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서두부터 먼저 이소룡 얘기를 꺼내는 모습에 천상 이소룡 팬임을 부인할 수 없을 듯 했다. 아니, '당룡' 김태정에게 이소룡은 운명처럼 보였다. 김태정 선생은 <사망유희>(1979)를 찍다 급작스레 사망한 이소룡의 대역으로 전격 발탁되어 화제를 모았던 액션 배우다. 그렇지만 그러한 인생의 대반전은 쉽게 호락호락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정무문>을 보고 이소룡의 세계에 입문한 그는 이소룡과 같은 액션배우가 되리라는 꿈을 현실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너도나도 이소룡을 동경하며 쌍절권을 배우던 시기, 그는 철저한 수련과 노력으로 '꿈은 이뤄진다'를 몸소 실천했다.
부산에서 단신으로 서울로 상경한 그는 호떡장사를 하면서 액션영화의 꿈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를 알아본 한국 영화사들의 제안을 뿌리치면서 홍콩으로 입성한다. <사망유희> 이후 홍콩에서 원화평과 찍은 <사망탑>(1980)은 이소룡의 과거 필름을 누더기로 덧대 만들었다. 마치 <영웅본색2>에서 쌍둥이 동생 주윤발이 출연했던 것이 연상되는 <사망탑>에서 이소룡의 동생으로 출연해, 대역이 아닌 당당한 주연배우로 전세계에 '당룡'이란 이름을 널리 알렸다.
장쾌한 발차기와 화려한 손동작을 선보였던 김태정의 활동당시 출연작은 그리 많지 않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정윤희와 함께 한 한국영화 <아가씨 참으세요>(1981)나 대만 영화사가 제작비를 대고 한국에서 촬영한 <쌍배>(1982)를 제외하면, 장 끌로드 반담의 <특명 어벤저>(1985)가 전부다. 어쩌면 과작만을 남기고 영원히 팬들의 가슴에 남은 이소룡의 그 길을 쫓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한국의 영화제작 시스템을 좁게 느꼈던 그의 태생적인 호방한 기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김태정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복고취향의 액션물 향취가 물씬한 <야쿠자>는 감독, 주연은 물론 각본, 제작, 음악 등 전방위에 걸쳐 작업할 꿈의 영화다. '당룡'이 아닌 인간 김태정의 꿈은 다시금 불씨를 당겼다.
하성태(이하 '하') 실물이 훨씬 더 샤프하세요.
김태정(이하 '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거죠(웃음). 옷도 나이에 맞게 입는 게 좋은 거예요. 친구들이 안 만나려고 그래요. 내가 너무 젊어 보이니까 서로 피하지. 주변 사람들이 보면 나한테 왜 나이든 사람한테 반말하느냐고 하니까.
하 몸이 정말 좋으세요? 운동을 꾸준히 열심히 하시나 봐요.
김 운동은 계속하죠. 숨쉬기가 운동이에요. 그 숨이 들어갔다 안 나오면 죽는 건데(웃음). 왜 하지. 내가 브루스 리 다음으로 손이 빠르다고 하는 사람인데. (잠시 생각하다) 지금 생각해도 브루스 리는 배우이기 전에 영웅이에요, 한 번 보면 누구나 다 빠질 정도로 마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제2의 이소룡 모집할 때 아시아권은 골든하베스트에서 하고 미국이나 유럽쪽에서는 전 영화사가 참가했어요. 그런데 테스트 받으러 흑인이 온 거야. 그게 말이 되요? 그만큼 매력이 있는 거지. 앞으로도 팬은 더 많아 질 거야.
하 이소룡의 매력을 누구보다 잘 아실 것 같아요.
