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이승준 감독의 이름을 대중에 크게 알린 건 세월호 당시 영상을 조합한 단편 다큐멘터리 <부재의 기억>(2018)이다. 2020년 열린 제92회 미국 아카데미시상식 후보에 오르면서 언론의 큰 관심을 받았다. 시청각 중복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2012)은 업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IDFA)에서 대상을 받으며 그의 대표 경력이 됐다. 기획, 제작, 촬영, 후반 작업 전반을 오롯이 책임지는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이 국내외에서 이만큼 꾸준한 성과를 내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극영화를 기반으로 한 상업 영화 중심 시장에서 다큐멘터리는 독립영화만큼이나 척박한 필드인 까닭이다. 규모도, 지원도 녹록지 않은 여건에서도 자신에게 와 닿는 이야기를 타인에게도 가 닿도록 전달하는 분명한 힘은 어떻게 피어날까. <부재의 기억>과 <달팽이의 별> 두 편을 모두 보지 못한 관객에게는 그 실마리를 가늠해볼 만한 새로운 작품의 관람 기회가 찾아왔다. 27일(수) 개봉한 이승준 감독의 신작 <그림자꽃>이다.
<그림자꽃>은 북한으로의 송환을 원하는 탈북자 김련희 씨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미 6년 전 한 일간지의 대대적인 보도로 유명해진 그의 이야기에 무언가 새로운 지점이 있을까. 평양에 살던 중산층, 간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중국에 살던 친척 집을 방문, 치료비가 부족하자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브로커의 말을 믿고 탈북 감행, 남한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돌려보내 달라’고 호소… 분단 시절의 논리에 익숙해진 우리 귀에는 의심스러울 법한 이야기를 마주한 이승준 감독은 그를 돕겠다든가, 무언가를 증명하겠다는 태도 없이 그저 김련희 씨의 지난 6년을 기록했다. 카메라와 주인공의 간격은 건조하다 싶을 만큼 거리감을 두고, 연출의 온기는 냉랭하지는 않을 정도의 냉담함으로만 유지된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이 질문할 여지를 완전히 허용해둔 작품의 객관적인 태도와 자신의 시선이 ‘동일하다’고 느낄 때, 관객은 합당한 수준에서 김련희 씨의 사건을 이해하게 된다. 평범한 관객이 남편과 딸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평양 아줌마’의 사연에서 기구한 개인의 아픔을 발견하게 될 때, ‘기록하는 자’ 이승준 감독의 진가가 드러난다.
김련희 씨는 법적으로는 남한 사람이지만 정체성으로는 ‘평양 시민’을 주장하는 인물이다. 그의 기구한 사연을 어떻게 알고 카케라에 담게 됐나.
2015년 7월 한겨레가 김련희 씨를 다룬 신문 1면 기사를 봤다. 깜짝 놀랐다. “나의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사회에서 터부시하는 표현으로 헤드라인을 썼고, 얼굴 사진도 블러 처리가 안 돼 있더라. 이 사람 뭐지? 싶었다. 그렇게 내가 알던 탈북자의 전형과는 전혀 다른 김련희 씨를 알게 됐다. 2015년 8월 중순에 김련희 씨를 처음 만났다.
지난 필모그래피는 <달팽이의 별>(2012) <달에 부는 바람>(2014) 등 휴머니즘에 기반한 작품이다. 그러다가 세월호 당시 영상으로 만든 <부재의 기억>으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남북문제에 관한 작품은 <그림자꽃>이 처음인데.
어머니가 이산가족이시고, 10대 때 피치 못할 사정으로 혼자 내려오셨기 때문에 남북문제에 대한 관심이 늘 있어왔다. 분단이라는 소재가 대한민국 사회를 뒤흔든 일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에 관련된 다큐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또 해외에서 열리는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돌아다니다 보면 해외 감독이 북한에 들어가 촬영한 작품을 심심치 않게 만나는데, 대부분은 체제를 조롱하고 사람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려 놓은 비슷한 작품들이다. 또 그런 작품의 관객 반응이 상당히 좋다. 그런데 난 분단 당사국의 국민으로서 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왜 저런 이야기밖에 못 하지? 그러던 차에 김련희 씨를 만난 거다. 내가 유일하게 접촉할 수 있는 북한 사람.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물이라고도 한다. 지난 경험치, 성격, 갈등까지 관객의 관심을 끌 만한 영화적 소재가 모두 그 인물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김련희 씨가 당신 작품의 주인공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했나.
