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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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준 감독이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필모그래피의 새로운 정점을 찍을 준비를 마쳤다. 이 영화는 조선의 제6대 왕 단종(이홍위)이 유배지 영월에서 그를 보필하게 된 촌장 ‘엄흥도’(유해진)와 함께 보낸 마지막 시간을 그린 작품이다. 장 감독은 “성공한 불의는 인정받고 실현되지 못한 정의는 잊히는 게 당연한가”라는 통렬한 질문을 던지며, 이 작품을 통해 결과에 상관없이 신념을 지킨 이들의 존엄을 조명하고자 했다. 그는 “시사회에서 관객들이 함께 울고 웃는 모습을 보며 설레임을 느꼈다”며, “맛있는 걸 먹으면 가족이 생각나듯 개봉 후 꼭 가족과 함께 보고 싶은 영화”라고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역사적 비극을 다루면서도 그 이면의 인간적인 ‘정’에 집중한 이 작품은, 익숙한 역사를 낯선 시선으로 비추며 장항준식 휴머니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비극적인 역사를 다루면서도 슬픔을 창호지 문 너머의 시선으로 담아낸 장항준 감독을 만났다.
◆ 비극적 결말을 밀어붙인, <서울의 봄>이 준 용기, 그리고 ‘정(情)’의 서사
“사실 처음에는 이 작품을 맡지 않으려 했다”고 이제서야 털어놓는 장항준 감독이다. 실화 기반이라 결말이 정해져 있고, 그 끝이 결코 밝은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 감독은 한때 ‘결말을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하며 타란티노 감독의 방식처럼 역사를 뒤트는 설정을 구상해 보기도 했지만, 현실적인 제약이 컸다. 이렇게 고민하던 그의 마음을 돌린 것은 영화 <서울의 봄>이었다. 모두가 그 비극적인 결과를 아는, 현대사의 비극임에도 관객을 몰입시키는 힘을 보며 용기를 얻었다. 김성수 감독에게 ‘형, <서울의 봄> 덕분에 이 영화를 밀어붙인 거야’라고 말했을 정도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단종을 지키려다 희생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떠올렸다”고 말한다. 일병 하나를 구하기 위해 대원들이 하나둘 죽어가면서 '이 인물이 제발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길' 바랐던 것처럼, 단종 역시 구할 가치가 있는 인물임을 보여주는 것이 숙제였다. 장 감독은 실제 단종이 나약하다는 기록이 없으며 총명하고 활도 잘 쏘는 인물이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문종이 수양에게 사후 단종을 부탁했는데, 혹시 수양의 기질을 알았던 문종이 일부러 더 간곡히 부탁했던 건 아닐까 혼자 상상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역사 속의 '충(忠)'보다 인간 사이의 '정(情)'이 더 큰 개념이라고 보았다. 세속적이고 계산적이었던 엄흥도가 단종을 만나 변해가는 과정에 공을 들인 이유다. 장 감독은 흥도와 홍위는 하인과 상전으로 만나 점점 어른이 바뀌고, 나중에는 부자관계처럼 변한다. “충의 기록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정”으로 접근했다는 설명이다.
특히 쌀밥을 나눠 먹는 장면에 대해 “당시 쌀밥은 모든 것을 주는 행위와 같다”면서, “왕과 백성이 같은 레벨에서 밥을 먹으며 홍위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백성은 왕의 가치를 깨닫는 흐름을 설계했다”고 부연했다. 이를 위해 단종의 거처인 폐소의 창을 넓게 만들고 사방이 터진 위치를 선정해 왕과 민중이 공존하는 느낌을 극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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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의 축은 보이지 않아야 더 무섭다, 철저히 배제된 수양대군과 공간의 미학
영화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단종을 위협하는 수양대군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장 감독의 철저한 계산이었다. 그는 “진짜 악의 축은 안 보여야 더 무섭다. 한명회가 수양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고, 수양이 등장하는 순간 관객은 ‘배우’로 인식해 몰입이 깨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수양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장 감독. 극의 몰입을 위해 카메오 출연이나 오프닝 크레딧의 유명 배우 노출까지 지양했다.
공간 연출과 상징물에도 묵직한 의미를 심었다. 노루 사냥과 호랑이의 대비가 대표적이다. 유배지 영월에도 먹고사는 먹이사슬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 “권력의 중심인 한양은 아니지만, 그 시골에도 먹고사는 사슬은 존재한다” 또 “호랑이는 산중의 왕이라 일컫는데, 그렇다면 진짜 왕은 누구인가, 수양인가 아니면 물러난 단종인가”라는 질문을 담았다.