김 그렇죠. 이소룡에 대해서 공부를 오래 했으니까. 스토리가 긴데 이런 걸 가지고 연재해도 될 거야. 내가 지금 자서전을 준비해요. 미국 얘들이 트루 스토리를 좋아하거든. 이소룡 사진은 저작권 때문에 쓸 수가 없어요. 근데 나는 쑬 수 있거든요. 팬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게 왜 죽었나 하는 부분이에요. 나는 알고 있거든요. 옛날에도 각 방송사에서 다 인터뷰를 하자고 나한테 연락이 왔는데 안 했어요.
하 아니, 왜요?
김 그때 내가 브라운관에 나가서 스스로 얘기를 왜 해요. 지금은 나이를 먹었으니까 그런 얘기들이 후배들한테 도움이 될까 싶어 하는 거지. 30대였으면 안 했죠. '너희가 보고 싶으면 극장에 와서 봐라' 그런 거지. 지금은 그런 나이가 지났으니까.
하 이제 후배들한테 얘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김 그렇죠. 내가 돈으로 도와 줄 수도 없는 거고. 제가 공부 했을 때는 인터넷도 없었어요. 그래도 자료 뒤져보면 70%가 아니에요. 그런게 굉장히 중요한데도.
하 <정무문> 보고 한 눈에 반했다고?
김 <정무문>을 먼저 봤어요. 원래 <당산대형>이 먼저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정무문>이 먼저 개봉을 했어. 봤는데 너무 잘 하는 거야. 로저 무어가 나오는 '007' 영화를 보면 우리가 집에 가서 흉내를 내겠어요? 그건 상상의 나라인거고. 근데 이소룡이 발을 차면 내가 운동하면 가능하겠구나 싶었던 거지.
서대원(이하'서') 저도 <용쟁호투> 보고 쌍절곤을 배웠어요(웃음)
김 맞아, 그러니까. 그때는 쌍절권도 없어서 철공소에서 직접 만들었지. 브루스 리 영화는 내가 해 봐도 가능하겠구나 싶었어요. 해 보면 비슷한 거 같아.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 보면서 몰입을 하게 됐지. '이것 봐라' 그러면서 계속 파게 된 거에요.
서 그럼 그 전에 운동은 어떻게 하신건가요?
김 그 전에는 그렇게 전문적으로 한 건 없어요. 태권도도 2단밖에 안됐고. 이소룡 영화를 보고 다시 시작했고, 다시 홍콩에 가서 브루스 리 스타일로 또 운동을 했지. 나도 하면 할 수 있겠다 싶던 거지. 6억 5천 아시아 인구 중에 대한민국은 열악한 환경이었잖아. 게다가 배우도 아니었던 내가 발탁됐으니 참!. <정무문>을 부산에서 보고 서울로 올라왔어. 나도 하면 할 수 있겠다 싶었던 거지. 극장을 아침에 들어가면 저녁에 나와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돈도 없었고.
하 또 동시상영 시대였으니까요.
김 맞지. 그 한 커트 한 커트 표정들을 머리에 다 담는 거지. 집에 와서는 또 공부를 하고. 그때는 사진도 없었어. 명동에 가서 일본 잡지 파는 곳에서 어렵게 잡지를 구해서 사진을 하나 잘라 벽에 붙여놓고 보는 거지. 어!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거야. 그러면 내 사진을 찍어서 영화사에 돌려야 할 텐데 돈이 있어야 찍을 거 아니야. 우리 집이 그때 당시에도 잘살았는데도 부모한테 10원짜리 돈 하나 안 타서 쓴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무작정 사진관을 갔어. '아저씨 사진하나 찍어주세요' 하니까 좋아했는데 '저 돈 없어요'라고 했지. 아니 그냥 사진 말고 밖에 나가서 한 장 찍어달라고.
하 프로필 사진이요?