다큐 스토리를 만들 때 교과서적인 규칙들이 있다. 주인공이 있고, 그가 처한 명쾌한 갈등이 있고, 그걸 풀려는 엄청난 의지를 갖고 있으나 잘 풀리지 않는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서사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 한 개인을 다루는 휴먼 다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좀 거창하게 말해보자면 그를 통해 이 사회를 반추해볼 수도 있는 큰 이야기였다. 그런 여러 면이 맞아떨어졌다.
김련희 씨의 남편은 김책공업대학에서 의사 일을 한다. 그의 가족은 평양 시민으로서 북한에서 평균 이상의 삶을 누렸을 거로 보인다. 김련희 씨는 간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중국의 친척 집에 머물다가 치료비를 벌기 위해 탈북을 감행해 남한으로 왔다고 한다. 작품을 본 관객에게는 그의 행적에 관한 몇 가지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 남지만, 영화는 지난 그의 행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큰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더라.
이 작품이 무언가를 ‘증명’하는 영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뉴스타파처럼 저널리즘으로 접근해서 이 여자가 남한에 온 데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밝혀내고 그가 이곳에 온 게 잘못됐다는 식의 이야기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주된 줄기는 아니다. 이미 법원에서 김련희 씨가 남한에 들어온 뒤 이러저러한 문제점이 있었던 건 사실인 것 같다고 짚었기 때문에 그 부분을 깊게 파고들지는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또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믿지 않을 사람은 안 믿을 거라는 판단도 있었고. 과거의 얘기보다는 빨리 현재로 넘어와서 김련희 씨의 갈등과 꿈, 욕망을 따라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게 우선이었다.
(기자 주: 2015년 7월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김련희 씨는 2011년 9월 남한에 들어와 공개적으로 북한 송환을 주장하다가 2014년 7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됐다. 그해 12월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을 선고받았지만 항소했고, 2015년 4월 대구고등법원이 징역 3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징역형은 면했다.
참고 기사 :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98828.html )
촬영하면서 의문이 들지는 않던가.
술 한 잔 먹으면서 물었지. 한국 가서 두세 달 일하고 돌아갈 수 있다는 거, 진짜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고. 그런데 그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건 모두 우리 기준이더라. 북한은 우리와는 정보량이 다르다. 특히 김련희 씨는 평양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살았기 때문에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고 봐야 한다. 우리로 치면 부촌에 살면서 정치에는 관심 없고 갤러리를 다니며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는 아줌마 같은 거다. 김련희 씨는 남편이 의사고, 친어머니도 의사셨다. 아버지는 은퇴하셨지만 TV 공장에서 높은 직급이셨다. 본인도 그런 얘기를 하더라.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그렇게까지 어렵게 살지는 않았다고. 아마 함경도 어딘가에 살았으면 탈북자 관련 소식이 많이 돌기 때문에 상황을 알았을 수 있었지만, 김련희 씨는 (그런 정보와는 단절된 곳에 살다가) 중국에서 브로커를 만나고 (그제야) 탈북자들의 존재를 알게 된 거다. 남한에서 두세 달 있다가 북한으로 돌아갈 거라고 하니 (탈북하기 위해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웃었다고 한다. 그건 불가능하다면서. 그때야 뭔가 이상한 걸 알았지만 뒤늦게 중국 공안에 잡히거나 말도 안 통하는 태국에서 범죄인 취급을 받느니 그래도 한민족인 남쪽에서 사정을 얘기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고 한다. 가족이 북에 있고, 내가 무슨 해를 끼친 것도 아니니 돌려보내 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했다는 거다. 나도 처음에는 ‘무슨 그런 순진한 생각을…’ 싶었지만, 북한 사람들이 그런 면이 있다. 순하고, 순진하다.
여전히 평양에 살고 있는 김련희 씨 가족을 실제 촬영했더라. 우리나라 국적자는 북한에 들어갈 수 없고 촬영도 불가능할 텐데 어떻게 작업한 건가.
영화제를 돌아다니다가 친해진 핀란드 감독이 있다. 촬영감독 출신 연출자인데 사람을 대하는 태도라든가 여러 가지 것들이 나와 결이 맞아 신뢰감을 주는 사람이다. 저 친구라면 북한 당국의 통제(라는 제한적인 촬영 여건)를 쿨하게 받아들이고 굉장히 민감한 이 이슈를 촬영해올 수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촬영 때문에 금강산을 가본 적 있어서 그곳 상황이 어떤지 알고 있다고,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하더라.
북한에서는 당국이 허가한 촬영만 진행되는 거로 안다. 누구를 통해 어떻게 촬영 허가를 받았나.
