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음미할 줄 아는 남자 <혈투> 진구
혈투 | 2011년 2월 25일 금요일 | 정시우 기자 이메일

인터뷰를 즐겁게 하는 것 같다.
영화 찍으면서 우리가 의도를 했던 게, 영화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헌명(박희순)이 맞는 거냐, 도영(진구)이 맞는 거냐. 두수(고창석)가 맞는 거냐’ 부터 해서. ‘이 사람이 그 대사를 쓰는 게 맞는 건가 틀린 건가’까지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영화였으면 좋겠다, 했다. 다행히 인터뷰를 해 보니, 그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 기자님들이 물어보는 게, 다 다르다. 같은 장면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을 가지고 물어본다. 그걸 설명해 주는 재미가 이번 인터뷰에는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가장 만족하고 뿌듯해하는 영화기 때문에 더 자랑하고 싶다.

많은 이들이 다른 의견을 낸다는 건, 100% 모두에게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라는 의미도 된다.
맞는 말이다. 그래도 그 목적으로 만든 영화니까. 대중들이 선호하는 영화가 아니라고 판단되더라도, 충분히 만족한다.

완성된 <혈투>를 처음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사실 걱정을 많이 했다. 영화 찍을 때, 한 번도 마음에 들게 연기 한 적이 없었거든. 도영(몰락한 양반가의 자제)이라는 인물이 왜 거기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지, 왜 그 부분에서는 그런 선택을 하는지,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많았다.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새 영화 촬영이 끝나 있더라. 자연스럽게 결과물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지. 그런데 기술 시사회 때 보고, “됐다” 싶었다. 촬영할 때 안 보이던 게, 영화를 보니 보이더라. 만족스러웠다.

원래는 박희순씨가 연기한 헌명(무관<武官> 출신의 양반)역 이었다고 들었다. 배우입장에서는 2인자의 설움이 있는 헌명이 더 끌리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사실 도영만 아니었으면 했다. 내가 소화하기에는 어려운 캐릭터라고 생각했거든. 연기 내공이 있는 선배들이 해야 하는 역이라고 봤다. 그런데 덜컥 도영 역이 주어져서 캐릭터를 잡는데 애를 많이 먹었다. 다행히 감독님이 믿어주고, 두 선배가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줘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혈투>에 쏟아지는 관심 중 하나가 박훈정 감독이다. 지금이야 <부당거래> <악마를 보았다>의 시나리오 작가로 너무 유명하지만, <혈투> 촬영 때만 해도 안 그랬던 걸로 안다.
<혈투> 시나리오가 <악마를 보았다> <부당거래>보다 먼저 나온 거다. 감독님이 <혈투>만큼은 본인이 직접 연출하고 싶어 하셨던 걸로 안다. 말씀하신대로, 촬영 들어 갈 때는 박훈정 감독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래서 주위에서 “2010년은 박훈정의 해”라고 해도 무슨 말인지 몰랐고. 뒤 늦게, 이 분이 김지운, 류승완 감독님의 작품을 쓴 시나리오 작가라는 걸 알았다. 감독님, 굉장히 좋으신 분이다. 마침 감독님도 나도 남양주에 살아서, 집 근처에서 만나 술을 함께 마시곤 한다.
본인이 쓴 시나리오로 연출까지 하는 감독들을 보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인물 중에 유독 애정을 갖는 캐릭터가 있더라. 그 인물에 자신을 투영한다고 할까? 박훈정 감독은 어떤 인물에게 애착을 가지던가?
도영이다. 신기한 게, 도영이란 인물이 감독님과 상당히 비슷하다. 나와 감독님도 비슷한 면이 있고. 반면 나와 도영이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 완본을 보니까, 나와 도영이도 같더라. 그 때, 박훈정 감독이 대단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모든 게, 철저하게 계산된 거였던 거지. 사실 촬영 때는 감독님이 도영이 나오는 씬을 너무 쉽게 “오케이” 하시길래, 걱정을 많이 했다. ‘드디어 감독이 도영을 버리는 구나’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도영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랬던 거다. 촬영 때, 도영이에 대해 별 말이 없었던 것도 그 이유고. 힘든 점도 있었지만, 감독님 의견에 최대한 맞춰서 연기 한 게 좋은 결과를 가져 온 것 같다.

