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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책맞게 터진 눈물, 그 여운이 아주 오래갈 것 같다” <왕과 사는 남자> 유해진 배우
2026년 2월 3일 화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단종이 '나도 이제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 그 안에 나도 있냐 묻자 '왜 안 그렇겠습니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때부터 주책맞게 눈물이 터졌다. 이야기가 가벼운 슬픔이 아니라서 그런지 감정이 아주 오래 남을 것 같다. 좋은 작업이었다."

배우 유해진이 역사 속에 단 한 줄로 기록된 인물 ‘엄흥도’로 돌아왔다. 익숙한 단종의 비극 이면에 숨겨진 인간적인 유대와 우정을 그린 <왕과 사는 남자>는 2030 타깃에 치중된 요즘 영화 시장에서 전 세대를 아우르는 따뜻한 힘을 발휘한다. 유해진은 <올빼미>의 왕에서 다시 촌부로 내려와, 비운의 왕 곁을 묵묵히 지키는 애비의 마음을 스크린에 오롯이 담아냈다. 그는 ‘단종’ 박지훈과의 강렬한 호흡부터 장항준 감독과의 유쾌한 뒷이야기까지, 작품에 담긴 모든 진심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행간을 채우기 위해 마지막까지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그에게서 꾸미지 않은 배우의 얼굴을 본다. 매 작품 칼을 가는 심정으로 치열하게 임하면서도, 스스로를 향해서는 그저 담백하고 소박한 한마디를 되뇌일 뿐이다. “잘하자.” 그 짧고도 단단한 주문이 오늘의 유해진을 여전히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게 한다.

완성된 영화를 보며 실제로 울었다고.
많이 울었다. 지훈이도 울고, 나도 울고. ‘엄흥도’가 관하에 고발하겠다고 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장면 있지 않나. 단종이 ‘나는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그 안에 엄흥도가 당연히 있다고 하는데, 거기서부터 눈물이 나오더라. 완성본을 처음 보기도 했고, 또 이야기 자체가 가볍게 소비되는 슬픔이 아니기에 이 감정이 오래 갈 것 같다. 시간이 지나도 남을 것 같은 작업이었다.

단종 서사는 널리 알려진 역사이고 그간 여러 곳에서 다뤄줘서 그리 특별한 사건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특별하게 다가간 이유는.
말씀대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유배를 간 그가 유배지에서 어떻게 살았을지, 마지막 곁에 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상상력이 곁들여졌지만, 역사에 나오지 않은 부분을 그렸다는 점에 마음이 갔다.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그 곁을 지킨 사람과의 우정을 이야기 중심에 두고 있는 점 역시 좋았다. 또 요즈음 20~30대를 타깃으로 한 영화들이 많은데, <왕과 사는 남자>는 그 전후 세대까지도 좋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넓은 세대가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엄흥도라는 인물은 역사에 짧게 언급만 된 정도로 알려진 바가 없는 인물이다. 준비하면서 쉽지 않았겠다.
후배에게 듣기로, ‘엄흥도’라는 분은 엄씨 가문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모시는 분이라고 하더라. 끝까지 어린 왕의 곁을 지켰고, 단종 사후 숨어 지냈고 그 자손들도 숨어서 살았다고 하더라. 실제 역사에는 단 한 줄로 표현되어 있는 부분이라, 이런 훌륭한 분께 누가 되지 않을까 싶은 거지. 초중반부터 쭉 무겁게 가면, 결말에 이르기 전에 지칠 수 있어서, 초반부 재미의 요소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게 자칫 희화화로 보일 수 있어서 상당히 조심하면서 만들었다. 장항준 감독님과 계속 이야기하며 웃음의 선을 지키려 노력했었다. ‘이 정도의 웃음은 이해해 주지 않을까’ 하며 가벼움의 수위 조절을 계속 염두에 뒀던 것 같다.

연기를 원체 잘하지만, 이번 청룡포 촌장 ‘엄흥도’는 정말 조선시대에서 튀어나온 듯한 리얼함 그 자체였다. 영화 <올빼미>에서는 왕이었다가 이번에는 촌부까지, 매번 새로운 얼굴을 보인다.
자세히 보면 똑같다. (웃음) 옷하고 역할만 달라졌을 뿐이다. 나라는 걸 숨기고 싶지도 않다. 다만 노력하는 부분은 그 이야기 속에 녹아 있으면 한다. 그 방법은… 말로 잘 설명하기 힘들지만, 걸리는 씬이 있으면 계속해서 그 상황을 그려보고 되새긴다. 사실 대사를 잘 못 외울 때도 있는데, 그래서 오히려 마지막까지 대본을 붙잡고 있다 보면 좋은 게 튀어나오곤 하는 것 같다. 이게 그 이야기 속에 잘 있냐, 조금 불편하게 있냐의 차이인 것 같다. 만약 불편하게 있다면 연기를 못한 거다. ‘(그냥) 유해진인데 어색하진 않은 것 같아’라는 소리가 나오면 되는 것 같다. 작품마다 작은 목표는 ‘씬의 대사를 내 걸로 하자’이다. 이게 쌓이면서 ‘유해진이 뭘 하려는지 알겠다’하고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 같다.