김 '내가 제2의 이소룡이 될 사람이니까 나중에 갚겠습니다' 그랬지. 그렇게 1주일을 찾아 간 거야, 1주일을. 그러니까 딱 일요일이 됐어. 문 딱 걸어 잠그고 전문용 카메라를 들쳐 메고 밖으로 사진을 찍으러 갔어. 일부는 워너브러더스에 보내고 나머지는 골든하베스트 보내고 조금 남은 걸 한국영화사 쪽으로 보낸 거야. 객지 생활하면서 돈을 벌어야 되니까 호떡 장사를 했어요. 2시까지 하고 그 이후부터는 잽싸게 충무로로 가는 거야. 그래야 감독도 만나고 배우도 만나니까. 그러니까 단역들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만나기 시작했어. 근데 그 당시 20개 영화사 중에 국제영화사라고 있어.
하 굉장히 큰 영화사였잖아요.
김 그때 전속을 계약하자고 제의가 들어왔지. 그때 전속을 하고 3개월 후에 홍콩에서 연락이 온 거야. '오케이 가자' 그랬는데 전속이 걸려있으니 가지도 못한 거지. 풀어달라고 통사정을 해도 그쪽에선 안 된다고 하고.
서 계약금은 받으셨나요?
김 그럼. 당연히 많이 받았지(일동 웃음). 한 6개월을 싸움을 했어. 오늘 처음 얘기하는 건데, '그래? 좋아!' 그랬어. 하도 안 되니까 남대문에 가서 모래주머니를 샀어. 그래서 람보처럼 그걸 들고 영화사에 올라갔어. '저 새끼 미친놈이구나' 싶게. 아무한테나 욕하고 그랬지. 그러니까 나중에 해약을 해 주더라고. 당연히 골든하베스트에서 연락 온 건 모르고. 그 당시에 양재동 땅 한 평에 3000원이었던 시절에 홍콩에 갈 몇 백 만원이 어디 있느냐고. '큰일 났다, 해약은 해 준다는데' 싶던 찰라에 동아수출공사 이우석 사장님이 같이 가주셨지. 그래서 <사망유희>를 찍은 거야. 지금 생각하면 국제영화사에는 참 미안하지. 그래도 그 당시에는 그게 나의 전부였고 그 영화를 찍어야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그 이후엔 뭐라고 해도 난 내 꿈을 이룬 사람이고 액션계에 획을 이룬 사람이 됐지. 그 바람에 중국 사람들은 엄청 자존심이 상했지만.
서 존경하던 분이 죽고 나서 그걸 기회로 얻어 스타가 됐다는 게 참 아이러니해요.
김 그 사람하고 나하고 인연이 있을 거예요. 내 아들이 죽을 때도 꿈을 꿨는데, 그 전에도 이소룡 꿈을 많이 꿨어요. 마음에 있으면 꿈에 있다는 건 정확한 이야기거든. 내가 하와이에 있었을 거에요. <당산대형>에서 이소룡이 날 노려보고 있는 거야. 완전 생생한 필름이야. 그래서 LA에 전화를 해 본 거지. 그래서 아 이거 이상하다, 무슨 이런 꿈을 꿨지. 그랬는데 3일 만에 죽은 거야. 이제 내가 죽으면 이소룡과의 연은 거기서 끝나는 거지. 난 죽을 용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영화 역사를 보면 '사망'자를 쓰는 일이 거의 없어요. 그런 심리가 굉장히 철저해요. 한국영화계도 마찬가지고 배 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사망유희>에서 세 사람이 죽어요. 이소룡 죽었죠, 거기 나오는 아카데미 조연상을 탄 미국배우가 신문기자로 나오는데 나중에 죽었어요(편집자_주 짐 먀샬 역의 긱 영을 지칭하는 듯). 촬영 현장에서 기록을 봤던 백인여자와 결혼을 해서 미국을 갔는데 6개월 만에 부인도 쏘고 자기도 자살을 했죠. 난리가 났었죠. 그렇게 타이틀이 중요한 거에요.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영화 <사망지로>인데 영어로 < The Way of Death >에요. 거기도 사망이 들어가잖아요. 그래서 일단은 가칭을 <야쿠자>'라고 한거에요.
