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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의력은 어머니로부터 <약장수> 이주실
2015년 4월 23일 목요일 | 최정인 기자 이메일

인터뷰를 준비하다 수십 년 전 경향신문에 실렸던 사진을 찾았어요.
(사진을 보며) 이런 적도 있었군요. 머리가 이렇게 짧은 적은 극히 드물어요. 항상 긴 머리였는데 염색도 전혀 안하고 지냈어요. <약장수>를 촬영할 때도 머리 길이만 줄였지 염색은 안했어요. ‘폭풍의 여자’ 때문에 처음으로 머리를 염색했는데 지금은 촬영이 끝나가서 예전처럼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어요. 올해 나이가 72인데 지금 이 모습 그대로가 좋아요. 사람은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겉모습보다 마음이 젊은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음에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아마 흰머리를 하고 있을 거예요(웃음).

<약장수>는 예산은 적어도 상업영화에서 흔히 보지 못했던 소재와 주제를 다뤄서 좋았어요.
다양한 영화가 많이 나와야죠. 그런데 <약장수>는 영화를 팔기 위한 특별한 장치가 없어서 아쉬워요. 박철민이 입만 열면 <약장수>를 며칠 만에 찍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정말 밥 한 끼 먹는 것도 아껴가면서 짧은 기간에 찍었거든요. 힘든 상황에서도 모두가 최선을 다했어요. <약장수>가 동력이 돼서 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영화에 용감하게 뛰어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흥행성도 보장하고 기술적으로도 잘 갖춰진 다양한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장사는 되어야 하니까요(웃음).

<약장수>에서 인상 깊게 본 부분이 많아요. 하지만 기술적인 면은 조금 부족해서 안타까웠어요.
그건 그래요. <약장수>는 영화의 성격상 평면적으로 그릴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어요. 예산도 많지 않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부분도 많았으니까요.

헤어스타일은 지금과 비슷하지만 영화 속 옥님은 지금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피곤해 보였어요.
분장하는 분에게 미리 말해서 맨 얼굴로 연기했어요. 피부가 땅기니까 로션만 바르고요.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그러는 편이 얼굴에 있는 거뭇거뭇한 잡티와 주름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았어요. 얼굴에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입히면 윤기가 생기거든요. 그렇게 되면 고뇌하고 병 들어서 며칠 동안 밥도 못 먹은 옥님의 거칠어진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아요. 머리도 푸석푸석한 파마머리 그대로 손을 거의 안 댔어요. 아픈 이후에 일범을 만나러 홍보관에 찾아가는 신을 촬영할 때는 터실터실하게 입술이 터진 걸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며칠 동안 입술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엎드려 잤어요. 하지만 맨 얼굴로 출연할 수 있었던 것도 분장하는 분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그분이 자신의 전문성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언짢아하면 끌려갈 수밖에 없거든요. 잘 이해해줘서 가능했던 일이에요.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옥님의 움직임이나 표정에서는 초라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기품을 꿋꿋하게 지키려고 노력해 온 인물임이 느껴졌어요. 인물의 고독한 환경을 표현하면서 정신만큼은 비루해 보이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 같아요.
옥님에게는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밑에 깔려 있어요. 살아있음에 감사한 거죠. 지금만큼의 상태로도 감사한 거고요. 옥님은 그런 마음이었을 거예요.
본인의 모습이 옥님에 많이 묻어있나요?
조치언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옥님은 이주실이 맡아야 되는 역할이라 그랬대요.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 조치언 감독을 처음 만났는데, 내가 번지르르한 찻집 같은 곳에서 만나지 말고 EBS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어요. EBS에서 생방송 라디오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오면 가장 나다운 수수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했거든요. 조치언 감독이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옥님에 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나의 그런 모습은 처음 봤을 텐데 말이에요. 옥님에게도 그런 모습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아요. 자기 힘으로 통제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환경에 적응하고 언제나 긍정적으로 사려고 노력하는 거죠.

