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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을 각인시키는 눈빛 <미국인 친구> 황금희
2014년 6월 24일 화요일 | 서정환 기자 이메일

지성원에서 본명 황금희로 다시 이름을 바꿨어요.
지금도 기사에는 지성원으로 더 많이 나와서 이제 좀 이름 알리려는데 왜 바꿨을까, 사실 후회도 살짝 됐어요. 이왕 바꾼 거 어쩔 수 없잖아요. 이제 본명으로 이름에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연기를 잘해서 인정받는 배우가 되어보자, 마음먹었죠.

배우들이 활동 중에 이름을 바꿀 때는 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뭔가 심정의 변화가 있는 것 같아요. 없는데 그냥 바꾸진 않겠죠(웃음).

그동안 활동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그러게 말이에요(웃음).

2000년 SBS 공채로 데뷔한 후 계약 문제로 공백도 있었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신돈’ ‘눈꽃’ ‘나쁜여자 착한여자’ ‘불량커플’ ‘이산’ 등으로 주목받으며 활동이 활발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저만 그런 건 아니고 배우들이 일이 많을 때는 바짝 하다가 일이 없어서 쉴 때는 잘 안 보이는 경우가 있잖아요. 2000년에 SBS 공채로 데뷔해서 주목이라면 주목도 받았고, 역도 활발하게 들어오는 상황에서 매니저 소송 때문에 2~3년을 쉬게 됐어요. 연기하기 전에는 플루트를 전공했으니까 집에서는 다시 음악 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리셨죠. 영화가 하고 싶어서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도 다시 가게 됐는데, 그때는 영화 쪽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회사에서도 영화를 연결해주는 분이 없었어요. 이광기 선배님 소개로 시트콤 ‘러브러브’를 1년 했고, ‘신돈’이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당연히 플루티스트로 평생 살 줄 알았는데, 언니 따라서 공채 시험을 봤고 합격하는 바람에 진로가 바뀌게 됐거든요. 그렇게 이 길을 쭉 오게 된 거죠.

데뷔 초 주목도 받았고 굴곡을 겪으며 작품을 많이 하게 됐던 시기들도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거나 연기로 큰 주목을 받았던 시기가 도드라진 적이 없다보니 개인적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연기를 해온 건지 궁금했어요.
우연한 계기로 연기를 하게 됐기 때문에 스타가 아니라 막연하게 좋은 배우가 돼야지, 연기 잘하는 배우로 인정받아야지, 늘 그 생각은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너무 주목받는 것도 부담스러워요. 성격이 밝고 남들과 얘기도 잘하고 알고 보면 푼수인데, 남들 시선이 느껴지거나 주목 받는 건 부담스러워하는 성격이에요. 공채시험 붙고 일을 하면서 만족을 못했던 것 같아요. 제 연기도 그렇고 역할도 그렇고 재미를 못 느꼈던 것 같아요. 연기를 즐기지 못했어요. 생각은 높은 곳에 가있는데 표현은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요. 재능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막상 연기를 해보니 내가 경험해보지 않았던 역할, 내가 자란 환경과 다른 역할을 맡게 되면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잘 모르겠는 거예요. 음악하면서 너무 클래식하고 모범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머리로는 그려져도 가슴으로는 안됐던 것 같아요. 30대가 되고 영화를 하면서 연기를 즐기게 됐어요. 하고 싶었던 영화를 하면서 연기도 눈을 뜨고, 재미도 알게 되고, 더 잘해야겠다는, 더 많은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어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고민 없이는 발전이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연기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계약 문제로 활동에 공백이 있을 때 일을 그만둘까 고민을 했음에도 끈을 놓지 않고 지금까지 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뭐라고 딱 집어서 말씀 못 드리겠는데...

마음이 계속 갔던 건가요?
그렇겠죠. 결국 이제 시작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앞으로 10년 더 지나면 내가 이래서 놓지 않았구나,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뭔가 있었나봐요. 연기에 대한 열정, 애정, 애증 같은 것? (웃음) 연기를 안했으면 이런 일들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런 생각도 했지만 연기를 해서 후회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내밀한 부분까지는 모르지만, 연기만 바라보고 활동해 온 배우들은 어찌됐건 쉽지 않은 것들을 이겨내고 극복해온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반대급부가 적더라도 힘든 길을 꿋꿋이 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믿음을 주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지만, 배우는 다 다르잖아요. 상업영화만 한 분들도 있고, 처음부터 주목을 받았던 분들도 있고요. 아무튼 자기 일을 꿋꿋이 10년 이상 해오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 대중에게도 평단에도 황금희라는 배우를 각인시킨 작품이라서 그 작품을 계기로 전보다 활발한 활동을 할 거란 기대가 있었어요.
저도 그랬어요(웃음).