촬영 때, 자기 의견은 잘 안 내나?
최대한 감독님에게 맞추는 스타일이다. 내가 욕심을 가지고 오버한다고 해서, 잘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일찍이 터득했거든. 그건 박희순 선배나 고창석 선배도 마찬가지다. 자기에게 주어진 걸 묵묵히 하는 분들이지, 감독 방에 몰래 가서 ‘자기 캐릭터 어떻게 바꿔 달라’고 말하는 여우들이 아니다. 보통 촬영장에는 욕심을 부리는 배우가 한 명 쯤은 꼭 있다. 그런 게 보이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한 마리 사자가 무리를 흩트리는 걸 두고 보는 성격이 아니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소들 사이에서 일한 느낌이었다. 순한 소.(웃음)

호흡이 좋았나 보다.
너무 좋았다. 내가 어떤 장면을 툭 치며, 희순 선배가 “이것 봐라?” 하면서 새로운 걸 보여주고, 그러면 내가 다시 “어라?” 이러면서 또 새로운 걸 만들고.(웃음) 이런 식의 상승효과가 많았다. ‘이기는 법’이 아니라, ‘함께 가는 법’을 배운 현장이었다. 내 생애 최고의 촬영 현장이었다, 고 자신 할 수 있다.

지금 <모비딕> 촬영 중인 걸로 아는데, 그렇게 말하면 <모비딕> 스태프들이 서운 하겠다.
<모비딕> 스태프들도 내가 <혈투> 촬영 현장에 애정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다.(웃음) 그런데 할 수 없다. 즐기면서 일한다는 게 무엇인지, <혈투>를 통해 알았으니까. 그들도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아 물론, <모비딕>도 사랑한다.(웃음)

영화는 몇 달 동안 찍었나?
원래 예정은 석 달 촬영이었는데, 두 달 만에 거의 다 찍었다. 감독님이 굉장히 빨리 찍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감독님이 자기 주관이 확실하다. 보통 신인감독의 경우 “다시 찍자”고 하면, 별 말 없이 웬만하면 그냥 찍는다. 그런데 이 분은 “왜 다시 찍으려고 그러는데?”라고 꼭 물어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최후에 선택되는 씬은, 결국 감독님이 처음에 찍은 장면들이었다. 감독님이 처음 말한 게, 베스트였던 거지. 그러다보니, ‘이렇게 빨리 찍어도 되나?’ 의아해 했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감독님 스타일을 믿게 됐다. 합리적인 촬영 현장이었다.
대부분의 씬이 세트에서 촬영됐다. 장단점이 있을 것 같다. 편한 반면, 약간 무료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무료한 게 있긴 하다. 나는 촬영할 때,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스타일이 못 된다. <기담>할 때, 처음으로 내 이름이 붙은 나만의 전용 의자를 얻었다. 그게 배우에겐 엄청난 거다. 뭔가 인정받는 느낌도 들고, 이 작품에서 ‘내가 중요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도 드니까. 그런데 막상 의자가 주어지니까, 못 앉겠더라. 대 선배들만 앉는 자리 같아서.(웃음) 결국 지금도 내게 주어진 의자엔 잘 안 앉는다. 촬영장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게 더 좋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는 세트 촬영이 조금 답답하기는 했다.