<약장수>는 조치언 감독의 데뷔작인데 감독과의 호흡은 어땠어요?
조치언 감독은 배우에게서 무언가를 끄집어 낼 때 지금의 연기도 매우 좋지만 한 가지만 더 보태주면 정말 좋겠다면서 감정을 추어올리고 칭찬하는 스타일이에요. 보통내기가 아니에요(웃음). 처음으로 모든 배우들이 모여서 시나리오를 읽던 날, 조치언 감독을 쳐다보니 눈이 그렁그렁하더라고요. 모두들 너무 잘 해줘서 고맙다면서요. 그런데 <약장수>에 출연한 배우들은 모두 감독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을 열심히 따라가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작품을 시작했어요. 촬영할 때는 조치언 감독이 본인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연기라면 조용히 다가와 귀엣말로 이러면 어떨까요, 라고 물으면서 서로 조율해 작품을 일궈냈어요.

현장 분위기가 유난히 좋았다면서요.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영화가 끝난 후에도 많이 그리워요. 얼굴 붉힐 일이 전혀 없었어요. 홍보관 신들에서 등장하는 아주머니들도 얼마나 고맙게 협조해줬는지 몰라요. 전문 배우들도 아주머니들이 연기하는 걸 도와주려고 옆에서 애썼고요. 조치언 감독이 아주머니들의 자존감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연출을 잘했어요. 제작진 모두가 가족처럼 부둥켜안고 모두 같이 최선을 다해야 다음 영화를 또 만들 수 있다면서 서로를 격려했어요.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엑스트라는 전문 연기자가 아니라고 들었어요.
잠시 등장한 아주머니들까지도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몰라요. 연세도 많으신데 말이에요. 그때의 기억이 자꾸 그려져요. 그분들이 오면 모두들 따뜻하게 대했어요. 모시고 가서 밥도 같이 먹고요. 그분들 중에는 학교에서 다른 공부를 하느라 꿈을 못 이뤘지만 동아리 같은데서 연극을 계속 해 온 분들도 있거든요. 세월을 보내고 아이들도 모두 키웠으니까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취미 활동으로 시청, 구청에서 진행하는 연극에 참여한 분들이에요. 그들을 보면 눈물이 나요. 그리고 내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새삼 다시 느껴서 고맙고, 지금의 내 자리가 주변 분들의 희생에서 비롯된 거라는 생각이 다시 들어요. 아주머니들이 연기를 전공했으면 나보다 더 잘했을 수도 있고 지금쯤 명배우가 됐을 수도 있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는 배우 한다고 하면 집에서 내쫓던 시절이에요. 연극영화과가 있는 대학도 많지 않았을 뿐더러 연기하는 여학생은 극히 드물었어요. 졸업 공연을 위해 다른 대학에서 여학생을 빌려야 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아주머니들이 70이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라도 늦게나마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촬영장에 온 것이 행복하고 설렜어요. 연배니까 서로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고요. 연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주고받았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니 그분들이 나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더라고요. <약장수>는 그렇게 모두가 힘을 합쳐 만든 영화라 더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CT 촬영을 취소하고 접수한 40만원을 돌려받을 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도 인상 깊었어요. 그때 기뻐하는 표정에서 옥님에게 돈이 얼마나 소중하고 궁한지 단번에 드러나더라고요.
감정을 단편적으로 슬프다, 기쁘다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관객의 몫으로 남겨둬야 되는 부분도 있어요. 옥님은 그런 면에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생일날 친자식에게 놀아달라고 이야기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옥님이 거기서 눈물을 왈칵 쏟으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그 신을 촬영하기 전에 감정을 많이 덜어냈어요. 그런 식으로 신마다 공들였던 부분이 있어요. 또 조치언 감독이 그런 부분을 잘 받아들여줘서 고마웠어요. 미흡하다 싶은 부분은 잘 다듬어 줬고요. 나이는 아들뻘이지만 은인 같은 감독이에요. 사람들이 <약장수>를 보고 이주실이 이런 연기도 할 수 있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고마운 감독이라고 생각해요. 캐릭터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배역을 줘서 너무나 고마워요. 이것도 인연일 것 같아요. 앞으로 얼마나 영화를 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영화라면 작은 영화, 큰 영화 가리지 않고 찾아서 하고 싶어요. 아주 좋은 공부가 됐어요.