하 <사망유희> 찍기 전에는 고생도 많았을 것 같아요.
김 영화사에서 영화 찍자고 해도 안 찍었지. 그때는 영화사 당 1년에 무조건 대여섯편씩 찍던 시절이니까.
서 수입쿼터제 때문이었죠?
김 돈을 줘도 무시하고 안했죠. 국제영화사에서도 하자고 해도 안하고, 동아수출공사에서 하자고 해도 안하고. 목표는 <사망유희>니까 안했지. 자기가 하다 보면 편한 길로 가고 목표를 잃어버리기 쉬워요. 쉽게 가려고 하고. 큰데서 놀면 작은 물은 덤으로 오는 거야. 할리우드 유명 배우가 한국영화를 찍어서 사람들이 다 아냐 말이지. 아니라는 거야.
하 오디션 당시도 경쟁률이 굉장히 높았다면서요.
김 홍콩을 가서 또 테스트를 받은 거지. 일단은 뭐 이 역할은 내 거니까 난 100%로 된다고 봤어요. 가기 전에 이미 스틸사진도 다 보여줬고. 이소룡 사진 10장에 내 사진 3장을 섞어 놓은거지. 이소룡 영화를 본 친구들한테 보여주면 다 '야 이건 되겠다' 그랬어요. 그 당시 난 카메라도 보지 못하는 때였는데도. 그런데 완전 신인하고 톱스타의 발차기를 매치시키니까 힘들잖아. 그래도 난 이소룡의 연기를 해야겠다고 하면 내가 삭 없어져. 무술인들이 17~18년을 하면 다 그래요. 죽은 사람이 내 안에 들어가는 것처럼 힘들지(웃음). 그러나 난 아직까지도 실력이 있고 정확하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한마디 더 하면 우리나라 연기자들 참 좋은 거 같아. 돈 많이 벌고 좋은 차타고 다니고. 좋다 이거야.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연기자는 한이 있어야 돼. 그 한은 여유에서 나오는 게 절대 아니에요. 눈물의 밥도 먹어 봐야 하고. 요즘은 눈물 연기에 안약도 넣는다지만 그때는 다 진짜로 울었다고. 나도 지금 우는 연기하라면 진짜로 울어요. 내가 편한 길로만 가지 마라, 이미 성공한 사람은 그렇게 내려갈 수도 없으니까 고생할 때 처절하게 확실하게 해라 이거지.
하 연구 많이 했으니까.
김 걷는 거 차는 거 다 연습했으니까. 지금도 해 보면 다 똑같다고 해.
하 <사망탑>은 이소룡이 동생 역할이었는데 촬영할 때는 어떠셨나요.
김 그 영화는 사실 이우석 사장님을 미워하는 면이 있는데. 그 시절이 같은 영화라도 중국말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관객수가 60~70%가 차이가 나던 때에요. 중국말만 하면 관객들이 막 들어왔으니까. <사망탑>을 중국말을 붙였으면 한국에선 또 달랐을 거야. 그게 좀 아쉽지. 그때도 연기자가 계산을 앞세우고 돈을 밝히고 그런 게 없었으니까. 우리는 작품만 좋으면 아무것도 안보니까요.
하 그래도 개인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작품일 거 같아요.
김 <사망탑>이 대단한 액션이에요. 몇 년 전 만에 해도 미국 채널라인에서 토, 일 방영을 했어요. 액션만큼은 지금 봐도 안 뒤지고요.
서 그때 무술 감독이 원화평 감독이었죠?
김 원화평 봐요. 지금 봐도 1년 스케줄을 잡기 힘들잖아요. 총감독이 <취권>의 오사원이었고. 그 사람들이 그 당시에 엄청나게 유명하고 돈도 많은데도 <사망탑>을 찍은 거지. 그러니까 촬영도 하기 전에 동남아에는 먼저 다 팔렸어요. 사실 그때 중국영화 액션 보면 스토리가 참 빈약해요. 눈물도 없고, 한도 없고. 스토리가 없어요. 그런 게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 차라리 처음에 이소룡 몇 커트 넣지 말고 <사망유희>의 누구 누구 해서 만들었으면 판도가 달라졌을 거예요. 그래도 <사망탑>에는 항상 고마운 마음이 있죠.