미니홈피에 <모비딕> 관련 글을 올린 걸 봤다. “<올인> <비열한 거리> <마더> 등, 내가 머리를 짧게 했던 작품들은 다 잘됐다”라는 식의 글을 썼던데, 이번 <혈투>는 긴 머리다. 그것도 아주 장발의.
그러네? 그럼 이번 영화는?(웃음) 그래도 상관없다. <혈투>는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소중한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얻었다는 것에 만족한다. 열흘 쉬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에도, 촬영장에 놀러갔다. 그만큼 즐거운 현장이었다. 놀러가서 일하는 선배들과 감독님 놀리고(웃음) 연습도 자연스럽게 함께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쉬는 날이었는데, 희순 선배는 츄리닝 차림에 MP3를 귀에 꽂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창석 선배는 게임을 하고 계셨고. 그 큰 몸집에 조그마한 게임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 참 귀여우시다.(웃음) 그 때 내가 가볍게 몸을 풀면서 매니저에게 “대사 쳐봐!” 이랬는데, 멀리 있던 희순 선배가 어떻게 들었는지, “에이~ 알았어! 내가 가면 되잖아. 대사 어디야~?” 하면서 오더라. 그러니까, 게임하던 창석 선배도 게임기 내려놓고 다가오고. 이런 식으로 누가 먼저 얘기 안 해도, 자연스럽게 예습을 하게 되는 분위기 좋은 현장이었다.

헌명과 도영이 다정하게 나오는 씬이 하나 있다. 개울가에서 발 담그고 얘기 나누는, 과거 회상장면. 싸우는 씬만 연기하다가, ‘나 잡아 봐라~’ 식의 느낌으로 대화 하려니 어색하지 않았을까 싶더라.
헌명과 도영의 사이로 보면 어색한데, 박희순과 진구의 사이로 생각하면 굉장히 편한 촬영이었다. 또 그 씬이 마지막 날 촬영 한 거라, 다들 ‘마음에 쌓인 걸 다 내려놓고 편하게 찍자’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퀴어 영화 같다”고 하더라.(웃음) 감독님만 인정을 안 하셨는데, 얼마 전에 사석에서 인정하셨다. “그 장면이 조금 그렇긴 해~” 이러면서.(웃음)

극 중 세 인물이 구사하는 대사 톤이 다 다르다. 현대어를 쓰는 도영의 말투는 의도된 건가?
그 부분에 있어서는 견해가 두 개로 나뉜다. “진구가 두 배우 사이에서 결국은 망가지는 구나”, “충분한 준비를 못했구나”로 보는 게 한 쪽. 또 다른 편에서는 오히려 “그게 캐릭터를 잘 살린 것 같다”고 평가해 주신다. 나는 후자라고 믿고 촬영했다. 도영이 현대어를 쓰는 건, 철저히 의도된 거였다. 감독님이 그러셨다. “잘 생각해 봐. 도영은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족함 없이 자란 인물이야. 그런 사람이 절박한 현실에 직면해서도 자기 체면치레를 하려고 할까?” 그런 감독님 말씀에 너무 공감했고, 그래서 편한 일상어를 구사한 거다. 반면 헌명은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이 큰 인물이다. 항상 양반이기를 원하는 인물이기에, 극한의 상황에서도 양반 말투를 지키는 쪽으로 콘셉트를 잡았다.
의도와 다르게 연기 준비가 미흡했다는 소리도 들어야 하니, 조금 억울하지 않을까 싶다.
전혀 억울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아까 얘기했듯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영화이기를 원했으니, 괜찮다.

당신에 대한 인상에는 눈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눈빛이 매섭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무척 순해 보인다. 배우로선 아주 좋은 눈빛인데, 배우 이전에도 그런 말을 자주 들었나?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쌍꺼풀 때문에 눈이 예쁜 편이라는 소리는 들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경우 눈을 얘기하지, 눈빛을 말하지는 않잖나. 배우가 된 후에, 눈빛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장점인 줄 몰랐던 걸 좋게 봐 주시니까, 너무 좋다.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랬으면, 이라는 생각?

‘조금만 더’가 도대체 뭔데?(웃음)
하하하. 그러니까 얼굴이 조금 더 작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아, 이거 내 무덤 파는 발언인데~(웃음) 조인성 원빈 같이 얼굴 작은 배우들과 작업을 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더라.