자그마한 전통지갑에 핸드폰을 넣어둔다든지, 아이와 함께 놀고 나서 땀을 닦는다든지 그런 사소한 부분들의 연기 디테일이 눈에 띄었어요.
생활하면서 몸에 배어 있는 것들이 연기에 묻어나서 그런 것 같아요. 연예인 친구보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더 자주 만나는데 옥님을 연기할 때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중, 고등학교 친구들은 매주 화요일마다 만나요. 우리끼리는 ‘잼잼반’이라고 부르는데 정신적으로도 아주 좋거든요(웃음). 초등학교 1학년 때 한국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친구들 중에는 중학교도 못 간 아이들이 더 많아요. 저처럼 대학을 나오고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던 경우는 극히 드물어요. 세상을 먼저 뜬 아이들도 너무 많고요. 그래서 친구들은 내가 내 이름을 걸고 얼굴에 분 바르는 일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아주 즐거워해요. 친구들을 보면 정말 노인이거든요. 아주 늙었어요(웃음).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친구들을 지속적으로 만나왔기 때문에 저 밑으로 흐르는 생활을 너무나 잘 알아요. 그 아이들만의 언어가 모두 적응이 돼서 전혀 어색하지 않고 그들도 나를 배우라고 다르게 생각하지 않아요. 배우 친구들과 만나는 것도 좋지만 그러면 이야기의 범위가 좁아지거든요. 의상은 어디서 구했는지, 다음에 어떤 작품을 들어가는지, 그 캐릭터는 어땠는지, 이런 이야기는 시야가 빤하잖아요. 그런데 학교 친구들은 경제력에 있어서나 배움에 있어서 높낮이의 차이가 심하거든요. 그런 것이 연기할 때 많은 도움이 돼요. 배우란 인간의 삶, 우리 이웃의 삶을 대신해서 그리는 직업이기 때문에 시야가 넓어야 돼요. 그래서 발로 뛰어 다니면서 어릴 적 친구들의 손을 놓지 않고 지금까지 만나온 것이 참 좋아요.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게 됐나요?
가정학을 공부했는데 전국 대학 방송 경연 대회나 연극 경연 대회에 나가면 자꾸 상을 받는 거예요. 그때는 개성보다 얼굴이나 목소리가 예뻐야 배우를 할 수 있는 시기였어요. 학교에서 교내 방송을 한 적이 있는데 목소리가 예쁘다면서 각종 대회에 내보내는 거예요. 또 학교에서 연극이라도 하게 되면 가정학과에 목소리 예쁜 여학생이 있다며 데려오라고 그랬어요. 계속해서 상을 받으니까 당시 동국대학교 유치진 교수님이 학교에 여학생이 부족하다면서 특기 장학생으로 오라고 하셨는데 안 갔어요. 그랬더니 그럼 연극을 권유하면서 연극을 시켜주셨어요. 그렇게 취미로 연기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거예요.

여자가 연기한다는 걸 곱지 못한 눈초리로 보던 시기였기 때문에 아무리 주변에서 부추겼다 해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아요.
부모님이 열린 분들이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어려서부터 하는 짓이 남달랐대요. 논두렁에서 메뚜기 잡고 뛰어 놀다가도 집에 들어오면 시심이 부글부글 끓는다고 그랬대요(웃음). 들꽃을 머리에 꽂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엄마에게 세계적인 무용수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고요. 그런데 엄마가 또 어디서 찾아 들었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들려주셨어요. 집에서 음악을 틀어주면 전축에서 소리가 기어 나온다고 그랬대요(웃음). 그래서 부모님들께서 내가 조금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셨는데 학교에 가서는 연기가 아닌 다른 공부를 하니 특별하다고 여기셨대요. 사실 다른 공부를 하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어요. 그때는 나라가 가난했기 때문에 엄마가 다섯 아이를 모두 공부시키려면 아버지가 도둑질이라도 해야 된다고 스쳐가듯 말하는 걸 들었어요. 그때 그 말이 가슴에 꽂혔어요. 예술을 하게 되면 부모님이 힘들 것 같았어요. 그래서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받고 빨리 돈을 벌어서 내가 동생 교육을 시켜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동생은 동생대로 성공해서 다음 동생을 공부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해야 다섯 남매가 모두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피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나 봐요. 결국 이렇게 연기를 하고 있네요(웃음). 참 희한해요. 그죠?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 봐요.
전국 초등학교 무용대회에서 드보르자크의 ‘유모레스크’에 맞춰 춤을 춘 적이 있어요. 같이 춤을 추던 아이는 예쁜 옷을 입었는데 나는 무용복이 없었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당신의 인조 속치마를 뜯어서 그 아이의 열 두층 무용복과 비슷한 옷을 만들어 주셨어요. 양말도 없었기 때문에 엄마가 흰 버선을 양말 대신 주셨는데 버선이 자꾸 벗겨지니까 대님을 나비모양으로 예쁘게 메어 주셨어요. 엄마가 무대에 나가서 인사할 때 관객석 중앙 셋 째 줄을 보라고 했는데 쳐다보니 그곳에서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고 계신 거예요. 그때 무대 위에서 계속 엄마를 생각하며 춤을 췄는데 특상을 받게 됐어요. ‘유모레스크’는 중간에 리듬이 조금 늘어지면서 슬픈 느낌이 드는 부분이 있는데 그때 엄마를 바라보니 나를 보며 눈으로 춤을 추고 계신 거예요. 그 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을 느꼈는데 평생 못 잊어요. 어머니로부터 산교육을 받은 거죠. 창의력이란 무에서도 나온다는 것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게 없다는 두 가지를 어렸을 때 엄마로부터 배운 거예요.

