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2017년, 아들(정형민)은 84세 어머니(이춘숙)와 불교 성지로 손꼽히는 티베트 카일라스로 향한다. 몽골 대초원, 고비 사막, 알타이 산맥, 타클라마칸 사막, 파미르 고원을 거쳐 카일라스로 향하는 3개월, 20,000km의 여정이다. 어머니는 1934년생, 당시 여성으로서는 흔하지 않게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했다. 그러나 서른 일곱이라는 이른 나이에 남편을 떠나보냈고 많은 뜻을 접어둔 채로 두 아이를 키우는 데 전념했다. 그 아들이 중년이 되는 동안 겪어낸 지난한 삶은 때마다 ‘봉화 일기’, ‘몽골 일기’, ‘파미르 일기’로 기록됐다. 모든 상황이 힘에 부칠 때, 어머니는 종종 부처님을 찾았다. 80대의 노인이 된 어머니를 모시고 불교 순례길에 오른 아들은 장엄하고 때로 고독한 풍경에 어머니가 쓴 문장을 덧댄다. 한 여인이 몸소 지나온 삶의 장면이 그렇게 관객에게 다가온다. 이 여정은 혹독한 빙판과 눈밭을 지나야만 완성될 것이다. 그 경이로운 기록, 정형민 감독의 <카일라스 가는 길>이다.
*사회적거리두기 2.5단계 격상으로 서면 인터뷰로 진행했습니다.
순례길에서 만난 낯설고 언어 다른 외국인들과 놀라울 정도로 금세 친밀해지는 이춘숙 할머니의 친화력과 여유로움에 감탄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인싸’ 할머니가 아닐까 생각들 정도로요. 그래서 여든 넘어 처음 해외 여행길에 오르셨다는 걸 알았을 때 잠시 믿기지 않았어요. 감독님께는 익숙한 모습이었나요? 24시간을 함께해야 하는 3개월은 때로는 정말 긴 시간이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어머니와 동행하면서, 평소 잘 알고 있던 모습과 거의 알지 못했던 모습을 두루 경험하셨을 것 같아요.
하하. 다행히 2014년 히말라야 순례, 2015년 무스탕 순례, 2016년 미얀마 순례를 통해, 어머님과 손발을 맞추어 왔거든요. 그래서 새로 발견한 모습은 없었답니다. 아, 하나가 있습니다. 2016년까지는 말 그대로 순례였지만, 이번 여정은 2만 킬로에 달하는 모험이기도 했는데 그 여정을 끝까지 가시는 걸 보고 저도 놀랐습니다. “우리 엄마, 대단하다!” 사실 알타이 산맥에서 어머니께 한국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했었거든요. 제가 정신적으로 먼저 지쳤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 너무나 화난 표정을 지으시면서, “지금 돌아가면, 지금까지 고생한 그 여정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저한테 반문하셨죠. 제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돌아가자는 얘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고, 제가 어머니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봉화 산골에 계실 때와 순례길에 있을 때, 많이 다르세요. 봉화 산골에서는 마을회관도 가지 않으세요. 그러니까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보통 산에 가서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텃밭 가꾸고, 독서 하시고, 일기 쓰시면서 하루를 보내시죠. 그래서 여정을 나서시면 모든 게 신기하고 좋으신가 봐요. 예를 들어서, 거의 매일 일출과 일몰을 봤거든요.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도, 어머니는 쉬는 시간도 아깝다면 일출을 보기 위해 막 달려 나가셨어요. 아, 영화에서 보셨듯이 뛰는 모습을 바이칼 호수에서 처음 봤답니다. 이전의 순례길에서는 한 번도 뛰신 적이 없거든요. 저는 어머니가 그렇게 뛸 수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바이칼 호수에서 새벽에 일어나서 일출을 보러 가는데,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해가 떠오를 것 같으니까 어머니께서 뛰기 시작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카일라스 가는 길” 타이틀 샷을 찍을 수 있었던 거예요. 많은 분이 붉은 하늘이 보이니까 일몰로 생각하시는데 해가 뜨기 전의 풍경이거든요. 어머니께서 뛰어가지 않았으면 호수에 늦게 도착해서, 그런 신비로운 새벽을 담지 못했을 거예요.
영화에는 이춘숙 할머니가 쓰신 일기가 자주 등장해요. 일기 안에 담긴 고독하고 쓸쓸한 정서가 영화에 묻어났다고 생각해요. 가족을 떠나보낸 뒤에도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여인의 마음이 어쩐지 좀 아프게 다가오더라구요. 감독님이 어머니의 일기를 작품에 사용하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한편으로는 어머니 생각이 담긴 일기를 처음 읽었을 때 감독님이 느낀 감정도 알고 싶어요. 저는 어른이 되어 어머니(부모님)의 일기장을 펴보는 건 모든 자식이 경험할 수 있는 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 자체로 특별한 경험을 하신 거라는 생각도 했어요.
