 콜라컵이 되거나 둘 중 하나라 이 말씀이다.

2 )
ejin4rang
한번쯤봐도 괜찮을 듯   
2008-10-16 09:26
callyoungsin
못봤지만 한번쯤 봐도 괜찮을것 같은영화   
2008-05-1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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