하 그 이후는 한국영화도 찍으셨죠?
김 <아가씨 참으세요>를 함께한 정윤희는 당대 최고의 배우였죠. 81년도에 나하고 찍고 결혼하고. 나는 미국으로 가서 장 끌로드 반담의 데뷔작 <톡식 어벤저>를 찍었어요. 그리고 사실 난 해외에 진출하면서 어떠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생각지도 않은 걸 시도하려고 하다 넘어지고 깨지기도 했어요. 그러다 지금 다시 원점으로 온 거예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에게 야망을 더 가지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미쳐라 이거야. 사실 이소룡하고 나하고는 상대가 안 되지만 난 거기 맞춰서 나갔다고.
서 아 그리고 선배님이 한참 활동하다가 못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당시 한국 액션영화를 천대해 붙여진 '으악새'(배우들이 으악 소리를 내며 쓰러진다고 해 붙여진 별칭)영화들이 양산되던 시기와 맞물렸기 때문인 측면도 있는지요?
김 글쎄 그건 아닌 거 같고 당시 얘기를 조금만 하자면 그때 멜로 배우들이 액션 배우 있는데는 오지도 못했어요. 한마디로 액션 배우가 더 위야. 멜로 배우들을 인정 안 해주던 시절도 있었는데 근데 세월이 가면서 이게 뒤집어졌고. 1년에 한국영화 중 대다수가 액션 영화가 나올 때가 있었는데, 그 다음 후반에 '으악새 영화'들이 나온 거지.
서 홍콩으로 넘어간 동년배 배우들과 교류도 많이 있었나요?
김 황정리 형, 권영문 형. 제일 친한 사람이 그 두 사람이에요. <사망탑>에 같이 출연하기도 했고. 권영문 씨는 개인적으로 친하고 미국에서 같이 술도 많이 마셨어요.
하 홍콩 진출 당시 언어도 안통하고 힘들었을 거 같은데. 아무리 모셔갔다고 해도.
김 사실 광동어는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대사가 30자가 된다고 하면 광동말로 동시에 할 수가 없어. 액션영화는 사실 동시녹음이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입은 맞춰야 되잖아. 그래도 30자를 우리 유행가 가사에 맞춰 대사를 했지. 중국어 사성에 맞춰서. 한국 사람이 들으면 배꼽 빠지는 거지. 그리고 통역을 해줘도 5%도 안 들어와요. <사망유희> 같은 경우는 미국감독, 영어에 광동어가 난무하고 중국 감독에 한국말 하는 감독까지. 4가지 언어가 왔다 갔다 해요. 언어라는 게 참 중요하고 무섭기도 한 거고.
서 황정리, 황인식 선생님들을 비롯해 홍콩에서 활약했던 배우들의 대우는 어땠나요?
김 엄청 대우를 해줬지. 로저 무어가 성룡하고 <캐논볼>을 찍기도 했는데 골든하베스트 역사상 나만큼 대우해준 배우가 없었대요. 그때는 홍콩에 아파트가 별로 없던 시절인데 ' 아파트 사줄까' 그래요. 내가 호떡 장사를 했는데 호텔은 말 그대로 꿈이잖아. 그래서 딱 호텔에서만 3년을 묵었지. 이때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는데, 홍콩 호텔은 양주 미니바가 잘 되어있어요. 그게 70개가 넘는데 그걸 다 담아서 후배들 주고, 그 다음날 또 있길래 또 다 줬어. 그게 다 공짜인줄 알았거든. 그랬더니 매니저가 '너 술 마시냐? 왜 이렇게 빌이 많이 나왔어' 그래요. '형, 내가 매일 촬영하는데 무슨 술? 근데 조그만 병이 다 돈 받는 거야?' 그랬지. 촌놈이 갑자기 잘 된 거지. 롤렉스시계, 비행기가 그때는 순수한 꿈이었는데 롤렉스시계를 차보니까 정말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갖고 싶을 때가 정말 꿈이지 갖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싶었지. 난 이소룡 영화도 찍었으니까 이루고 싶은 꿈을 다 이룬 거지.