<약장수>는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해서 더 특별했을 것 같아요.
맞아요.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올릴 때 처음에는 물이 안 나오기 때문에 펌프에 물을 한바가지를 넣어주는데 그 물을 마중물이라고 해요. 마중물이 펌프에 들어가서 작용을 해야 밑에 있는 물이 끌어 올려지거든요. 엄마는 나를 잘 인도해주는 인생의 마중물 같은 존재에요.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마음껏 펼쳐서 행복하게 살게 해 준거죠. 비록 경제적인 면은 많이 도와주지 못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큰 안내자였어요. 그래서 옥님을 연기하면서 엄마 생각이 많이 났어요. 엄마가 94살에 세상을 떠났는데, 어느 날 엄마를 방문했더니 방에 휴지 꾸러미가 있더라고요. 혼자 사니까 <약장수>에서처럼 ‘떴다방’에 가셨던 거예요. 몇 번 다녀오시고는 중독되겠다며 스스로 발길을 끊으셨는데 그걸 보면서 우리 엄마도 외로우셨나보다, 싶었어요. 4남 1녀를 두셨는데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 바빠서 전화를 못 드릴 때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약장수>를 촬영하면서 엄마 생각이 많이 났어요. 연기라고 할 것도 없이 잘 맞는 옷을 입은 거죠.

어머니가 많이 그립겠어요.
KBS ‘아침마당’에서 목요일마다 하는 명사 특강 프로가 있어요. 그 프로그램을 생방송으로 진행하기로 약속했는데 어머니가 위독하셨어요. 엄마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떠나셨으면 해서 모든 일을 정리하고 한동안 엄마 곁에 있으려고 했어요. 방송국에 전화해서 어머니가 위독해서 방송을 포기해야겠다고 했더니 엄마가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옆에 앉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써’라고 한마디 하셨어요. 특강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어요. 엄마는 딸이 공부하는 걸 전에도 들여다보셔서 파워포인트가 뭔지도 아시거든요. 그러면서 힘든 것도 많이 참고 내색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틀 후에 생방송을 하게 됐어요.

