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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그것은 하나의 언어다 <치코와 리타>
2012년 3월 2일 금요일 | 최승우 이메일


케이블 TV의 애니메이션 채널을 자주 본다. 주로 접하는 건 일본 애니메이션인데, 보다 보니 그놈의 ‘서비스 컷’이라는 것에 질려버렸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좀 보는 사람이라면 ‘서비스 컷’이라는 걸 알 것이다. 그것은 대중성과 아예 장벽을 쌓은 무겁고 진지한 작품이 아닌 이상, 상업 애니메이션에서는 거의 어김없이 등장한다. 오랜 시간 동안 그 분야에서 탁월한 노하우를 쌓은 유수의 제작사도 존재하는 마당이다. 보통 등급이 15세 이상이면 보너스처럼 등장하고, 케이블 TV 새벽시간대에 방영할 등급이라면 대놓고 노골적이다. 물론 말 그대로 ‘서비스’인 셈이니, 이런 장면의 유무는 스토리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오는 건 좋다 치자. 생물학적으로 이상이 없는 한에야 그런 걸 마다하겠는가. 다만 문제는 이런 ‘서비스 컷’이 과연 제 기능(?)을 하고 있느냐다. G컵은 족히 초월할 듯한 무등산 수박만한 가슴과 교복소녀의 스커트 아래로 역동적으로 침투하는 앵글만 나오면 전부인가. 슬래셔도 피와 살점이 과하면 지겨워진다. 이건 뭐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니 도무지 현실성이라는 게 없다. 심지어 ‘야동’이라 해도 맥락과 완급이 있는 웰 메이드가 있는 법이다. 그러다보니 종종 역효과도 생긴다. 전체적으로 꽤 괜찮은 작품인데 ‘서비스 컷’이 흐름을 끊어먹고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물론 수요가 있으니 그런 애니메이션이 줄곧 만들어지는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겠지만, 그 주체가 결국 ‘수컷들’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참에 <치코와 리타>를 봤다. 저패니메이션의 정교한 작화에만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적응이 힘겨울 법한, 타블렛으로 10초 만에 그린 듯한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숨이 넘어갈 뻔했다. 고작 단 하나의 장면 때문에. 치코와 리타가 처음 만나 밤을 보내고, 아침에 쿠바의 강렬한 햇빛을 창문으로 받으며 벗은 몸을 맞댄 채 피아노를 치던 바로 그 장면! 그 순간 극장 안의 공기가 긴장되는 게 고스란히 피부로 느껴졌다. 그것은 저절로 침이 삼켜질 만큼 야릇했다. 그들은 피아노를 연주할 뿐이었지만, 그 모습은 마치 황홀한 섹스 뒤의 나른한 여운을 즐기며 나누는 후희(後戱)와도 같았다. 적나라한 헤어누드인데도 조금도 외설스럽지 않다는 게 신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퍽하고 야하다는 게 또 신기했다. 전신이 오싹해질 정도로. 비록 어처구니없는 찌질한 사건이 이어지는 바람에 산통을 깨긴 했지만.

사실 이 영화에 대해 다른 건 기억도 안 나고 더 기억할 필요도 없었다. 쿠바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베보 발데스가 연주한 음악은 훌륭했다. 허세나 과시적인 뉘앙스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반면 이야기 자체는 통속적이고 진부하기 그지없는 멜로였다. 단지 예의 그 장면 하나 때문에 <치코와 리타>는 무엇보다 섹시하고 강렬하고 리얼한 성인 애니메이션으로 기억될 듯하다. 영화에서 야한 것이란 결국 관객들에게 읍소하기 위한 이미지 혹은 언어다. 그것은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 방바닥에 휴지꽃을 피우는 자들이 좋아할 ‘서비스’와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야한 것이다. 주위를 둘러싼 공기가 마치 실을 잡아당기듯 팽팽해지는 것,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벽이 사라져버린 순간의 은밀하고 안락한 희열. 헤어져있던 47년 동안 그들의 손끝과 코끝에 머물러있던 것은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P.S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나도 이런 것을 하고 싶어요’라고 스틸 컷을 올렸다, 그러자 유독 여성들이 많은 공감을 표시했다. 그 이유가 결국 이 글의 요지와 일치하는 게 아닐까.

2012년 3월 2일 금요일 | 글_최승우 월간 PAPER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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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 펼쳐지는 쿠바의 항구 전경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모습에 감동받고, 항구 전경에서 점차 줌인되어 드러난 항구 곳곳의 건물과 장소들의 사소한 문양들까지 디테일하게 표현해낸 섬세한 디자인에 놀라고, 단순한 그림체지만 재즈에 맞추어 춤을 추는 인물들의 움직임들이 리얼하게 표현되는 모습에 빠져들고 말았다. 내용 자체는 좀 통속적일 수도 있지만, 화면을 보는 즐거움과 음악을 듣는 즐거움이 모두 만족스럽다.
자본을 앞세워 극장가에 깔리는 하지만 비슷비슷한 영화들에 길들여져 가는 요즘,
우연히 접하게 되는 이런 영화들에서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발견한다.
고런게 또 영화 보는 재미가 되어간다.   
2012-04-27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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