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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수의 카리스마 -'청풍명월'을 보고
이해경의 무비레터 | 2003년 8월 23일 토요일 | 이해경 이메일

최민수가 나온다기에, 영화 <청풍명월>을 봤습니다. 저는 최민수의 열혈 팬은 아니지만, 그가 매우 중요한 배우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나 '참새'와 '덩달이'의 반열에 오를 수는 없는 일이지요. 자신의 이름으로 시리즈를 히트 시킨 배우는 최불암과 최민수 둘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최불암 시리즈'가 가공의 유머인 데 비해, '최민수 시리즈'는 믿거나 말거나 육성의 어록이라는 점. 적어도 목격자의 생생한 증언이라는 점. 그는 이 시대에 살아있는 문화적 아이콘입니다.

저에게 '최민수 시리즈'의 사회문화적 코드를 짚어낼 능력은 없습니다. 저는 다만 그토록 중요한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외면할 수 없었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영화를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지요. 영화관에 입장했을 때, 저는 순간적으로 최민수가 예술영화를 찍었나 싶었다니까요. 저까지 관객은 세 사람뿐이었고, 제 뒤에 들어온 관객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영화의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하나 둘 밝혀지더니, 영화가 끝났을 때 확연해지더군요. 관객이 많이 든다고 다 훌륭한 영화는 아니겠지만, 관객은 대체로 어리석지 않습니다. 가끔 실수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저 그런 영화를 안 보고도 알아보는 신통력이 상당한 수준에들 올라 있습니다. <청풍명월>은, 많은 공을 들여 만들었다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에서 미흡한 영화였습니다. 그 여러 가지 미흡함을 하나하나 밝혀낼 생각은 없습니다. 이 글의 초점은 '배우' 최민수에게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청풍명월>에서 최민수는 여전한 가운데 달라진 모습입니다. 여전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천 근의 무게지요. 말을 안 합니다. 아니, 여전히 눈빛으로 말합니다. 그런 배역을 맡기도 했거니와, 저는 그 점에 대해서는 워낙 불만이 없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다들 아시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최민수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많지 않나요? 저는 그 점이 배우 최민수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그의 '오버'는 눈에 거슬린다기보다는 귀에 거슬리는 거였다고 할까요. 그런데 바로 그 문제에 관해서, 최민수는 달라질 조짐을 보입니다. 몇 마디 안 되는 대사지만, 목소리에만 잔뜩 힘을 주고 혀의 운동은 최소화하는 국적 불명의 발음이 많이 줄었습니다. 웅얼거림이 덜하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인물의 성격이 요구하는 알맞은 무게에 근접한 느낌입니다. 반가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변화는 회복에 가깝습니다. 최민수를 확실히 뜨게 만든 드라마 <모래시계> 이전에, 그는 지금처럼 스테레오 타입으로 굳어진 연기자가 아니었습니다. <모래시계>에서도 그의 연기가 딱딱했다고 할 수는 없구요. 딱딱하게 변해가는 인물의 연기를 나름대로 탄력 있게 해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모래시계>의 막바지에서 "나 떨고 있니?" 하고 난 이후에, 저는 최민수의 연기를 보며 감동이나 충격에 떨어본 적이 없습니다. 누구나 가장 좋을 때 가장 나빠지기 쉽지요. <모래시계>는 확실히 최민수를 절정으로 밀어올렸고, 최민수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그런데 저는 최민수 최고의 연기가 <모래시계>에서 나왔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가 출연한 수많은 영화 중 어떤 것에서 나왔다고 보지도 않구요. 10여 년 전 장안의 화제였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역. 완고하면서도 붙임성 있는 남자의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뒤에는, 연기자의 발음이 부정확한 꼴을 못 보기로 소문난 작가 김수현이 버티고 있었겠지만, 아무튼 그 연기로 최민수는 연기파 배우가 될 가능성을 선보였지요.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로맨틱 코미디의 붐을 일으킨 영화 <결혼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민수 자신은 알고 있을까요? 그는 코믹한 연기의 재능이 대단히 뛰어난 배우입니다.