많이 힘들었겠어요.
네. 방송국에는 엄마가 돌아가셨단 말을 안했어요. 그리고 ‘나의 창의력은 어머니로부터’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진행했어요. 내가 아는 많은 것들은 결국 엄마로부터 배운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이었어요. 제가 진행한 강연이 그때까지는 프로그램 역대 시청률 1위였어요.
복지에도 관심이 많은 걸로 알고 있어요. <약장수>는 저소득층의 생활고, 노인문제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다루는데 평소 관심을 가졌던 문제들인가요?
노인 문제로 논문을 쓰고 싶었어요. 대학원 졸업할 때 쓰고 싶었던 주제인데 임상실험이 많이 어려워서 다른 주제로 논문을 썼어요. 선행연구도 드물어서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언젠가 이 주제를 다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약장수>를 만난 거예요. 염두에 뒀던 문제인데 그 고리를 이렇게라도 내가 풀어가는구나 싶어 희한했어요. 사실 자연인 이주실은 즐거운 일이 너무 많아요. 혼자 있어도 재미난 일이 너무 많아서 심심할 겨를이 없어요.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생의 많은 것들이 자꾸만 새롭게 다가오고 가슴에서 무언가가 움터요. 그래서 외롭다, 힘들다, 우울증이다, 라고 말하는 친구들을 보면 이해 못해요. 친구들에게 얄밉게 그런 감정은 이해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어떤 음악이라도 몸을 흔들고 춤을 추라고 말해요. 죽은 세포를 일깨우라면서 무릎을 살짝 치기도 하고요. ‘조건 반사!’ 이러면서요. 노인이 노인을 케어하는 ‘노노케어’인 셈이죠(웃음). 친한 친구들한테는 우스갯소리처럼 말하지만 같은 노인끼리라도 여러 혜택을 받고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나누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고요. 다른 소외된 노인들과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살아야 해요. 우리는 지금 잉여 인간 같잖아요. 일에서 손을 놓고 나서도 많은 시간을 살아야 하는데 그 시간을 아무 의미 없이 밥만 먹고 산다면 생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옥님 역할이 온 것이 기적 같고 감사해요.

노인복지에 관심이 더 높아졌으면 해요.
공부는 학창시절에만 하는 거라는 인식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조금만 알아보면 구청에도 만 원 정도 지불하면 노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실버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많아요. 컴퓨터도 배우고, 그림도 배우고, 꽃 심는 것도 배우고, 얼마나 좋아요.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상태로도 고마울 정도로 잘 진행되고 있는 실버세대를 위한 프로그램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 활동을 하러 나가는 것도 사회생활이잖아요.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니 그런 활동을 하면 덜 외롭잖아요.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집을 나오면 기분 전환도 되고요. 그러니까 제발 보다 활발히 활동하는 노인들을 다룬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최근 <장수상회>가 개봉했지만 노인 문제는 상업영화에서 쉽게 다뤄지기 힘든 소재인 것 같아요.
그런 면이 제일 절실해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꾸 쇠약해져가는 노인 이야기만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이야기가 한 쪽에 있다면, 씩씩한 노인들에 관한 다른 이야기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나이에도 병원장, 이사장, 사회복지재단장 등 사회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아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사회 일각에서 버젓하게 생활하는 노인들의 이야기도 있어야 사람들이 나도 저렇게 늙어야지, 어떻게 준비하면 저렇게 살 수 있지, 그런 생각도 할 수 있잖아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고 요즘 신중년이라는 단어도 나왔잖아요. 저도 혼자 다닐 때는 청바지도 입고 돌아다녀요. 실제로 친구들 중에는 노인이라 불려도 몸은 매우 건강하고 팔팔해서 집에만 있는 걸 억울해하고 쓸쓸해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손자를 봐주면서 밥을 짓는 할머니 역할이 대부분이라 아쉬워요. 다양한 노인의 모습을 그려야 사회도 조금씩 변화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PD나 감독들도 조만간 노인이 될 텐데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 중인 노인들의 이야기를 조금씩 그린다면 본인들이 나이 들었을 때 개선된 환경 속에서 발 맞춰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어머니 역할을 많이 맡아 왔는데 어떤 역할에 매력을 느끼나요?
특별한 준비가 필요하지 않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역할은 재미없어요.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런 역할을 맡아야 된다면 차라리 연기가 아닌 다른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작업을 하며 무언가를 성취해 가는 과정이 연기의 즐거움이고 행복인데 말이에요. 그래서 옥님 역할을 맡게 되었을 때 울었어요. 속으로 ‘조치언 감독이 어떻게 나를 알고 찾아왔지?’라고 생각했다니까요. 마찬가지로 지금 ‘폭풍의 여자’에서 옥자 역할이 왔을 때도 기뻐서 발을 동동 굴렸어요. 왜냐하면 그 역할은 내가 많이 준비해야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이거든요. 이기적이고 제 자신 밖에 모르는 주책바가지에다가 남의 자식을 해코지하는 인물이잖아요. 큰소리로 웃어젖히고 남의 머리채도 잡아 뜯어요. 그러면서 여린 구석도 있고요. 옥자 역이 들어왔을 때 해 볼만 했어요. 그래서 ‘폭풍의 여자’가 끝나가니 섭섭해요. 앞으로 누가 이주실이 이런 연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모험을 걸까, 라는 생각 때문에요.
오랜 연기 생활을 했는데 아직도 배우는 재미를 느끼나보네요.
사람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친구들과 자주 해요. 지금도 우리는 멈추지 않는 성장 단계일 뿐인 거죠. 그래서 오디션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떨어지는 걸 안 부끄러워하니까요.