하지만 그 이후로 캐스팅됐던 <4인조>도 엎어지고 잘 안 풀렸어요. 다른 영화들에 출연했지만 개봉은 <미국인 친구>가 4년 만에 처음이니까요.
대학원을 다니면서 좋은 작품 기다린다고 쉬고 있었어요. <미국인 친구>, 장현수 감독님의 <애비>, 이재락 감독님의 <플라타너스>, 전규환 감독님의 <소리없는 남자>, 단편영화까지 총 다섯 편을 찍었어요. 일은 했어요(웃음).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 워낙 이슈가 됐기 때문에 그렇지(웃음).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생각도 해봤어요. 너무 안 풀린 건가 생각도 했고요.
그런 생각하면 진짜 불행해요(웃음). 제 탓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매니저 사건 이후로 매니저들을 잘 못 믿으니까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이후 소개를 받아서 매니저를 만났는데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았어요. 그동안 제 이미지에 맞게 적극적으로 일을 가져오신다거나 하는 분들을 못 만났던 것 같아요. 사람마다 복이 아닐까 싶어서, 아직 때가 아니었나보다 좋게 생각하려고 하죠(웃음).

상업적 목적 위주의 활동에 큰 거부감은 없나요? 아니면 자신의 뜻을 지키기 위해 고집을 꺾지 않는 편인가요?
반반인 것 같긴 해요. 누구 말을 잘 듣고 하란대로 하는 성격이었다면 오히려 일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제 고집도 있고 제가 좋아하는 게 어떤 건지 색깔이 분명하니까 다른 사람들의 말도 잘 안 듣고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부분도 있었겠죠. 나이를 먹고 연기를 하면서 생각해보니 2~30대 초반에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잘 됐다고 해서 그게 끝까지 간다는 법도 없고, 끝까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열심히 해서 늦게 연기로 빛을 보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분들도 많이 계시잖아요. 끝까지 하면 다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잘되는 시기가 늦게 온다고 해서 힘들어한다거나 포기한다거나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더라고요. 철이 없고 아직도 세상 물정 잘 모르지만, 조금 이해가 되더라고요.

멀리 봤을 때, 배우로서 가치관을 지켜가면서 활동을 꾸준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시기들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단지 그걸 버티기까지가 쉽지 않은 거겠죠. 경제적 문제도 큰 부분일 테고요.
배우만 그렇게 힘든 줄 알았는데 일을 해보니 감독님이나 제작자나 작가나 스탭들이나 똑같더라고요. 때를 기다리는 너무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 있더라고요. 정말 하고 싶은 연기를 위해서라면 연극이든, 언더에서 뛰든, 아이들 지도를 하든, 다른 부업을 하든 어떻게든 인정받기 위해서 버티는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그렇게 잘 된 선배님들 보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가장 중요한 건 본인 연기의 확신과 믿음이 있어야 버틸 수 있다는 거예요. 난 저 정도는 못할 것 같다, 저런 배우가 될 자신은 없다, 모든 걸 포기하고 버틸 정도의 자신이 없다면 빨리 접어야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 판단이 참 쉽지 않죠.
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만이 버틸 수 있고, 배우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 같아요. 다른 일도 마찬가지겠지만요.
환경이 받쳐줘서 연기에 집중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도 있을 텐데,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연기에 대한 열정만으로 악착같이 버티는 오기가 그 사람을 정말 좋은 배우로 만들어줄 거라고 믿어요. 저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고생한번 안 해봐서 처음에는 고생한 역을 하라면 막연했어요. 인생 경험이 있어야 연기도 풍성해진다는 어른들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외롭게 처절하게 싸워가며 혼자 많이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깊이를 잘 모를 것 같아요. 너무 힘들고 바닥까지 내려가서 고통 받고 상처를 입어봤을 때 그 감정들이 모여서 좋은 배우를 만드는 것 같아요. 농담으로 그래요. 우울증 한번 안 겪어본 배우가 배우냐고(웃음). 경험이 없으면 선생님들처럼 진실한 눈물, 정말 속에서 나오는 것 같은 웃음을 연기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배우를 하고 싶은 분들에게 견뎌서 반드시 이루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사실 말처럼 쉽진 않죠(웃음). 쉽진 않지만 희망이 있어야 버티고 이룰 수 있는 거잖아요.