서 당시 우리나라 영화 수준은 어떻게 느끼셨나요?
김 그 당시 우리나라는 홍콩보다 못해서 뒤지는 게 아니었어요. 얼마나 인재들이 많았는데. 정책적으로 문화를 말살시켜서 그렇지. 욕구는 있는 데 분출을 못하니까 똑똑한 감독들은 다 액션영화에서 나가고. 예를 들어 멜로 영화면 키스신에서 둘 이 입술을 부딪치려고 하면 갑자기 등대가 나와. 아니면 그럼 갑자기 60년대 기차가 칙칙폭폭 지나가고(일동웃음)
서 물레방아 돌아가거나 그런 식으로 말이죠?
하 장작불!
김 그럼 바윗돌에 파도가 부딪친 다음에 남자가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어.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던 시절인거지. <사망탑>도 그렇고 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 문화는 그 나라의 얼굴이고 축소판이잖아. 지금은 다 알지만 여전히 모자란 거 같고. 제대로 경쟁을 할 수 있으면 정말 한류 바람은 영화에서 또 불 수 있다고. 난 제작자들한테 그런 얘기를 하고 싶어. 왜 자꾸 젊은 배우들만 기용하냐. 일본만 봐도 40-50대 배우가 많고 미국은 80살까지 연기를 한다고. 그럼 우리는 그런 배우가 어디 있느냐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좋은 연기를 펼칠 수 있는데. 몇 안 되는 배우들 가지고 영화의 한류 바람을 일으킨다, 턱도 없는 소리지. 왜 미국 영화사들이 제작비 500만 불 이하를 쓰는 신인감독을 좋아하겠어. 걔네들은 죽기 살기로 해서 케이블에서 대박만 나도 전체가 대박 나거든. 우린 너무 주 관객층인 10.20대 거기에 집중하는 거 같아.
서 그 당시 보면 한국배우들이 발차기가 뛰어났다고 하던데. 그게 특징이었나요?
김 아무래도 보직이 액션이었으니까. 운동은 쿵푸나 영춘권이나 태극권은 모두 발차기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아요. 허리이상 발을 차면 진다고 실전에서 배웠지만. 하지만 태권도는 어때요? 일단 높고 화려하잖아. 그러니까 보기가 좋고. 실제 싸움에서야 허리 이상 차면 끝나지만. 그런 무술의 차이가 있으니까 발 기술에 대해서는 인정을 받았지.
하 선배님은 기술의 달인이란 평가를 받았다던데요(웃음).
김 그건 다 거짓말이야.
서 그럼 선배님 스스로가 김태정의 액션은 이런 거다 표현 한다면요.
김 아니야, 아니야. 이소룡에 비교하면 난 호롱의 반딧불도 안 되는 사람이야. 그 흉내만 내는 걸로 감사하고. 나처럼 발차기 하는 사람들이 전세계 수십만은 될 거야. 뭐 특이한 기술이 있고 그런 건 없어.
서 최근 한국 액션영화는 일명 '개싸움'이라고 하는 액션이 유행을 했어요. 그게 장점이 분명하지만 또 그것 때문에 중화권 같은 정교한 액션이 사라졌다는 평가도 있어요.