이번 작품에서는 편했겠다. 고창석씨가 있어서.(웃음)
아후~ 너무 든든했지.(웃음)

스물넷에 <올인> 이병헌의 아역으로 데뷔했다. 다소 늦은 데뷔다. 대학 전공도 광고정보학인걸로 알고 있는데, 궁금하다. 왜, 갑자기 연기였을까.
어렸을 때는 내가 가장 잘난 줄 알았다. 끼도 많다고 생각했고. 그러다가 군대에 가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뮤지컬을 할까, 가수를 할까, 배우를 할까. 가장 잘 할 수 있는 걸 생각하다보니, 나온 답이 배우였다. 제대 하고 바로 연기학원에 등록했는데, 아버지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네가 무슨 연기냐, 차라리 연출이나 촬영을 해라” 이러시더라. 결국 아버지 몰래 <올인> 오디션을 보면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반대하시던 아버지. 지금은 어떤가? 연기자 진구를 인정하시나?
아버지가 촬영감독이셨다. 유하 감독님의 데뷔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의 촬영도 아버지가 하셨는데, <비열한 거리> 촬영할 때 두 분이 나 모르게 전화를 했나 보더라. 그 때, 유하 감독님이 나에 대해 많은 칭찬을 해 주신 것 같더라. 현장에서의 태도나 연기에 대한 욕심 같은 걸, 감독님이 높게 사 주신 거지. 그때부터 아버지가 달라지셨다. 이후로는 칭찬밖에 안 하신다. 뭐, 아버지는 일단 연기를 모르시는 분이기도 하고.

촬영감독이신데, 연기를 모르다니.
요즘 연기랑 아버지 시대 때의 연기는 확실히 다르다. 대중이 원하는 연기 선호도도 다르고. 그래서 아버지가 연기에 대해 말하는 걸, 내가 굉장히 싫어한다.(웃음) 다른 사람이 조언하는 건, 잘 받아들이는데 말이다. 그걸 아버지가 아니까, 좋은 말씀만 하시는 것 같다. 그냥 “영화 잘 봤다” 정도? 선배로서, 툭툭.

어렸을 때 자신이 가장 잘난 줄 알았다고 했는데, 칭찬을 많이 들었나 보다. 그러니까 그런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왜, 엄마들이 자기 자식 예쁘다고 하잖나. 그런 걸 믿고 간 거지. 그리고 어릴 때부터 남들 앞에 서는 걸 좋아했다. 오락단장이나 응원단장도 도맡았었고. 그런데 하나님에게 정말 감사한 게, 데뷔하자마자 그렇게 ‘핫(hot)’한 인기를 주시고, 한 달도 안 돼서 모든 걸 가져가시더라. 인기부터 돈, 명예 이런 걸 전부. 그랬기 때문에 <비열한 거리>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조인성을 이겨 먹으려고 하지 않고 말이다. ‘조인성보다 출연 분량이 적고, 조인성보다 키도 작고, 조인성보다 얼굴도 더 못생겼는데, 누가 나를 더 사랑해 주겠나’를 일찍이 인정한 거지. 그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최선을 다 하자’ 이렇게 된 거고.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 하다 보니, 오히려 더 인정해 주더라. 그 때, ‘이런 거구나! 이게 맞는 거구나!” 깨달았다. 어린 나이에, 좋은 걸 배운 것 같다. 이제는 떨어지는 법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최대한 안 아프게 떨어지는 법을. 그런데 안 떨어질 자신도 있다. 떨어질 만큼 높이 안 올라 갈 거거든.