특히 호랑이와 맞닥뜨리는 씬은 허공에 대고 연기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씬의 준비는 어떻게 하는지.
앞에 호랑이가 진짜 있으면 그렇게 연기하지 못하지! (웃음) 특별히 준비한 건 없었다. 그 장면도 그렇고 청룡포에서의 장면들은 방해받지 않고 촬영에만 몰입할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다. 장소 자체가 너무 좋았다. 그곳까지 분장차가 들어가지 못해서, 분장 받고 약 2km 되는 거리를 지훈과 함께 걸어 다녔었다. 그러면서 더 돈독해진 부분이 크다. 지훈은 단종처럼 진지하고 묵직함이 있는 친구더라. 물론 그 나이 또래의 발랄함도 있지만, 참 괜찮은 청년이다. 서로 간에 감정의 마일리지가 쌓인 시간이었다. 마치 단종이 유배 와서 엄흥도와 가까워진 과정처럼, 지훈이가 내가 친해져 가는 순간들이었다.

초반 대사 치는 게 정말 맛깔스럽더라. 이웃 동네인 ‘노루골 촌장’(안재홍)과의 티키타카도 재미있더라. 안재홍은 제2의 유해진 같다는 의견도!
안재홍은 (내) 수제자가 아니라 이미 너무 자기 길을 잘 가고 있는 좋은 배우다. 후배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친구를 보면서 자극받는 부분이 있다. 함께하면서 내가 고여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하는 등 새로운 자극이 된다. 안주하지 말아야겠다고 스스로 독려하게 된다.

애드립도 많았다고.
대본에 있던 걸 살린 것도 있고 없던 걸 만든 부분도 있는데, 이번에 흡족한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다. 과거 회상에 들어가면서, 단종이 손으로 물을 튀기고 이를 멀리서 바라보는 엄흥도의 모습인데, 이건 내가 요청해서 찍은 장면이다. 어디에 쓸지 몰랐는데 감독님이 마침 제 자리에 넣은 것 같다. 마지막에 삽입되어 그간의 서사가 리마인드 되면서 단종의 슬픈 서사를 확 깊게 하는 것 같다. 사실 이 장면은, 지훈이 촬영 중에 강가에서 손 씻고 있는 장면을 스탭 중 한 명이 찍어서 인스타에 올리면서부터다. 이 사진을 보고 실제 단종이라면, 물가에서 한양을 그리워하며 손으로 물장구쳤을 것 같았고, 이를 멀리서 보고 있는 엄흥도를 찍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부모의 마음으로 지켜보는 엄흥도 말이다. 처음에는 모시는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 나중에는 안쓰러운 자식을 대하는 애비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단종 ‘이홍위’를 연기한 박지훈의 눈빛 연기가 정말 좋더라. 그 눈빛만 봐도 감정이 올라왔다고.
주로 감정 씬에서 그랬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눈이 마주치는데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해졌었다. ‘저 어린 사람이…’ 이런 마음이 들면서 배우 박지훈이 아닌 어린 단종으로 다가오더라. 특히 후반부 감정씬은 거의 매번 이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박지훈과는 첫 호흡 아닌가. 처음 캐스팅 소식을 듣고는 어땠나.
처음에는 약간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통통한 친구가 와서 인사하는데 속으로 ‘저러면 안 되는데…’ 하기도. 지훈이가 나온 <약한 영웅> 시리즈를 보지 않아서 잘 몰랐을 때다. 그런데 막상 촬영 들어가니 반쪽이 돼서 왔더라. 15kg을 뺐다는데, 촬영장에서 잘 먹지도 못했다. 내가 ‘조절하더라도 조금씩 먹으면서 해야 한다’고 일부러 밥차에 데리고 가서 먹여도 겨우 넘기는 등 여튼 고생 많이 했다. 절벽에서 엄흥도와 마주하는 장면, 엄흥도의 아들 ‘태산’(김민)이 곤장 맞을 때 ‘한명회’(유지태) 한테 내지르는 장면 등 발성도 그렇고 그 에너지에 놀랐던 것 같다. 알고 보니 아역 배우 출신이라 하길래 누구 말처럼 내공이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표현이 가볍지 않고 진솔하다. 이 진솔함은 박지훈이라는 사람 자체에서 나오는 것 같다.

