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요정미 가득한 네버랜드는 없다. 화산재가 수북한 회색빛 섬, 그곳을 지배하는 레게머리를 한 독선적이고 오만한 ‘피터’, 쌍둥이 동생과 함께 네버랜드에 간 ‘웬디’는 그곳에서 무엇을 봤고 어떤 것을 깨달았을까. <비스트>(2012)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벤 자이틀린 감독이 7년의 시간을 거쳐 완성한 완전히 새로운 피터팬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해당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했습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연극 등 무수히 변주돼 온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기면서, 특히 주목한 지점은 무엇인가요.
<웬디>는 네버랜드를 경험했지만 이를 뒤로하고 떠난 ‘웬디’의 이야기예요. 이를 통해 ‘나이 듦’(노화)의 본질을 파고들고자 했죠. 몸의 변화뿐만 아니라 기쁨과 경이로움,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일어나는 영혼의 침식에 대해서 말이에요. 우리가 자라서도(늙어서도) 자유를 간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은 네버랜드를 시험해 온 7년간의 여정을 이끈 원동력이었습니다.
<웬디>는 어른을 위한 내러티브라는 생각이에요. 영화의 톤과 분위기 등 전체적인 콘셉트는요.
원작의 ‘네버랜드’에 등장하는 요정미 가득한 묘사는 버리고, '피터팬'의 야성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저속하고 변덕스럽게 표현하려 했어요. 밖에서 뛰어노는 듯한 현실감 이 느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우리의 놀이와 상상력을 디지털 스크린 안으로 옮겨 톤과 질감으로 자연의 축복을 그리려 했죠. 그래서 로케이션을 통해 실재하는 공간에서 가능한 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매혹적인 광경을 연출하고자 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네버랜드의 현실적인 모습이 영화의 색깔을 더 강하게 하는 것 같아요. 주요 로케이션과 공간 디자인에 있어 중점을 둔 부분은요.
네버랜드는 ‘짓는’ 게 아닌 원래 존재하는 곳이어야 했어요. 네버랜드를 경험하는 아이들의 모험을 담아내기 위해, 불안정하고 접근이 어려운 장소들을 찾았죠. 루이지애나와 서인도 제도의 화산섬 몬트세라트에서 촬영했는데요. 몬트세라트는 서인도 제도에서 가장 최근에 화산 활동했던 곳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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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 같은 재킷 상의만 걸치고, 레게 머리를 한 ‘피터’의 의상과 외양이 눈에 띄는데요, 종종 오만하고 독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피터’ 캐릭터를 소개해주세요.
‘피터’를 연기한 배우 ‘야수아 막’이 자란 ‘라스타 캠프’(인도의 지역)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곳의 아이들이 양복 재킷 한 벌을 놓고 그 옷을 입은 사람이 술래를 하는 게임을 하는데요. 자신의 세계에서 왕인 ‘피터’의 지위를 상징하는 동시에 또한 ‘피터’가 폭발하기 전(피터팬이 되기 전)까지는 유니폼을 입는 학생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죠.
‘피터’는 기쁨과 놀이가 매 순간을 지배하는 진짜 아이여야만 했고, 완전한 자유로움이 완전한 외로움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직전의 섬세한 시기에 멈춰 있어야 했어요. 특히 그 또래의 아이가 행동할 수 없는 힘과 정신을 지녀야 했죠. 우리의 ‘피터팬’을 찾는다는 건, 통제 불능인 6살짜리 소년으로 보이지만, 자연을 깊이 사랑하고 이해하며 복합적이고 지능을 가진 캐릭터로 진화하는 모습을 담아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피터와 달리 웬디는 평범한 소녀지만, 어린이기를 고집하지 않고 ‘나이 듦’을 삶 그 자체로 바라보는 현명한 인물이에요. 피터가 아닌 웬디를 주인공으로 한 이유와 이를 통해 전하고 싶은 바는 무엇인가요.
‘피터’와 ‘웬디’를 둘러싼 이야기에 뛰어들면서, 우리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이야기는 그간 봐온 수많은 영화나 심지어 원작 소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어요. 자신의 삶을 영위했던 인물이 지닌 핵심(core) 정신을 바탕으로, 문제가 깊은 역사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 중 하나였어요.
원작은 인종 차별적이고 성 차별적인 원형에 갇혀 반복되었죠. 여성이라는 역할에 갇혀 있었던 원작의 캐릭터를 다시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면, '웬디'가 가진 성별과 사랑 넘치는 따뜻한 성격이 옷을 수선하거나 집에 있으려 하고, 소년들의 모험을 눈이 휘둥그레져서 옆에서 지켜보는 존재로 표현되는데요. 영화에서는 이 점을 '웬디'가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의 원천으로 삼으려 했어요. 네버랜드를 떠나게 하는 약점이 아닌, 네버랜드를 정복할 수 있는 힘이 되도록 말이죠. 우리의 '웬디'는 강하고, 거침없고, 용감하고, 심오한 지혜와 자신의 신념에 흔들림 없이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이에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아이들은 슬픔에 빠지고 이후 나이가 들기 시작합니다. 의심하기 때문인데요, 왜 슬픔이 의심의 기폭제가 되는 건가요.
어린 시절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아름다운 생각은 우리가 성장하면서 서서히 사라지게 돼요. 실패와 실망, 타협을 겪으며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잊어버리고,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되죠. 몸의 변화뿐만 아니라 희망을 잃었을 때 영혼의 침식으로 늙게 된다는 생각을 반영했어요.