고생 없이 자라서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이 쉽진 않았겠네요.
일을 안 하면 수입이 없을 때가 있잖아요. 부모님께 도움을 받은 적도 있어요. 그래도 일단 의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정 힘들면 시집을 갈 수도 있고 다른 사업을 할 수도 있는데, 배우로 인정을 받고 그 다음에 뭘 해도 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냥 계속 죽 가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요령도 없고 지름길도 없는 것 같고요. 그럴 시간에 연기를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서 더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주목 받는 걸 부담스러워한다면서 영화제 레드카펫에서는 가장 주목받을 의상을 입었어요(웃음).
부담스러워요, 싫어하는데(웃음), 오래 일을 봐준 스타일리스트 오빠가 있었어요. 화려한 걸 좋아하는 분이라 너에게 이런 섹시한 면도 있는데 보여줘야 한다면서(웃음), 그 오빠가 예쁘게 입혀준 거죠.

단아하고 아나운서처럼 똑 부러지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레드카펫에서의 모습으로 인해 새로운 느낌을 받았던 건 맞아요.
음악을 오래하다 보니까 클래식을 한 사람답게 행동해야지, 이런 게 배어있는 것 같아요. 클래식한 사람들만의 프라이드가 있거든요. 껄렁하게 있으면 에티켓 없다고 생각하고, 항상 단정하고 정돈된 것에 익숙해서 연기할 때 그런 부분이 너무 안 깨져서 사춘기를 겪었던 것 같아요. 넌 왜 연기하면서 안하던 짓을 하니, 라고 부모님이 말씀하실 정도로요(웃음).

부러 그런 것들을 표현하려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딱 떨어지는 모습이 묻어나는 것, 황금희라는 배우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선입견으로 작용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웃음).

방송에서 자매들이 공개된 적도 있잖아요. 예술가적 기질이 있는 집안에 미스코리아 출신 언니, 동생도 모두 미인이라 이슈가 되었고요.
언니, 동생이 오히려 연예인이에요. 저는 평범하고 둘은 정말 예뻐요. 저보다 관리 잘하고, 옷도 잘 입고요(웃음).

<미국인 친구>는 어떤 이유로 출연을 결정했나요?
일단 여자 감독님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웃음). 한국에서 보기 드문 작가적 성향이 강하고, 유럽영화 같은 느낌도 들었고요.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색다른 영화 같다는 느낌에 출연하게 됐죠.

영화가 어렵게 다가오진 않았어요?
어렵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연극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문어체 대사인데다 대사 양도 많아서 연극처럼 보일까봐 걱정이 됐어요. 대사를 줄이는 건 어떻겠냐고 말씀 드렸지만, 감독님은 본인의 생각을 담았기 때문에 대사를 다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연극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남성진 선배님이랑 연습할 때나 연기할 때나 많이 신경을 썼어요.
지윤 캐릭터는 설정과 연기에 있어 어떤 부분에서 중점을 뒀나요?
개인적으로 지적인 느낌이 나는 사람을 좋아해요. 말을 해보면 알잖아요. 굳이 말을 안 해도 눈을 보면 알 수 있는 그 느낌을 좋아하는데, 지윤은 지적인 느낌이 있으면서도 독특한 여자 같더라고요. 정돈되어 있고 남부러울 거 없는 여자 같지만 꿈을 못 이뤘고 나름 푼수 같기도 한 여자라 누구든 그런 면이 있을 거라 생각을 했어요. 나에게도 그런 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소설가로서 콤플렉스가 있는 인물이잖아요. 지윤이 그림을 구입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어떤 느낌을 주고 싶었고, 어떤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나요?
굳이 그림을 구입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라이벌 친구 작가가 그 그림에 관심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겠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 것들만 봐도 조금 엉뚱한 면이 있는 여자인 것 같아요.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고, 그런 신들이 재밌었던 것 같아요.