단종의 처소를 얕은 강을 사이에 두고 고립시킨 공간 배치도 흥미롭다. 첫 번째는 감금의 이유가 가장 컸다. 두 번째는 엄흥도의 도움으로 영혼은 생전 벗어나고 싶었던 폐소를 떠나갔고, 그 육체는 동강에 떠내려간다는 상징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 온탕과 냉탕 오가는 유해진, 그리고 단단한 박지훈의 재발견
<왕과 사는 남자>를 본 관객들 사이에는 공통된 의견이 하나 있다.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배우들의 압도적인 연기력에 모두가 극찬하기 바쁘다는 점이다. 캐릭터에 맞는 캐스팅은 감독의 역량이자 복이기도 한데, 유해진과 박지훈이라는 조합을 완성한 장항준 감독 역시 이번 캐스팅에 대해 높은 만족감을 표했다.
‘엄흥도’ 역의 유해진에 대해서는 “온탕과 냉탕을 자연스럽게 오가는 연기는 국내에서 몇 분 없을 것”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내는 장 감독. “송강호 선배가 대단하신 게 한 작품에서 온탕과 냉탕을 오가도 관객이 낯설지 않게 생각한다는 점인데, 유해진 씨도 이번에 그런 면모를 보여줬다”고 극찬했다. 초기 시나리오 속 흥도의 말투가 장 감독 자신과 비슷하다는 스태프들의 말에 놀라기도 했지만, 유해진은 이를 자신만의 풍성한 연기로 승화시켰다.
단종 역의 박지훈은 시리즈 <약한 영웅>의 눈빛에 반해 아이돌인 줄도 모른 채 발탁했다. 장 감독은 “배운데 아이돌을 했어?”라고 물었을 정도였다고. 나중에 그룹 ‘워너원’ 시절의 영상을 보고는 현장에서의 수줍고 묵직한 모습과 달라 놀라기도 했단다.
“지훈은 현장에서 들뜬 게 전혀 없고 기분이나 배고픔 상태조차 모를 정도로 진중하다. 스타가 돼도 변하지 않을 단단한 친구”라며 신뢰를 보였다. 특히 화제가 된 단종의 마지막 ‘물장구’ 신은 원래 대본에 없던 것이었다. 박지훈이 손을 씻는 모습을 스태프가 찍어 인스타에 올린 것을 보고 유해진이 제안해 추가 촬영했다. 장 감독은 “홍위의 최후를 본 다음이라 이 장면이 주는 비극성이 더 깊어졌다”며 유해진의 제안이 “신의 한 수”였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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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도 없는 곳에 세운 유배지, 고증과 아쉬움 사이의 비하인드
촬영지 선정 과정은 그야말로 토목공사의 연속이었다. 실제 청령포는 관광지가 되어 촬영이 불가능했기에, 영월 동강 주변의 오지를 찾아냈다. 장 감독은 “정말 길이 없을 정도로 외진 곳이라 토목공사를 해서 길도 만들고 주차장도 만들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한 주민의 밭에 허락을 구한 후 주차장을 만들고 촬영 후 원상복구했다는 것. “영월 군수님이 원상복구한다고 하니 너무 아깝다고 하실 정도로 풍광이 좋았다”는 비하인드다.
물론 기술적인 고충도 있었다. 대표적인 게 호랑이 CG 작업이다. “1프레임 처리에 16시간이 걸린다더라”며, 시간 부족으로 퀄리티가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감정적인 고증은 타협하지 않았다. 마지막 물에 떠내려간 단종의 시신은 비록 더미(인형)지만, 실제 박지훈의 몸무게와 똑같이 만들었다고. “희한하게 시신 더미가 물에 가라앉지 않아 현장 분위기가 숙연해지기도 했다”는 일화를 전하는 장 감독이다. 또 단종의 최후를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은 점에 대해 “슬픔은 창호지 문 너머에 있게 함으로써, 관객이 그 문밖에서 홍위를 추모하길 바랬다”고 그 의도를 밝혔다.
마지막으로 장항준 감독은 <왕과 사는 남자>의 연출 의도와 작품이 지닌 시사점을 다시 한번 짚었다. “성공한 불의는 인정받고 실현되지 못한 정의는 잊히는 게 당연한가”라는 통렬한 질문을 통해, 결과에 상관없이 신념을 지킨 이들의 존엄을 조명하고자 한 것이다. 비극적 역사라는 결과에 매몰되기보다 그 과정을 지탱한 인간의 정의로운 마음을 기억하는 것.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전하고자 한 가치다.
사진제공. ㈜쇼박스
2026년 2월 11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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