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엔 서울이 있다. <서울>의 남녀는 북촌 가회동 한옥 마을, 헌법재판소의 흰 소나무, 덕수궁과 낙산, 잠수교와 이어지는 한강 고수부지, 성수동과 한남동을 잇는 두무개길, 동호대교 북단의 옥수역, 인사동과 쌈짓길, 창덕궁, 삼청동, 깔끔하게 새 단장한 광화문 광장, 한강 유람선과 반포대교의 분수, 남산타워의 유명한 자물쇠들과 남산 계단을 가로 지르며 하루 사랑을 나눈다. 그래서 <서울>에 담긴 서울은 청춘 남녀거나 한 때나마 청춘 남녀였던 자들한텐 더 친숙하다. 남녀가 누군가와 지키지 못할 사랑을 속삭였고 잊혀질 추억을 만들었던 곳들이다. 어쩌면 남자는 전날 밤 인터넷을 뒤져 데이트 코스로 삼았을 테고 어쩌면 여자는 그런 남자한테 첫 키스쯤 허락했을 곳들이다. 남녀는 그곳들을 자신들의 똑딱이 디지털 카메라에 담았을 테고 블로그에 자랑스레 올려놓았을 거다. 남들이 보기엔 뻔한 풍경 사진이건만 남녀의 추억이 깃들어서 자랑스런 그런 사진들이었을 거다. 그러다 사랑이 바래고 추억이 흩어지면 잊혀졌을 그런 사진들이다. <서울>은 누군가의 블로그에 올려진 디지털 사진 같다.

살다가 문득 그런 사진들을 마주하면 난감해진다. 겉잡을 수 없이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 거라고 추측한다면 착각이다. 그 사진들은 과거다. 남녀는 현재를 산다.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한 남녀라면 과거는 현재의 오류다. 돌아갈 수도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면 묻어둘 일이다. 데이트는 같은 공간을 맴돌기 십상이다. 1년 전 그녀와 갔던 인사동을 1년 뒤 다른 그녀와 가게 될 수밖에 없다. 잘 가던 카페와 좋아하던 식당은 아무래도 바꾸기 힘든 개인의 취향이다. 그럴 때면 남녀는 눈에 밟히는 과거를 지우며 현재의 행복에 의무로 복무한다. 어쩌면 그래서 나이가 든 남녀는 서울이 아니라 분당이나 일산에 신혼 집을 차리는 건지도 모른다. 더 나이가 들어버린 남녀는 아이만 따라 다니는지도 모른다. 서울엔 누구나의 과거가 잠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서울의 본질은 항상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600년 동안 숱한 남녀가 서울에서 살며 사랑하다 헤어졌다. 고도 서울의 창연함은 기껏 김영상 정권 시절에 다시 지은 경복궁 근정전에 있는 게 아니다. 공간을 내리훑고 지나간 시간에 있다.

하지만 <서울>엔 시간이 희미하다. 공간만 선명하다. 공간으론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 시간은 공간에 머물다간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서울>은 영화 속 영화 구조에서 출발해서 두 남녀의 <비포 선 라이즈>식 사랑 나누기로 끝난다. 추억하고자 하는 건 분명하다. 서울에서 우린 <서울>을 찍고 있다. 서울에서 우린 사랑을 나누고 있다. 우린 당신이다. 한때 서울을 겪은 당신도 우리와 같지 않았던가. 그러나 <서울> 남녀에 공감하기엔 <서울>엔 추억할 이야기가 없다. 보통 남녀가 필부필녀의 이야기에 공명하는 건 필부필녀가 특별한 이야기를 나눌 때다. 보통 남녀는 필부필녀의 보통 이야기엔 공명하지 않는다. 달리 공감할 게 없어서다. 그저 생활이라서다.

영화는 일상성을 상상성으로 만드는 매체다. 샌프란시스코의 알카트라즈에선 어젠 <더록>이 탈옥했고 오늘은 <엑스맨3>가 전쟁을 벌였다. 런던의 포토벨로 시장에선 오늘도 꽃 대신 <노팅힐>의 신데렐라맨 이야기를 판다. 파리의 별 볼일 없는 퐁네프 다리는 아직도 <퐁네프의 연인>들로 넘쳐난다. 일상성이 가득한 도시를 재해석해서 재구성해야만 영화가 된다. 재해석이 없는 영화 속 공간은 블로그에 올려진 필부필녀의 똑딱이 사진과 다를 게 없다. <서울>은 재해석과 재구성에 실패한다.

그런데도 <서울>의 공간들을 보다 보면 기억의 편린들이 밀려오는 걸 피할 수가 없다. 그 편린들은 <서울>에서 온 게 아니다. 서울에서 나온다. 누군가의 지키지 못할 사랑을 속삭였고 잊혀질 추억을 만들었던 그곳 저곳의 서울 말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천만 명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서울이란 공간을 영화로 담는 건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 서울은 공간을 포갠다고 담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서울>엔 서울이 없다.

2010년 4월 30일 금요일 | 글_신기주(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