오프닝 시퀀스에서 차를 운전하다가 고양이 소리를 듣고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잖아요.
감독님은 지윤을 지적이면서도 신경질적인, 불면증에 시달리는 예민한 여자로 표현하고 싶어 하셨어요. 환청으로 그런 예민한 부분을 보여준 거죠.

초반에는 대사가 없이 표정으로 인물을 표현하는 장면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소설을 쓸 때 앉아있는 모습이나, 동영상을 보며 감정을 표현하는 눈빛 같은 것들요.
연습하고 리허설은 해도 촬영에 들어가면 다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이 돼서 소설을 쓰고 있는 거지, 다른 계산을 한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아예 안하는 것 같아요. 그 앵글 안에서는 제가 지윤이니까 지윤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최대한 그렇게 지윤으로 보이려 노력하고 다 잊어버리고 연기하지 계산하면서 연기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영화를 보면서 눈빛이 다른 배우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나요?
받았어요(웃음).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 안했는데, 이번 <미국인 친구>에서는 저인데 저 같지 않은 거예요. 뭔가 차별화된 색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잘 표현은 못하겠지만요.

깊이가 있는 느낌이랄까요.
지인이 그런 말을 했어요. 니가 대중적인 얼굴은 아니라고(웃음). 대중적인 얼굴이었다면 빨리 떴으려나, 하면서 부르르 했던 기억이(웃음).

도대체 대중적인 얼굴의 기준은 뭔가요? (웃음)
그러니까요. 물어보고 싶어요(웃음).
인트로에서 차가 눈길에 미끄러져 한 바퀴 돌아서 사고가 나는 장면이 있었어요.
첫날 첫 신이었어요. 우연히 사고가 난 거에요. 길이 얼어있어서 미끄러웠는데 감독님이 속도를 더 내라고 하시는 거예요. 차가 후륜이라 미끄러질 것 같았는데, 속도를 내니 아니나 다를까 휙 도는 거예요. 첫 신 첫 촬영인데 다치면 큰일 나니까 하느님, 부처님, 다 찾은 것 같아요(웃음). 가로수가 일정하게 심어져있고 분명히 나무를 받았어야하는 상황인데, 차가 빙 돌아서 딱 나무 사이에 들어가는 걸 보고 너무 신기한 거예요(웃음).

정말 유연하게 차가 나무 사이로 빙 돌아 들어가더라고요(웃음).
카레이서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들어갔는지(웃음). 감독님이나 스탭들이 사색이 돼서 달려오셨는데 대범한 척을 했어요. 아무렇지 않다고, 다시 가자고 했지만 다리는 후들후들(웃음). 그런데 그 장면을 쓰셨더라고요. 지윤의 예민한 부분을 표현해주는 것 같아서 썼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독님도 참 특이한 분이라고 생각했죠(웃음).

천만 다행이에요. 첫 촬영에 액땜을 제대로 했네요.
운전을 좋아하고 겁이 없어서 속도를 내는 편이긴 한데, 그 상황에서도 운전대를 안 놨다는 게 정말(웃음). 액땜을 한 거죠.

지윤과 남편 김대표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한 건가요?
지윤이 꿈을 못 이루고 결국 쫓겨서 시집을 가게 된 느낌으로 설정을 했어요.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능력 있고 나이 차이도 있는 남편과 결혼을 했지만 크게 애정은 없는 설정인 거죠.

소설가 지윤과 영화 속 소설에 등장하는 지윤과의 연기 톤 차이는 어떻게 잡아갔나요?
지윤은 차분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일상을 무료하게 사는 예민한 여자에요.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 중에 풍요롭고 환경은 좋은데 본인 스스로 힘들어해서 우울증이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외롭고 감당이 안 되거나, 스스로 완벽주의인데 극복이 안 된다거나. 영화 속 소설로 들어가면 지윤은 활발해지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을 보고 약간 들떠있는, 그런 아이러니함이 표현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 차이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지윤을 통해서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강해보이고 센 느낌을 바꿔주고 싶어 하셨어요. 그래서 예민하고 세 보이는 것 같지만 여리고 푼수 같은 모습을 많이 담고 싶어 하셨어요. 그래서 <미국인 친구>를 봤을 때 내가 여태껏 하지 않았던 다른 면을 보게 된 것 같아요. 주변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고, 그래서 좋았어요.