음… 정말 어떤 얘기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실 30대까지만 해도 “효도해야지” 하는 마음만 있고, 어머니의 삶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오랫동안 일기를 쓰신 것도 알았지만, 한 번도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어요. 한마디로 엄마한테 무관심한 자식이었죠. 아마도 놀라실 것 같은데, 어머니의 일기에 관심을 두게 된 건 히말라야 순례를 갔다 온 이후입니다. 히말라야 순례길에서도 어머니께서 일기를 쓰셔서, 어머니의 일기를 영화에 담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읽어보게 되었죠. 그러다가 점점 옛날 일기를 읽게 되었고, 어머니께서 1963년부터 쓰신 신혼 일기장까지 찾을 수 있었습니다. 1962년 성탄절에 아버지가 어머니께 선물하신 일기장이었어요. 첫 페이지에 선친께서 “먼 훗날, 백발이 성성한 날에, 우리의 젊은 날이 과연 아름다웠다고 말하기 위해 - 당신의 사람이”라고 적으셨더군요. 정말 가슴이 찡했습니다. 그때는 두 분이 연애하실 때인데, 외할머니께서 결혼을 엄청나게 반대하셨거든요. 그래서 일기장에는 어머니의 눈물 젖은 얘기가 많이 적혀 있었어요. 연애도 힘들게 하시고, 어렵게 결혼했지만 아버지는 훌쩍 일찍 떠나버리셨죠. 일기장 보면서 많이 울었답니다. 사실 2018년 울주세계영화제 버전에는 첫 히말라야 여정도, 어머니의 일기도 넣지 못했어요. 넣고는 싶은데 적절히 넣을 방법을 찾지 못했거든요. 그러니까 2019년 한 해 내내 고민을 했는데, 결국에는 ‘너무 따지지 말고 블랙 자막으로 넣자. 그렇게 해도 관객들에게 어머니의 마음이 전달될 것야!’라고 저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죠. 관객분들께서 영화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일기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는지 제일 궁금합니다.
이춘숙 할머니는 1934년생으로 대학을 나오시고 농촌지도소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시절 정말 흔치 않은 ‘배운 여성’이라고 생각해요. 감독님 어린 시절, 보육원에 데려가 그곳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면서 ‘한 끼를 굶더라도 힘든 사람을 돕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는 일화도 들었습니다. 감독님이 성장하는 데 있어서 어머니의 가르침은 정말 큰 영향을 주었을 것 같은데요.
제가 여섯 일곱 살 정도 때부터 보육원에 갔던 거 같아요. 지금 와서 생각해도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갔던 어느 날이 제일 생각납니다. 아침 일찍 깨우셔서 제가 짜증을 부렸죠. 어머니께서 저한테 학용품 꾸러미 두 개를 주시면서 보육원에서 학교 다니는 친구 책상 서랍에 하나씩 넣어두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직접 주면 친구들이 상처받을까봐 그러셨던 거겠지요. 구구절절 말씀을 드리는 것보다 딱 세 가지만 말씀을 드릴게요. 어머니께서 북인도의 보드가야에 가셔서 빈민들에게 쌀과 담요를 사주시겠다고 노령연금을 한 푼도 빠짐없이 저축하고 계신답니다. 그리고 순례를 하면서 간혹 제 다큐가 성공하게 해달라고 기도도 하셨어요. 요지는 이렇습니다. “부처님! 우리 정 감독 다큐가 성공하게 해주이소. 그래서 우리 정 감독이 밥 꿂는 아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늘 당신 시신을 경북대학교 의대에 기증하겠다는 말씀을 하세요. 늙은 몸이라 쓸모있는 부분이 없겠지만, 쓸모있는 부분은 필요한 사람이 쓰고, 나머지는 연구용으로 사용하면 좋겠다고요. 어머니의 뜻이 그렇기는 하지만,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한 놈이어서 그런지 선뜻 어머니의 뜻을 받들기가 어렵네요.
영화의 마지막에 대해서 여쭙고 싶어요. ‘순례길 영화’로 분류될 수 있는 많은 작품 중에서 <카일라스 가는 길>이 가장 큰 차별점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도 생각되는데요. 가파른 빙판 고개를 넘어갈 때, 감독님의 카메라는 이미 한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어요. 이춘숙 할머니는 빙판과 눈밭으로 뒤덮인 아래쪽에서 바닥을 굴러가며, 소리를 질러가며 한치라도 앞으로 나가기 위해 애쓰고 계시구요. 그때 기어코 한 걸음 앞으로 나오시는 할머니 모습은 분명 이 영화를 독보적으로 만드는 지점입니다. 당시 상황이 무척 궁금해요. 아들인 감독님이 그 장면을 한참 바라보면서 촬영하실 때의 생각과 느낌도요.
