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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과 <노스탤지어>를 봐야 하는 두 세 가지 이유
2005년 3월 21일 월요일 | 박소진 영화평론가 이메일


일찍이 한국영화에 예술영화 논쟁이 있었더랬다.
강한섭 평론가가 당시만 해도 독보적인 존재였던 영화잡지에, 그것도 릴레이로 화두를 주르륵 풀어놨었는데 그 중 하나가 ‘예술영화는 없다’라는 것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이것이 무슨 소린가 했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은 이해 가는 부분이 생겼다. 영화를 개인의 예술적 창작물로만 보던 영화 비평의 작가주의적 관습에서 벗어나 문화적 산물로서 영화를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었던 듯하다. 소위 현재 유행하고 있는 ‘문화연구’적 접근 방식 말이다. 그런데 아마 한국에서 그 이론은 백두대간이 묵묵히 버텨낸 지난 10년 동안의 미스터리를 풀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작가주의에의 외로운 동참’이 한 때, 예술영화의 카피였지만 이것은 단순히 ‘작가주의’ 대 ‘문화연구’라는 고루한 이론적 대립을 통해 바라볼 게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쓸모없는 공허한 영화적 이론의 대립 말고도, 스스로 대견해진 ‘백두대간’의 역사는 분명 지난 날 작가주의의 휘황찬란했던 역사를 넘어, ‘작가주의’가 하나의 장르로 축소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믿음직스럽다. 스스로 ‘역사’가 되고 있는 백두대간과 첫 개봉작 <희생>과 <노스탤지어>의 재개봉에 즈음하여 나름대로의 소회에 대해 간략하게 써보고자 한다.

10년 전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은 전대미문의 엄청난 흥행기록을 세웠다.

세간에 알려지기로는 10만 명은 봤을 거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유행하는 지적담론에 취한 먹물들은 ‘<희생>제의’를 거쳐야만 했다. 이것은 거의 메가히트에 가까운 기록으로 예술영화 전용관에 대한 장밋빛 미래를 점칠 수 있게 한 의미있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삶의 질도 같이 윤택해지고 덩달아 예술영화관도 미어터질 듯 보였으나 곧 그 기대는 서운케 사라지고 말았으며 1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예술은 배고프고 고단한 행군처럼 보인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희생>을 본다는 것은 분명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은 경험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내 방 벽에는 <희생>의 포스터가 걸려있지만 나는 <희생>의 줄거리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좋은 영화가 으레 그렇듯이 내러티브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희박해지고 이미지들만이 뚜렷이 각인되는 것처럼 <희생>은 ‘불타는 집’과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아이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영화이다. 특별히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집이 불타기 전 집안 구석구석 마호가니 광택이 흐르는 매끈한 목조가구들과 손 때 묻은 집기들에 대한 세심한 묘사와 불타는 집을 지나 죽은 나무로 향하는 작은 숲의 드문드문 나 있는 나무 사이로 한 마리의 하얀 말이 가로지르는 풍경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이런 이미지들의 연속이 점점 희박해져가는 스토리 라인 대신에 신화와 종교적 구원 그리고 인간에 대한 천작이 그림처럼 두드러지는 영화들이다. 구원을 위해 불을 지르는 일과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제의적 행위들 사이로 보이는 하얀 말은 단번에 그 일상적 행위의 비범함을 신화적 차원으로 고양시켜낸다. 지독한 롱테이크의 향연은 이 모든 것을 트래킹 쇼트로 연결시켜내며 영화는 바닷가 작은 나무 아래 누운 소년의 모습으로 가물거리며 사라지는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그러나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출발해서 <희생>에 이르기까지 그는 결코 롱테이크로 점철된 따분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아니다.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일반적 평가가 일상의 평온함에 대한 사려깊은 고찰이라는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제시되듯이 타르코프스키 역시 롱테이크의 대가이자 종교적 구원을 그려내는 작가로만 알려진 듯하다. 오즈의 영화들이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삶의 신산함과 불편한 감정을 모더니즘적 방법으로 표현했듯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도 텍스트가 단순한 종교적 성화로만 여겨지기엔 너무나 다층적이다.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 그 자체가 이미 말을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그는 절실하다. 그래서 우리는 불가능할 것 같은 숭고한 장면들을 영화 속에서 본다! 상상하기 힘들 만큼의 절실함과 진실된 순간들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종교적 차원의 것만이 아니다. 이것은 영화적 숭고함의 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적 감정의 고양이라는 것이 비단 종교적 스토리를 얘기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미 수많은 헐리우드의 종교적 일화를 다룬 영화들을 알고 있다. 이에 비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많은 독백에도 불구하고 수다스럽지 않으며 단순한 듯한 구도에도 불구하고 모던하며 지나치게 길어지는 듯 한 지속시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다.

<노스탤지어>에 나오는 폐허는 <거울>에서처럼 낙숫물이 흘러내리고, 주인공이 거쳐가는 냇가는 <스토커>에서처럼 방향을 상실한 듯 어지럽다. 우리가 이미지를 단지 이미지 그 자체로만 본다면 이것은 지루한 풍경일 뿐일지도 모른다. <안드레이 류블로프>에서 길 떠나는 이의 풍광 역시 전형적인 중세의 풍광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그 속에서 어쩌면 영화의 내용을 통해 혹은 그 이미지의 표피를 통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우리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발견하게 되는 깊숙이 사색에 빠진 스스로의 모습일 것이다. 아무 것도 해독하지 못하고 결코 완벽히 이해될 수 없을 지라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깊은 감정의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그의 영화가 거의 형언하기 힘들 정도의 완벽함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영화적 재현의 순간들이 주는 특별함은 보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갈구하게 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초창기의 시네마테크의 출발점과 백두대간의 출발점을 비교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하다.

시네마 테크의 첫 회고전은 ‘오슨 웰즈’의 영화들이었고 백두대간의 시작은 <희생>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 두 시작은 참으로 시의적절하면서도 멋진 출발임에 틀림없다. 헐리우드의 고전과 구 소련의 고전. 한국에서 시네마테크의 출발점은 그렇게 시작했다. 이것은 러시아에서 몽타주와 미국에서의 몽타주가 스스로 태동했던 것처럼 우연한 역사적 발전의 동시적 현상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예술영화를 정의하기는 매우 힘든 일이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백두대간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곧 ‘예술’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부정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예술영화’를 정의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그것은 제작과정과 유통과정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떻게 ‘이해’되느냐의 차원에서 결정되어야 할, 영화의 탄생과 소멸까지의 제반상황을 모두 고려하여 결정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개입되는 것은 영화 그 자체의 영화사적 측면의 독해를 넘어 현재 공유되고 있는 혹은 이해되고 있는 영화의 개념을 부단히 확장시키고 나누는 과정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굳이 변화하고 있는 예술영화에 대해 사족을 달아본다면 그 기준은 영화 그 자체보다 삶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달려있을 것이다. 살면서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할 만한 영화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삶에 대한 태도에 혼란을 주는 현실과 목도하게 됐을 때 보는 모든 영화는 예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천년에 이르는 중세를 견뎌내는 구원에의 갈망이 지금 현재 결코 불가능할 것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면, 그 가장 큰 가능성을 내보일 영화는 다름 아닌 타르코프스키의 재개봉작 두 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2 )
qsay11tem
따분한 영화네여   
2007-11-26 13:19
kpop20
잘 읽었습니다   
2007-05-1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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