피터에 대한 지윤의 감정은 무엇일까요? 단순한 호감?
결혼을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웃음), 좋아한 것 같아요. 뭔가 자극을 줘서 글을 쓰게, 못 이뤘던 꿈을 이루게 만들어준 자극제가 된 거잖아요. 좋아하고 설레지만 현실에서는 그 선을 넘을 수 없으니 스스로 소설을 쓰면서 만족한 것 같아요.
영화와 소설 속 이야기가 교차되다보니 모호한 지점들이 많은 영화였는데, 캐릭터로 확고하게 기반을 잡아주고 일관된 흐름을 유지해줘서 큰 무리 없이 몰입할 수 있었어요.
연기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연기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웃음). 여배우들은 더욱 힘든 현실이지만 열심히 포기하지 않고 하면 기회가 오겠구나, 나만의 색깔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겠구나, 생각도 들어요.

이번 작품에서는 눈빛이 유독 돋보였어요. 훈련과 의도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은데, 그 존재감이 잘 드러난 것 같아요.
TV에서는 정말 인형같이 생기고 보자마자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예뻐야만 주인공을 할 수 있고 스타성이 있다고 보통 생각하잖아요. 게다가 저는 화면을 잘 받는 얼굴도 아니고요. 영화를 하면서 나도 좋은 배우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한 신 한 신 다 나에게 맞게 조명을 맞춰주고 정성 들여 잡아주잖아요. 그러니까 제 얼굴도 그렇게 이상한 얼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그렇다고 자신이 있는 건 아닌데, <미국인 친구>는 내 색깔로 가보자는 생각으로 정말 연기에만 몰입해서 편하게 찍었던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앞으로도 꾸준히 활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죠. 지금까지 작품에서 연기로 좋은 모습 계속 보여주고 안정적인 느낌을 심어줬으니까요.
<애비>에서는 조연이었는데 저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도전이었어요. 8~9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요정 사장 역할이었는데, 정말 센 역이에요. 연기하고 몸살이 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어요(웃음). 기존 영화에 나오는 마담 역할과 또 다른, 저만의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 힘든 작업이었거든요. 처음 공채로 입사하고 촬영현장에 견학을 갔는데 최민수 선배님이 절 보고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는 고현정을 닮았구나, 아주 단아하구나’라면서(웃음), ‘연기는 말이지, 80%가 눈빛 연기야. 배우는 눈에서 나온다’라고요. 정말 맞는 말씀인 것 같아요.

촬영한 작품들이 개봉을 해야 대중에게는 꾸준히 활동하는 배우로 보일 텐데, 그 부분은 아쉽네요.
고집이 있으니까요. 사실 너무 상업적인 걸 좋아하지도 않았고요. 작년에 작가주의 성향의 영화를 몇 편 해보니 너무 그것만 추구할 건 아니구나, 생각도 드네요(웃음).

다양하게 하는 게 가장 좋죠.
작년에 여러 편을 촬영하면서 좋은 경험을 했어요. 지금은 <순수의 시대>라는 사극을 하고 있어요. 작업 환경이 좋아서 그런지 즐겁게, 재밌게 하고 있어요.

<미국인 친구>를 통해서는 어떤 것들을 얻고 느꼈나요?
재밌게 찍었어요. 감독님과 이야기도 많이 나누며 작업했기 때문에 한 단계 성숙한 느낌이 들어요. 배우들에게는 항상 새로운 역할이 도전이자 숙제거든요. 그 산을 넘어야 발전이 있고, 조금 더 공부가 되는 거고요. 자꾸 그렇게 배워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연기 보여주고 싶나요?
하면 할수록 다양한 연기에 더 욕심이 나는 것 같아요. 푼수기 있는 코미디도, 안젤리나 졸리처럼 액션도 해보고 싶어요. 보기보다 터프해서 액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운전 실력 보셨잖아요(웃음). 골골하긴 한데(웃음), 보기에는 건강해보여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2014년 6월 24일 화요일 | 글_서정환 기자(무비스트)
사진_박종덕 실장(브라운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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