김 그런 건 부수적인 거야. 액션은 동작이 일단 커야 되요. 아프게 때려봤자 효과가 없어. 부딪치면 상대방도 아프고 표시도 안 나고. 영화 속에서는 다 가짜라는 걸 알잖아. 그럴 땐 큰 기합과 보기 좋은 액션이 좋은 거라고. <사망유희> 때도 뼈가 세대나 부러졌는데. 다 필요 없어. 예술적 그림 같은 동작으로 보여주는 게 필요하지.
하 '당룡' 김태정 하면 이소룡의 대역으로 소개가 되잖아요. 기분 나쁘거나 그런 건 없겠네요.
김 그게 진실이니까. 그걸 내가 바꾸면 안 되는 거지. <사망유희> 당룡은 내버려두고 인간 김태정은 따로 있는 거니까. 내가 지금 그걸 마무리 하고 싶은 거지.
하 이소룡 팬들도 그렇고 한국액션 팬들도 그렇고 작품이 적어서 아쉬워들 해요.
김 <사망유희>를 찍고 들어왔을 때 TV에서 찾고 난리였는데 보따리 싸고 도망갔어. 보고 싶으면 극장 와서 봐 그런 마인드였지. 또 하나는 나 고생할 때 충무로는 날 몰라줬으니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 요즘은 후배들 만나면서 얘기해 보면 그때 더 작품이 많았으면 좋았을 뻔 했다는 생각도 가끔 들지.
서 차기작은 본인이 감독, 각본. 주연을 하는 건가요?
김 포스터도 내가 쵤영 했죠. 음악도 내가 골랐고. '언체인드 멜로디'는 멜로에 가깝잖아. 이 노래는 백인 남자가 불렀는데 조금 빨라. 음반도 다 만들어 놨고. 제작비가 지금 한 달하고 20일 정도면 다 모일 거 같은데 500만 불이면 끝날 거 같아요. 미국 500만 불은 제작비도 아니니까.
서 투자는 이끌어 내는 와중인가요?
김 투자는 일단 내가 가지고 있는 돈 250만 불로 시작됐다 볼 수 있어요. 미국은 50만 불만 줘도 시나리오 뱅크에서 각본을 만들 수 있으니까. 또 배우는 확실하지. 근데 왜 한국 사람이 일본 액션 영화를 찍느냐 할 수 있는데 4개국 합작이야. 미국 조감독, 홍콩 무술, 일본 배우, 한국에서 나. 그럼 또 이슈가 되잖아.
서 내용은 야쿠자에 관한 건가요?
김 동경 신칸센 열차를 타고 내려가면서 배신자를 한 명 한 명 죽이는 내용이지.
서.하 (동시에)와우!
김 카메라가 먼저 앉아 있는 '오야붕'들을 쫙 훑어. "저 다섯 배신자들을 죽이지 않으면 일본 35만 야쿠자 조직의 이름이 서지 않는다." 근데 또 워낙 쟁쟁한 놈들이 배신을 한 거야. 그러니까 킬러를 보내도 족족 죽는 거지. 그때 중간보스가 청부할 사람이 한 명 있다고 해. 이 남자 역시 No야. 그렇지만 "날 불러준 대가로 한 번은 해 보겠다"고 계약을 해요. 그런데 사실 주인공은 10대야, 18살 소녀. 이 남자 어느 바에 들어가서 그 아이를 만나. 그 남자는 피에 밥을 말아먹고 살아온 터라 10대의 발랄함을 본 적이 없잖아. 이 아이랑 남자랑 정신적 사랑을 한다고. 한 사람 한 사람 죽여 나가면서도 둘은 굉장히 아가페적인 사랑을 하지. 그렇게 바닷가에 들리기도 하고 드라이브도 하면서 배신자들을 죽여 나가다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아. 남자는 소녀에게 '내가 12시 반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먼저 동경에 떠나라'고 해. 그러자 '선생님, 제가 꼭 기다릴 게요'라고 하지. 그리고 마지막 결투에서 남자와 배신자가 서로 총에 맞지. 남자는 죽어가면서도 첫사랑 여자를 생각하고. 이제 카메라가 오버랩 되면 여자가 기다리고 있어. 둘이 손을 맞잡는 순간에 여자 지갑에서 총이 하나 나와. 관객은 깜짝 놀랄 테지. 완전한 사랑을 그려놨으니까. 여자도 결국 야쿠자야. 이 이야기는 LA에 가져다 놓고 찍어도 되고, 한국에 가져다 놔도 상관없을 거 같아. 10대부터 60대까지 같이 볼 수 있는 영화가 될 것도 같고. 이소룡 영화나 내 팬들은 저 사람이 나이 먹어서 어떻게 연기하나 보고 싶기도 할 테고. 10대 애들은 또 아주 강한 애들이 나오니까 좋아할 테고.