울주세계산악영화제 상영회 때 그 장면 때문에 원로 산악인들께 야단을 많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고산증이 얼마나 위험한데 노모를 고지로 데려가느냐는 꾸중도 들었죠. 그때도 제가 당당하게 말씀을 드렸거든요. 어머님께서 그 작은 빙판길을 건널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다면, 감히 2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순례를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기자님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셔요. 2만 킬로미터, 해발 고도 4~5천 미터가 넘는 고개들을 넘는 여정입니다. 그 빙판길을 건널 수 없으시다면, 그냥 제주도로 갔겠지요. 그리고 어머니는 할머니가 되신 후부터 “나중에 부처님 앞에 가면, 이 세상에서 아무런 한 일이 없어서 부끄러워서 어떡하노…” 라며 늘 당신의 지난 삶을 부끄럽게 여기시죠. 마지막 오르막 고개에서 “부처님 ! 제가 여기서 낙오해서는 안 됩니다!” 라며 통곡하시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그 긴 여정 동안 어머니를 도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모든 길을 홀로 끝까지 가셨는데, 제가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의 도전을 망칠 순 없지 않겠습니까? 사실 저는 어머니께서 그렇게 혼자서 이겨내시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어머님들이 고난의 세월을 이겨내신 그 힘을 제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일이든, 시간이 얼마만큼 걸리든, 해내고자 마음먹은 일이라면 해낼 수 있는 거구나 싶은 마음이 울컥 밀려와서요. 많은 분이 이춘숙 할머니의 뜨거운 용기에 감화되리라고 생각해요. 감독님은 <카일라스 가는 길>을 통해 관객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으셨나요? 또 이 여정이 감독님께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 알고 싶습니다.
관객분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위에서 끝에 답변을 한 것 같습니다. 처음 히말라야로 떠났을 때, 어머니께서 아버지와 형을 일찍 떠나보낸 깊은 슬픔을 씻어내시길 바랐습니다. 카일라스 순례를 통해 그런 바람은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지난 여정을 통해 욕심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온 것 같습니다. 가령 저희가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 때로는 완성된 후에 2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관객들을 만날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고요. 어머니와 함께했던 순례 덕분에, 제가 마주한 세상에 압도당하지 않고 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 알래스카에서 북미 선주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라고 하셨는데, 관련된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또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다루는 <소멸해가는 당신을 위하여>라는 작품도 구상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카일라스 가는 길>의 (예비) 관객에게도 기대감을 줄 수 있는 새롭고 눈길 가는 정보가 될 것 같아요.
국내에서 북미 선주민(인디언)에 관한 다큐가 제작된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방송에서도 한 번도 다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제가 경북대학교에서 영상 인류학을 가르치기도 하기 때문에, 제가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걸 가지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대서양 연안에서부터 북미 대륙을 가로질러 태평양 연안까지 가는 로드 다큐가 먼저였는데, 남동 알래스카 지역의 클링깃 부족에 관한 이야기가 먼저 제작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KCA)의 제작지원을 받았고, 7월에 알래스카 촬영을 마치고 현재 가편집 작업 중에 있습니다. 내년 세계환경의날(6월 5일) 방영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가제는 “신성한 숲, 빙하, 그리고 고래”입니다, 남동 알래스카의 바다, 원시림, 빙하, 그리고 그곳에 사는 클링깃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소멸해가는 당신을 위하여> 라는 작품은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담게 됩니다. 요즘은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어떻게 어머니와 잘 이별할 수 있을까? 그래서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을 기록하려는 계획입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인 북인도 보드가야 순례를 포함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저와 인터뷰하는 분들께 공통으로 드리는 질문이기도 해요. 최근 소소하게 행복하신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지요.
다른 감독님들도 그러시겠지만, 이번 작품을 편집하면서 한 번도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2018년 울주세계산악영화제에서도 그랬고요. 그런데 이번에 여러 극장에서 영화를 봤는데, 조금 더 줄였어야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마지막에 200석 규모의 스크린에서 영화를 봤는데,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어요. 작업을 끝내고도 수십 번을 봤는데, 처음으로 백 퍼센트 만족스러웠습니다.(^..^) 저 혼자서 “오! 더 손댈 부분이 없네”라고 혼자 자신감에 부풀었죠. 옆에서 작업을 도와주면서 역시 여러 번 보았던 동생도 “오? 마지막에 또 수정했어? 왜 달라 보이지?” 하더라고요. 한마디로 저는 최종 결과물에 대해 아주 만족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제공_ 영화사 진진
2020년 9월 9일 수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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