실패가 두렵지 않나요?
떨어지면 ‘나 떨어졌어!’라며 깔깔깔 웃어요. 뮤지컬 ‘빌리 엘리엇’을 할 때도 그랜마 역을 하고 싶어 하는 지원자가 정말 많았는데 용감하게 오디션을 봐서 뽑혔어요. 그때 다시는 연기를 안 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많은 걸 배웠어요. ‘빌리 엘리엇’은 영국에서 시작된 뮤지컬이라 독일, 호주,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스탭이 왔어요. 그러다보니 작업하면서 문화적인 충돌도 있었는데 여우처럼 극복했어요(웃음). 한 외국인 스탭이 나에게 자기 옆으로 오라면서 손가락을 까닥이는 거예요. 그래서 통역사를 불러 서로 문화의 차이를 알아가자고 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아랫사람을 부를 때도 손 전체를 흔든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결례라 누군가를 부를 때 ‘이리 와 주시겠어요?’라고 상대의 의향을 묻는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부르면 서로 모르는 사이일 경우 싸움이 벌어졌을 거다, 라고 설명했어요. 또 한 번은 그 스탭이 제 연기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면서 왜 한국 배우들은 상대방의 눈을 보지 않고 연기를 하느냐고 묻더라고요. 나 하나로만 한국 배우를 통칭해서 말하지 말라고, 우리 문화는 전하기 어려운 껄끄러운 이야기를 할 때는 상대방 눈을 보지 않고 피한다고 말해줬어요. 눈을 피하는 움직임은 마치 대본의 괄호 속에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적힌 지문과도 같은 거라고 말이에요. 상대방의 아픈 가슴을 차마 마주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눈을 피하는 거라고요. 이번 공연은 한국에서 할 텐데 당신 방식대로 문화가 다른 연기를 하면 한국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겠냐고 설명했더니 알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실패에 두려움을 없애고 계속해서 도전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나를 채워가는 재미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일 거예요. 결과가 안 좋아도 스스로를 채워가는 과정이 참 즐거워요. 목표했던 바가 하나씩 이뤄질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오거든요(웃음). 하다가 안 되면 또 어때요. 될 때까지 하면 되잖아요.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암 투병 경험이 있는데 지금은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해요.
병원에서 암의 크기로 봤을 때 어느 정도의 시간까지만 살 수 있다고 통계적인 수치를 알려줬어요. 하지만 그건 평균일 뿐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을 단정 지을 수 없는 거잖아요. 어느 누구도 세상만사의 결과를 모르니까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데 왜 중시해요? 끝까지 가야죠. 물론 생산적인 일에 관해서만 이야기 하는 거예요(웃음). 또 설사 결과가 원하고 예측하던 바가 아니더라도 노력하는 동안 얼마나 성숙해질 수 있겠어요. 그런 공부는 누가 채근하고 등 떠 민다고 배울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돈과도 바꿀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계속하는 거예요. 한국전쟁이 나서 피난 갔을 때 옆에서 폭탄이 터지는데도 엄마가 나뭇가지를 꺾어다 덧셈, 뺄셈을 가르쳤어요. 피난민들은 우리 엄마더러 미쳤다고 했어요. 그런데 휴전하고 다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덕분에 주저앉지 않고 학년을 그대로 올라갔어요. 그래서 같은 학년 친구들보다 나이가 어려요.

포기하지 않는 정신은 어머니로부터 배운 거군요.
우리 엄마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는 마음은 그럴 거예요.

2015년 4월 23일 목요일 | 글_최정인 기자(무비스트)
사진_김재윤 실장(studio 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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