서 합작이니까 한국 영화사들이 혹 관심을 보인다면 같이 할 의향이 있으신지요?
김 바로 그거지. 근데 왜 우리 나라사람들은 좁은 한국만 보고 만드느냐 이거지. 이제까지 영화 수입하는 비용을 엄청 줬는데 이제는 끌고 들어오자는 거지. 대한민국 월드스타 있어요? 없어요. 그럼 나 같은 사람하고 모여서 한국도 참여하고 같이 벌어서 갈라먹자는 거야. 그러다보면 분명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거지.
하 <야쿠자>는 언제 볼 수 있을까요?
서 선배님이 목표하는 시기가 있을 것 같은데.
김 글쎄.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어쨌든 묵히기는 굉장히 아깝다는 거지. 투자는 아무데서나 받아도 상관없으니까. 일본 시장이 사실은 굉장히 커. <사망탑>도 일본 NHK에서 다 방영했을 정도로.
서 한국영화계에서 교류하는 분은 있으세요?
김 당연히 친구 몇몇은 있지. 그래도 아직까지 충무로에서 누구한테 크게 도움을 얻은 적은 없어. 난 그냥 남자가 되고 싶어. 당룡 이전에 멋진 남자로. 작년 부천영화제에도 의전차 말고, 벤츠 말고 부천 택시 타고 갔어. 그런데 앞에서 날 딱 막더라고. 전세계에서 레드카펫 밟으러 온 배우 중에 택시 타고 가는 배우 있냐고. 난 이제 두 번 할 일 없으니까 영화제 측에 좋은 추억을 남기고 싶었던 건데. 이제는 스타나 배우로서가 아니라 <사망유희>를 찍었던 사회 선배로서 모든 걸 후배들한테 다 얘기해주고 싶어.
서 <야쿠자> 이후 큰 그림은요?
김 1편이 잘 돼서 2편을 만들게 되면 좋지. 그런데 또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 내가 3년 동안 농사도 지어 봤어. 너무 좋은 거야. 땅이 너무 정직하고. 거기서 많은 인내도 배웠고. 그런데 이번엔 배우인 내가 영화감독도 해보겠다는 거야. 그게 또 허황된 꿈은 절대 아니라고.
사진 촬영 전후 불세출의 무술 실력을 보여준 김태정 선생과의 인터뷰는 사실 적지 않은 오프더레코드 속에 진행됐다. 이제는 무서울 것이 없는 영화계 대선배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2시간이 훌쩍 흐른 느낌이었다. 특히나 홍콩 야쿠자와의 일화나 대만 제작자들에게 호령했다는 에피소드는 70~80년대 홍콩영화 황금기의 '스타란 이런 것'을 느끼게 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나 술자리에서의 인간 김태정은 무술 실력에 버금가는 입담과 술 실력으로 후배들을 경탄케 만들었다. 원로 영화배우이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도전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2009년 6월 8일 월요일 | 인터뷰_서대원.하성태(무비스트)
2009년 6월 8일 월요일 | 인터뷰 정리_하성태
2009년 6월 8일 월요일 | 사진_권영탕(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