그러니 최민수는 이제 눈에 힘 그만 주고 웃기는 연기만 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은 남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저는 그저 그의 더 나은 연기를 보기 원하고, 그것은 최민수 자신도 바라는 바일 겁니다. 그러려면 흔히 '카리스마'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연기 스타일이 그 안에서 깊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이 방해하나요? 그의 카리스마는 잘못 구사되고 있습니다. 대중에 어필하는 이미지로는 성공을 거둔 그의 카리스마가, 연기의 내실을 기하는 쪽으로는 실패의 원인이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최민수 시리즈'로 희화화된 그의 카리스마는 대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서로 고마워할 일이지요. 카리스마의 본뜻은 '은혜'이므로, 최민수는 의도하든 아니든 제대로 된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대중이 간파한 그의 매력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최민수 시리즈'는 최민수가 퍼뜨린 게 아니라는 점. 카리스마는 절대로 강요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연기로 접어들면 그의 카리스마가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영화에서 무게 잡는 최민수를 보며 '시리즈'의 한 토막을 떠올리고 웃는 관객이 있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얘깁니다. 최민수가 목소리를 깔면 깔수록 그런 관객은 늘어나게 되고… 그러므로 자신의 연기가 관객을 압도하기 원한다면, 최민수는 관객을 압도할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최민수는 자신의 배역에 몰입하려 애써왔다고 말할지 몰라도, 저는 그가 자신의 배역을 지배하려 든다는 느낌을 받아왔습니다. 그것은 연기의 한 방법으로 성립할지는 몰라도, 최민수에게 어울리는 방법은 아닌 듯합니다. 관객과 온전히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아니지 않나… 어느덧 불혹의 나이를 넘어선 그가 멋진 중년의 배우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흔히 하는 말로 자신을 내려놓고, 주어진 배역에 진짜로 빠져들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역이 웃기는 역이든 입에 자물통을 채운 역이든, '대발이'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촬영장에서 그가 쏟아내는 열정을 독선과 오만이라고 비난하는 오해도 사라지고, 어리석지 않은 관객은 적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만큼은 최민수를 '시리즈'로부터 떼어놓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그럴 때 최민수는 아이콘의 딱딱한 껍질을 깨고, 대중이 입혀준 아바타의 옷을 벗기도 하며, 명실공히 '카리스마의 배우'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청풍명월>을 보고 쓴다면서 정말로 이 글을 줄창 최민수에 대한 얘기로 때우고 말 셈인가 싶으시죠? 10억원을 넘게 들여 조선시대의 배다리를 재현한 영화보다, 그 영화에 출연한 일개 배우가 더 중요하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최민수만한 배우가 나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사람들은 부모의 후광을 운운하지만, 그 빛은 남들에게 눈부셔 보일 뿐, 당사자에게는 짐스러운 복일 겁니다. 저는 최민수에게 홀딱 반한 적이 딱 한 번 있는데요, 오래 전에 그가 어느 TV 쇼에 나와서 이글즈의 'Hotel California'를 불렀을 때였습니다. 배우가 꼭 노래를 잘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민수는 영화에서 가수 역을 맡아도 정말 폼나게 해낼 배우입니다. 그런 재능 있는 배우가 제 몫을 충분히 해내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한국 영화의 불행입니다.

4 )
apfl529
좋은 글 감사~   
2009-09-21 18:34
kpop20
잘 읽었습니다   
2007-05-18 23:43
imgold
청풍명월의 배다리가 10억??-_-ㅋ 이해안감.   
2005-02-02 00:27
imgold
최민수는 대사가 없는 편이 낫다는 말씀에 백번 동감.눈빛으로 만 말해도 충분해요~ 아니 그것도 부담스러워요.ㅋ   
2005-02-02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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