재미교포 기자를 통해 도움을 받았다. 내가 김련희 씨 가족을 인터뷰하고 일상도 찍고 싶다고 하니 도와주겠다고 하더라. 그쪽에서 미디어 활동을 하려면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절차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허가를 받는 데만 1년이 걸렸다. ‘어떻게 됐냐’ 물으면 ‘얘기는 해뒀다’고 하는데… 중간에 정보의 오류도 있었고. 결국 촬영도 두 번이나 했다. 2016년 겨울, 2017년 가을.
북한에서 이 촬영을 허가했다는 게 놀라운데.
북한에서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이미 CNN, BBC도 모두 김련희 씨 이야기를 다룬 바 있으니까. ‘남한에 자기네 국민이 억류돼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인데 우리 촬영을 반대할 이유가 없는 거지.
김련희 씨의 남편이 일하는 모습, 딸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 그들끼리 모여 식사하는 모습 등 일상적인 장면이 카메라에 담기면서 김련희 씨가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평양 시민’이라는 이미지를 넘어 ‘남편과 딸을 만나고 싶어 하는 평양 아줌마’로 보여지기 시작한다. 애가 타게 가족을 그리워하는 그의 눈물에 마음이 아파지는 순간도 온다.
김련희 씨도 그러더라. 자기가 언론에 많이 노출되면서 도와주는 사람이나 시민단체가 많이 생겼고 덕분에 기자들이 주목해주면서 사람들에게 사연을 알릴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투사로 그려주지는 말아 달라고. 자기 정체성은 평양에서 온, 가족을 보고 싶어 하는 아줌마라고. 그건 찍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김련희 씨가 그렇게 말해줘서 오히려 고마웠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액티비즘 관점에서 접근하지는 않는다.
다큐멘터리로 사회운동을 할 생각은 없다는 의미인가.
액티비즘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좀 다를 수 있겠지만 통상적으로 한국에서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사회 운동과 맞물려 진행돼 온 전통이 있다. 독립 다큐멘터리 영역이 특히 그렇다. 나는 그런 전통을 기반으로 일을 시작한 건 아니다. 내 백그라운드는 방송 일이었으니까.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고 그게 동시에 사회 운동과 같이 가는 건 아니라는 거다. 다만 한 작품을 만듦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움직임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은 한다. 그건 다큐멘터리라는 형태가 지닌 숙명적 속성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사회에 관심이 많고 또 항상 이 사회가 바르게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걸 불가능하게 하는 것들에 문제를 제기하고 질문은 하지만, 그런 성향과 액티비즘은 좀 다른 거라고 본다.
그래서인지 작품의 방향성이 김련희 씨를 대단히 응원하거나, 지지하는 방향은 전혀 아니더라. 오히려 지나치게 냉담하고 건조한 온도를 유지해 놀랐다. 예컨대 남한과 북한의 아이스하키 경기가 열리는 평창을 찾아간 김련희 씨가 국정원(혹은 경찰)의 강력한 방어에 부딪혀 길바닥에 ‘철퍼덕’ 넘어졌을 때도 카메라는 그 모습을 찍고만 있더라.
김련희 씨 입장에서는 눈앞에서 고향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하니 만나서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북한에 돌아갈 수 있게 얘기 좀 잘해 달라고. 또 손도 한번 만지고 싶었을 거고. 그런데 (그게 불가능하다 보니) 그런 그림이 만들어졌다. 급박하게 잡힌 일정이라 조감독도, 스태프도 없이 나 혼자 카메라 들고 차 끌고 갔는데 아, 그때 정말 욕먹으면서 촬영하느라 애먹었다. (김련희 씨를 방어하는 국정원, 경찰 쪽에서) 나더러 ‘너 대체 누구냐’고.(웃음) 그날 이후로 나도 아주 유명해졌다.
다큐멘터리스트로서 대상에 대한 철저한 거리감을 잘 유지했다는 인상이다.
그 거리감은 내게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다. 늘 그렇게 일했고 앞으로도 그 거리감을 계속 지켜갈 거다. 그것만이 주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의도적으로 냉정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있어야 할 위치는 카메라 뒤라고 생각한다. 내 촬영 대상이 될 주인공들에게 술 한잔 마시면서 대놓고 얘기할 때도 있다. “도와드리지는 않습니다”라고. 촬영 전에는 충분히 관계를 쌓되 촬영이 시작된 이후에는 (내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합의를 마치고 작업에 들어간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기록을 하는 게 중요하다. 어떤 면에서는 좀 잔인하기도 한데, 난 그런 감정을 못 견뎌 하는 편은 아니다. 어떤 다큐멘터리 감독님들은 ‘그렇게 거리를 두는 건 아닌 것 같다’고도 하신다. 무언가를 보여주는 방식이 서로 다른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다른 다큐멘터리 감독들과 자주 교류하는 편인가. 필드가 워낙 척박한 편이다 보니 서로 가깝게 지내며 정보를 교류하고 작업에 도움을 주고받는 경우도 많은 거로 안다.