네버랜드의 한편에는 정말 길을 잃어버려 정착한 후 늙어버린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그들이 머무는 공간도 모습과 행동도 매우 인상적인데요, 어떤 은유로 보입니다.
노인들이 머물던 곳은 실제 있는 장소예요. 몬트세라트가 폭발했을 때 먼지에 묻혔던 플리머스라는 도시로 3~4층짜리 건물만을 볼 수 있어요. 시간 속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포착하고 싶었는데 이 도시는 그걸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건물로 들어가면 1995년에 있었던 모든 것들을 전부 볼 수 있는데요. 시간이 멈춰버린 ‘피터’의 찬란한 모습 대신에, 이 노인들과 함께 부식되고 회색에 먼지투성이 같은 이 세상의 느낌을 완벽하게 표현하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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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버린 사람들은 다시 젊어지기 위해 ‘어머니’를 낚아서 먹으려고 합니다. ‘어머니’는 피터를 비롯한 아이들이 영원히 아이로 존재하게끔 하는 원천인데요. 바다 생명체로 보입니다.
'어머니’는 탱크에서의 촬영을 위해 미니어처로, 동시에 배우들이 상호작용하도록 실물 버전으로 제작했어요. 제이슨 해머의 미니어처 제작팀과 재스퍼 키드가 이끄는 VFX 전문가들에 의해 탄생했죠. 관객들이 어머니의 존재를 믿길 원했기 때문에 그 정도로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었죠. 어머니는 유기적이고 유동적이어야 했고, 그래서 물고기 형태로 ‘블롭피쉬(blob fish, 심해어) 같은 부드러운 얼굴로 만들었습니다.
유난히 물속에서 잠수하는 장면이 많습니다. 피터와 웬디가 ‘날 수 있다’고 과감히 뛰어내린 곳도 바다고요, ‘물’이 지닌 메타포는요.
우린 영화 속에서 모든 혼돈을 끌어안고 싶었고, 물처럼 혼돈을 일으키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죠. 물 위 혹은 그 아래에서 촬영할 때 영화는 항상 물의 자비로움 안에 있었답니다. 물은 그 자체로 영화 안에서 자연스러움과 모험을 창조하고, (우리가) 항상 애썼던 부분인 현실감을 선사하죠. 비현실적인 소재들을 현실적으로 표현해내고 싶었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하늘을 나는 장면을 대체하기 위해 바다속에서 헤엄치는 장면들을 넣었어요. 현실적인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죠. (웃음)
후반부 피터의 지휘(?) 아래 아이와 노인들 할 것 없이 다 같이 합창을 하는 장면은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데요.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웃음)
합창 장면은 가장 찍기 어려운 장면 중 하나였어요. 그 장소는 조류 지점 웅덩이에 있는 산호 바위라 모든 것이 면도기처럼 날카로웠거든요. 우리는 보트를 타고 도착했고, 아이들과 일부 어른들은 스턴트팀의 도움을 받아 움직였죠. 다행히, 아무도 안 다쳤어요.
우린 영화 속 캐릭터만큼 야성적인 아이들을 캐스팅하고 싶었어요. 연기 오디션을 보는 아이들이 아니라 피터팬과 함께 도망치는 아이들이기를 바랐거든요. 덕분에 촬영장에서는 엄청난(?) 혼란이 발생했지만, (웃음) 야성의 에너지를 포착하고 촬영장의 즐거운 분위기를 유지하려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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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당나귀를 아주 좋아해서요, ‘피터’의 친구였으나 늙어서 무리로부터 버림받은 ‘버조’가 당나귀 ‘재팬’과 함께 다니잖아요. 그래서 매우 반가웠답니다. 동물 중 당나귀인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몬트세라트에서 화산재가 쌓인 들판에 뛰어다니는 당나귀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화산이 폭발했을 때 사람들은 살아남은 난폭해진 동물들을 길들였다는데… ‘재팬’은 꽤 온순했어요. 그가 아마 모든 출연진 중 가장 말을 잘 들었을 거예요. 하하
<웬디>에서 관객이 집중했으면 하는 지점이 있다면 짚어주세요.
<웬디>를 통해 어른들이 (자신이) 성장하면서 들었던 이야기에 의문을 품게 만들고 싶었어요. 젊음이 인생에서 가장 거칠고 자유롭다거나 강인함과 에너지의 정점이라는 생각 말이죠. 이런 관념은 항상 ‘피터’의 신화에 내재돼 왔는데요. 우린 어른과 아이 모두를 통제되지 않은 자유로움으로 이끄는 영화를 만드는 동시에 이런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어요. 이로써 우리가 종종 젊은이에게만 부여했던 희망과 놀라움으로 ‘나이 듦’(노화)을 바라보길 바랐습니다.
감독님께 <웬디>는 어떤 의미를 지닌 작품인가요.
영화를 촬영하면서 32살에서 38살이 되는, ‘나이 듦’의 과정을 거쳤어요. (웃음) 내 커리어를 걸고 이 영화를 만들며 스스로에게도 나이 듦이라는 것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관객에게 한마디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영화를 응원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영화를 만든 7년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난과 모험이었어요. 게다가 팬데믹 상황으로 거의 개봉하지 못 할 뻔했어요. <웬디>가 다시 자유와 활기를 찾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라며 극장을 살리기 위해 애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진제공_영화사 진진
2021년 6월 23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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