욕심이 없는 건가?
욕심이야 어딘가에 있겠지. 마음 한 구석에. 그런데 최정상을 친 다음에 반드시 떨어져야만 한다면, 안 올라갈래.(웃음) 그냥 안 올라가련다. 난, 지금에 만족하며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나도 모르게 조금씩은 올라가고 있더라고. 내 소속사가 1년에 한 번씩 배우 프로필을 바꾼다. 그 때 내 프로필도 봤는데, 깜짝 놀랐다. “내가 작품을 이렇게 많이 했나?” 싶어서. 천천히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올라가고는 있었던 거지. 사람들이 안 좋아해 준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고 있었던 거고. 또 필모그래피를 보면서 너무 뿌듯했던 게, 함께 작업한 분들을 살펴보니까, 이건 뭐 거의 청룡영화제 수준이더라. 이병헌 황정민 봉준호 김혜자 원빈, 김지운 박희순 고창석 박훈정 유하 조인성~ 와, 너무 행복했다. 이 사람들보다 인기는 없을지 몰라도, 이런 인기 있는 사람들을 다 가지고 있으니, 이보다 운 좋은 사람이 어디 있나.
사실, 의외의 모습이다.
돈 욕심, 명예 욕심은 별로 없는데, 사람 욕심은 많다. 그런데 돈이나 명예라는 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내가 사람들에게 충실하면 알아서 다 따라오더라. 그러다 보니 상도 받고. 지금 상황에 상당히 만족하다.

이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변하면 안 되는데. 지켜내며 살아야지. 그렇고 싶다, 진짜.

처음부터 명예나 돈 욕심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그건 어느 순간 부서지더라. 사람들에게 “예뻐해 주세요” 그러면, 다 미워하고. “잘 생겼죠?” 물으면, “못 생겼다”고 그러고. “연기 잘 하죠?” 그러면, “못한다”고 하고. 반대로 “연기 못하죠?” 하면, “못하는 정도는 아닌데?” 이런다. 그럼 그게 기분 좋고. “못 생겼죠?”에 “못생긴 건 아니지~” 이래주니까, 그게 또 기분 좋고. 그렇다.

물으나마나 한 질문 같은데, 지금 행복한가?
굉장히.

소소한 것에서도 행복을 찾는 것 같다.
주위에 있는 누군가가 미워지려 할 때, 내가 그 사람에게 신세졌던 걸 생각한다. 박훈정 감독님 경우도 그렇다. 이번 촬영이 무더운 날 진행 돼서 굉장히 힘들었다. 게다가 갑옷과 가발 때문에 몸이 땀범벅이 될 때가 많았다. 10분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생기지. 그럴 때, “그냥 촬영 들어가자”라고 하는 감독님을 보면, 원망의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그러기에 앞서, ‘저 분은 나에게 기회를 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까짓것! 10분, 안 쉬면 뭐 어때?’ 이렇게 된다. 그런 식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편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여러 가지 계기가 있는데, 영화적인 계기는 <올인>때부터 <비열한 거리>때까지, 슬럼프에 빠졌던 2년의 시간 때문인 것 같다. 마음을 비웠을 때, 오히려 기회가 온다는 걸 그 때 느꼈다. 그리고 그 때 교회에서 들은 설교가 큰 힘이 됐다. 내가 모태신앙이라 그런지, 당시 교회에 대해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설교 시간에 잠만 자고.(웃음) 그러다가 잠을 안자고, 집중해서 들은 설교에서 나온 말이 ‘감사하면서 살자’였다. 그게 3년 전인데, 나처럼 영화배우가 꿈인 친구가 있었다. 집이 부유한 친구였는데 그 부유한 집이 망하고, 일도 잘 안 풀리고, 안 좋은 상황이 계속 됐다. 그 친구가 어느 날, 술을 마시며 “네가 좋아한다는 그 하나님이라는 사람은 왜 너한테는 다 주고, 나한테서는 모든 걸 다 뺏어갔느냐” 원망을 하더라. 그런 친구를 교회에 데리고 갔는데, 그 때 설교 내용이 ‘감사하면서 살자’였다. 그런데 듣다 보니, 이건 친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더라. 나도 늘 “작품이 힘드네, 뭐하네” 불평불만을 가지고 살았는데, 친구에 비하면 얼마나 감사한 인생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 거지. 그 날 이후 감사 전도사가 됐다. 친구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다 보니, 굉장히 밝아졌고. 다시 씩씩하게 오디션도 보고, 극도 쓰고 그러더라.
<올인> 끝나고, <비열한 거리> 사이. 그 2년 동안 어떻게 지낸 건가?
시트콤 <논스톱> 하나 하고, 단막극 두 개 정도 했다. 출연한 작품 수에 비해 오디션 낙방횟수가 어마어마했다. 오디션을 하루에 세 번 본 적도 있다. 오디션이란 오디션을 다 보러 다닌 것 같다.