그렇지는 않다. ‘샤이’하다 보니…(웃음) 모임이나 조직을 만드는 걸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혼자 일한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런가 보다. 다큐를 처음 시작할 땐 그런 모임에 굉장히 목말랐다. 돌아가신 이성규 감독이 방송 다큐하던 시절의 내 사수였는데, 그를 처음 만난 것도 온라인 동호회였다. 마음속 뜨거움을 풀기 위해 어디든 계속 찾아다녔다. 지금에 와서는 젊은 감독들과 어떻게 교류하면 좋을지 내 나름의 방식을 고민하고 생각해보는 것 같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라든가 각종 피칭 행사장에서 일로서 연결되고 교류하는 쪽이다.
‘샤이’하다는 표현은 의외다. <부재의 기억>으로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뒤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 음성에 어떤 확신이 들어차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연히, 트레이닝된 거다.(웃음) 어릴 때부터 나서는 걸 안 좋아했다. 단적으로는 중, 고등학교 때도 앞문으로 다닌 적이 없다. 아마 앉아 있는 애들은 전혀 신경 안 쓸 텐데 나만 (누가 주목한다는 느낌이) 불편했다.
앞으로의 작업은 어떻게 되나.
일단 기획을 마치고 이미 촬영에 들어간 작품이 있다. 또 하나는 1년 전부터 조금씩 준비했던 건데, 인혁당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을 토해내야 하는 기구한 상황을 다룰 예정이다. 쉽게 말하면 국정원이 원고가 돼 ‘법원이 돈을 너무 많이 줬으니 일부는 뱉어내라’는 것이다. 뱉어내지 않으면 이자가 붙는데, 지난달에 돌아가신 한 어르신은 매일 37만원 씩 이자가 붙었다. 무고하게 고문을 받은 사람이 뒤늦게 무죄를 받았는데, 집이 경매에 부쳐지는 일까지 생겼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현실이 이 사람들을 두 번 고문한 거다. 그리고,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슈도 있다. 계획대로라면 내년 상반기 중에 공개된다. 정치적인 이야기다.
예비 관객인 나로서는 무척 흥미진진한 소재인데, 일하는 당신으로서는 너무… 많은 것 아닌가.(웃음) <그림자꽃>과 <부재의 기억>도 작업 기간이 겹치는 거로 안다. 수백, 수천 시간에 달하는 촬영본을 펼쳐 놓고 붙였다 뗐다 편집하는 다큐 제작 과정 자체가 ‘중노동’이라고들 하는데, 이 정도 일을 한번에 소화하는 게 힘에 부치지 않나.
사실, 그때 죽는 줄 알았다. 엄청 바빴다.(웃음) <그림자꽃>은 2015년 8월에 시작했고 <부재의 기억>은 2017년 초부터 만들었다. 올림픽 공식 기록 영화 <크로싱 비욘드> 작업도 2017년 가을부터였다. <부재의 기억>을 2018년 9월 해외 영화제에서 처음 오픈했고,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크로싱 비욘드>를 공개했다. <그림자꽃>은 이제 선보인다. 동시에 뭘 진행하는 게 쉽지 않다. 내 작품을 한 편 하면 먹고살기 위한 작업도 해야 한다. 그래야 생활이 해결되니까. 보통 이렇게 번갈아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는 무게감이 거의 비슷한 작품들이 몰렸다. 2017년 가을부터 2018년 여름까지는 거의… (고개를 저으며) 가정생활은 조금…(웃음)
이번 작업도 그런 식으로 진행할 건가!(웃음)
이제 좀 적당히 하자, 싶다. 눈 딱 감고 며칠은 휴대폰도 끄고 가족들과 어디라도 갔다 오자는 마음이다. 다녀오면 어떤 식으로든 다 해결은 될 테고, 어쨌든 굴러갈 건 가게 돼 있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마지막 질문이다. 숨도 돌릴 틈 없이 바빴던 지난 시간부터 현재까지, 소소한 행복을 느꼈던 때가 있다면.
집에 고양이가 있거든.(웃음) 고양이가 와이프, 딸, 나 중에 나를 제일 무서워한다. 그런데도 가끔 내가 아침 운동을 하고 있으면 와서 박치기를 한다. 고양이들은 그게 친근함을 표현하는 거거든. 그럼 내가 묻지. “내가 그렇게 괴롭혀도 좋냐?”(웃음) 소소한 행복이다.
사진_이종훈 실장(스튜디오 레일라)
2021년 11월 1일 월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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