단종의 마지막을 담은 장면에서는 정말이지 감정이 격해지던데,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는다면.
나 역시 마지막 장면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가장 신경 써서 찍은 장면이기도 하다. 어떤 계산보다 마음만 가져가려고 했었다. 미리 동선을 맞추기보다, 그 안에서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었다. 그래서 카메라도 두 세대 배치해서 내 감정을 최대한 해치지 않으며 잡아내고 촬영팀이 각별히 신경을 써 줬었다.

이번에 대중적으로 듣고 싶은 평이 있다면. 또 이 영화가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는지.
어느 기자 분이 웃음과 슬픔의 감정의 폭이 넓다고 하셨는데, 이 말을 듣고 내 의도가 전달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고, 다행이다 싶었다. 사실 모든 작품에서 (나름) 칼을 갈고 가지만, (웃음) 특히 <왕과 사는 남자>가 그렇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좋았던 부분은, 한 인간이 다시 삶의 의지를 되살렸다는 지점이다. 나약하게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백성과의 교류를 통해서 다시 꿈을 펼쳐 보기로 했다는 점이다. 관객분들도 저마다의 울림 포인트가 다르지 않을까 한다.

장항준 감독과는 첫 작업인데, 왠지 현장에서 소통이 잘 됐을 것 같다. (웃음)
가벼워서 좋았다. 너무 엄격하고 진지하면 무슨 이야기를 꺼내기 힘든데, 긍정적으로 가벼워서 어떤 걸 제시하기가 수월했다. (웃음) 작업할 때 감독님과 교류하는 걸 좋아하는데, 장항준 감독은 개인적으로 친구기도 해서, 필터가 덜하게 이야기하는 편이었다. 할까 말까 하다가 해버리자, 이렇게 해서 좋은 걸 건지기도 했었다. 이번에 특히 놀란 건, 글을 참 잘 쓴다는 거였다.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거나 하면 ‘이틀만 시간 줘’ 이러길래 처음에는 다른 작가님께 부탁해서 수정해 오는 줄 알았는데, 직접 다 고쳐서 온 거였더라. 수정해 와서는 ‘어때? 죽이지 않아?’ 이러면서 또 엄청 가볍게 애기하고. 여튼 생각이 약간 남다른 것 같다.

<왕의 남자>(2005) 이준익 감독이 VIP 시사회에 와서 좋은 말씀 해주셨다고.
<올빼미> 때도 좋은 말씀 해주셨었다. ‘해진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게 너무 좋다’고 하시는데 정말 늘 고마우시다. 특히 이번에는 뜻깊고 감사한 자리였다. <왕의 남자>는 지금의 <왕과 사는 남자>를 찍을 수 있게 해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 밑바탕이 된 작품의 감독님, 그리고 함께했던 주연 배우인 (정) 진영 형님이 오셔서 정말 각별했다.

코로나 이후 참여 영화 6편 중 지난해 개봉한 <소주전쟁>을 제외하고는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이번 작품의 흥행 부담감은 어떤가.
부담감은 늘 있다. 예전에는 제작비가 큰 작품에 들어간다고 하면 좋아했었다. 왜냐하면 그만큼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넓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인데, 요즘에는 겁이 난다. (웃음) 본전을 뽑을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서는 거지. 손익분기만 넘기면 좋겠다는 게 제일 큰 바람이다. <왕과 사는 남자>는 타깃 층이 넓다 보니, 많은 분이 봐주셨으면, 그래서 손익분기를 넘겼으면 하는 소망이다.

지난 20년 동안 조연에서 주연으로, 믿고 보는 배우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하지 않았나. 이토록 생존, 즉 롱런할 수 있는 이유는 무얼까. (웃음)
내가 생존하고 싶다고 해서 생존하는 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다만 감독, 제작자들과 같이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서로 도우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있다. 계속 아이디어를 내고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서가 아닐까 한다.

28년 차 배우로서, 이건 만은 꼭 지킨다는 신조나 철칙이 있다면. 또 지금의 자신에게 하고 싶은 한마디는?
신조나 가치관은… 잘 모르겠다. 그냥 행복한 건 햇빛 좋은 날 현장에서 행복하게 작업하고 끝나고 소주 한잔하는 시간이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은 ‘잘하자!’ 이다.



사진제공. ㈜ 쇼박스


2026년 2월 3일 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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