그런 경우. 그러니까 연이은 낙방 후,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있던 자신감마저 사라져서 더 나쁜 쪽으로 가거나, 반대로 오기로 생겨 더 위로 튀어 오르거나. 당신은 후자 같은데.
모르겠다. 오기가 있었던 것 같긴 하다. 분명히. 두고 보자, 하는 마음도 있었고. 그런데 그 오기마저 무너뜨릴 정도로 많은 횟수의 낙방을 하다보니까, 어느 순간 자신감을 잃었고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힘이 빠지니까 오히려 더 잘 되더라고. 예를 들면 이런 거다. (테이블에 놓인 콜라 잔을 들며) 이 콜라 잔을 아무리 탈탈탈 털어서, 물을 부어도 콜라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 새 잔으로 바꾸지 않은 이상. 그러니까 그 잔을 바꾸는 작업을 2년 동안 한 거다. 원빈 장동건 이병헌의 잔이 되고 싶어 하는 나에게, “너, 이 잔 아니다!”라고 2년의 시간이 알려준 거지.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만의 새 잔이 생겼다.

‘리틀 이병헌’으로 불리며 사랑을 받았는데, 그게 발목을 잡기도 한 것 같다. 이게 누군가의 아역으로 출발한 배우들이 겪는 딜레마인데, 당신은 그런 이미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 한 편인가, 아니면 물 흐르듯 놔 둔 편인가.
‘없어지겠지’ 하면서 물 흐르듯 지켜 봤다. 그리고 ‘리틀 이병헌’이라는 게, 나에게는 도움도 많이 됐다. 2년 동안 잊혀 지지 않고 <비열한 거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리틀 이병헌’이란 이미지 덕분이었다. 그것마저 없었더라면 아주 힘들었을 거다. 지금은 그런 수식어가 사라졌는데, 가끔 들으면 재밌다. 옛날 생각도 새록새록 나고.

<마더>를 보면 엄마(김혜자)가 도준(원빈)에게 “진태(진구)랑 놀지마. 걔는 근본부터 글러 먹은 놈이야”라고 하는 대사가 나온다. 실제 진구는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 같나?
나는 성선설을 믿는 사람이다. 못된 사람을 만나도 착한 부분을 찾으려 한다. “태어날 때부터 나쁜 사람이 어디 있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지!” 이러면서. 그런데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나 스스로를 나쁜 놈처럼 생각하게 될 때가 많더라. ‘저 사람들은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저랬을 텐데, 나는 이유 없이 왜 나쁜 행동을 했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그래서 일부러 착해지려고 노력한다. 참으려고 노력도 많이 하고.

어릴 때도 잘 참고 그랬나?
어릴 때,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친구들이 많은 걸 보니 못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올해로 서른둘이다. 서른둘이란 나이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나?
계속 영화 현장에서 살아왔기 때문인지, 새해나 새해계획, 나이에 대해 무감각한 편이다. 2010년 마지막 날, <모비딕> 촬영을 했는데 “내일이면 내년이래~” 하는 사람들 말에, “내일이 뭐? 내일이면 35회차 찍는 건데” 이러고.(웃음) 물론 ‘작년보다는 조금 더 철이 들었구나’하는 생각은 든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작은 것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법도 알게 됐고. 얼굴도 조금 더 어른스러워지는 것 같아서 좋다. 어디 가서, “나, 영화배우 누구에요.”라고 얘기 할 수 있는 자신감 정도는 생긴 것 같다. 나이 먹는 게 너무 좋다, 나는.

보통의 연예인은 나이 먹는 거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나는 나의 40대가 너무 기대된다.

어떤 모습일 것 같나? 40대의 진구는.
욕심 같아서는 조지 클루니 같이 미중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배우가 되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미중년이라는 말이 어울렸던 분은, 드라마 <애인>의 유동근 선배가 유일했던 것 같다. 아저씨였는데도 불구하고, 10대들조차 좋아할 정도로 멋졌으니까. 지금은 원빈 조인성 보다 돋보이지 못해도 괜찮다. 대신 나중에 내가 이들보다 더 멋있는 주름과 근사한 새치머리를 만들어서 나타나고 싶은 생각은 든다.

그러려면, 주위 여건도 따라 줘야 할 텐데.
그렇지. 우리나라도 어르신들에게, 어르신들의 장을 열어주는 영화나 작품이 많았으면 좋겠다. 김혜자 선생님이 <마더> 주인공을 한 것처럼 말이다. 할리우드 영화 <레드>를 보면, 존 말코비치와 헬렌 미렌이 그렇게 근사해 보일 수 없다. 특히 헬렌 미렌은 할머니인데도 섹시하잖나. 귀엽기도 하고. 내 눈에는 예뻐 보이려고 성형하는 맥 라이언 보다, 늙어버린 헬렌 미렌이 훨씬 더 섹시하다. 맥 라이언 저 아줌마는, 왜 맨 날 귀여운 여인 타령인지 모르겠네.(웃음)

(웃음) 우리나라에 중년을 위한 작품이 많이 없는 게, 사회 시스템 때문일까, 아니면 준비가 된 배우가 많지 않기 때문일까.
사회 시스템이 문제인 것 같다. 그런 모험을 즐기는 감독이나 제작사가 많으면 좋을 텐데, 아직은 시청자들 눈치 보기에 바쁘니까. 처음에는 힘들겠지. “저, 아줌마는 왜 자꾸 나와?” 이런 반응도 있을 테고. 하지만 그게 눈에 익는 순간, 그게 하나의 이슈가 되고, 유행이 될 것 아닌가. 언젠가 우리나라도 중년들을 위한 작품이 많이 만들어지리라 믿는다.
진구를 모르는 사람에게 본인의 작품 하나를 추천한다면?
<마더>! 평균적으로 봤을 때, 평점도 높고.(웃음) “진구를 봐 주세요”가 아니라, “영화를 봐 주세요” 하면서 <마더>를 추천하고 싶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진구를 모르는 사람에게 본인을 어필 할 수 있는 작품.
딱히 모르겠는데, 흠... 그 때도 그냥 <마더>다. 나에게 상도 주고, 천하의 봉준호 김혜자 원빈과 작업 할 수 있게 해 준 작품이니 말이다. 그리고 <혈투>도 그렇게 남았으면 좋겠다.

영화 한 편이 개봉하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친다. 프리 프로덕션, 촬영, 후반작업, 홍보의 단계. 이 중, 가장 힘든 게 언제인가? 그리고 가장 재미를 느끼는 단계는?
가장 싫은 건 프리단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캐릭터 분석도 해야 하고, 액션 영화의 경우 액션 연습도 해야 하니까,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가장 즐거운 건, 아무래도 촬영 단계. 특히 뚜껑을 딱 여는, 크랭크 인 현장은 항상 설렌다. 그리고 영화가 자랑할거리가 많으면 홍보 때도 너무 즐겁다. 지금 <혈투>처럼.

2011년 2월 25일 금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2011년 2월 25일 금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    

(총 2명 참여)
jounji
진구 좋아용 ㅎ   
2011-04-02 20:19
cyddream
진구는 참 좋은 배우인듯은 한데..... 아직 맞춤 작품을 만나지는 못한듯 보입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화이팅...^^   
2011-03-11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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