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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작이니 실망할 필요도 없다 <미션스쿨> 강의석 감독
2015년 10월 26일 월요일 | 이지혜 기자 이메일

작업실의 책장에 영화DVD가 꽂혀 있더라. 좋아하는 영화들인가?
참고가 될 만한 영화들을 빌려다 꽂아뒀다. 거의 모든 영화를 좋아한다. 아트 시네마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기도 했고 영화제도 많이 다녔다. 예전에는 극장에서 하루에 대여섯 편씩 영화를 보느라 한 달 생활비를 영화 보는 데 모두 쓰기도 했다. 최근 본 영화 중에는 <족구왕>이 가장 재밌었다.

휴먼 드라마를 좋아하는 건가?
<전국 노래자랑>을 보고 울기도 했다. 신파를 좋아한다(웃음). 심각하지 않은 영화가 좋다.

의외다.
재미없는 영화, 심각한 척 하는 영화는 보기가 힘들다. 특히 롱 테이크라면서 양말 신는 것만 5분씩 보여주는 영화는 공부할 때만 본다(웃음). 삶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둥 설명만 번지르르한 영화는 보다가 중간에 나온다. 최근에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와 공부가 되는 영화만 본다.

제일 처음 본 영화는 뭔가?
초등학생일 때 청량리에서 <인디펜던스 데이>를 처음으로 봤다.
단편 영화 <아프리카(2007)>, <군대(2009)> 이후 공백기가 길었다.
<군대(2009)>를 찍은 이후 고민이 많았다. 2008년에 병역을 거부하고 세계 평화를 주장하면서 국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는 활동을 해왔다. 결국 수배 당하듯 언젠가 감옥에 가야 하는 처지가 됐다. ‘내가 왜 감옥에 끌려가야 하는가, 그냥 감옥으로 끌려갈 것인가’ 고민이 깊어졌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매년 병역 거부로 감옥에 가는 사람이 700여 명에 이른다. 양심적으로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을 위해 사회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돈을 많이 모아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변호하는 기구를 만들자는 결심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어떤 사업인가?
2년간 학생 이삿짐센터와 24시 심부름센터를 운영했다. 심부름센터에서는 전구를 갈아 끼워주거나 맞벌이 부부를 대신해 자녀를 유치원 차에 태워 보내는 일 등을 했다.

사업 수익은 어땠나?
이삿짐센터는 장사가 잘 됐다. 이사철이면 하루에 4, 50만 원씩 벌기도 했다. 한 번 이사하는 데 2만 원씩 받았으니 하루에 25번 가량 이사를 한 셈이다. 이삿짐센터는 물론이거니와 심부름센터도 굉장히 몸을 축내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업이 활기를 띨 때쯤 모두 처분하고 감옥에 가야 했다. 그런데 사업구조가 그동안 번 돈을 다 잃고 가야 하더라. 감옥에 간다고 해서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게 아니기에 감옥 안에서도 월세는 내야 했고 500만 원에 산 트럭도 200만 원에 처분해야만 했다. 번 돈 없이 거의 빚만 졌다.

감옥에서 나온 뒤 다시 사업을 하지 않고 영화에 뛰어든 이유는 뭔가?
내게 있어서 영화는 고민에서 벗어나는 탈출구였다. 내 열정에는 총량이 있다. 1년 동안 열심히 활동했다면 다음 해에는 잠수를 타야 한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활동을 하다 보면 낯선 사람들과 부딪쳐야 하는 것은 물론 서로 상처를 주고받아야 할 때가 있다. 또한 사람들은 내가 슈퍼맨처럼 종교나 군대 문제 이외의 다른 사회문제에도 참여해주길 바랐다. 한 가지 사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데 다른 일까지 연이어 벌어지는 상황들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가 영화를 시작하게 된 건가?
20대의 화두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아니겠나. 사람들은 가슴 뛰는 일을 하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가슴 뛰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영화 작업을 하게 됐다. 영화 작업은 취미나 적성에 잘 맞았을 뿐 아니라 생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당시에 돈이 없었다. 영화를 하든 사업을 하든 자본금이 필요한데 감옥에 갔다 오면서 이전에 모아둔 돈까지 잃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전과자가 됐고 감옥에서의 단식투쟁으로 건강도 나빠져 있었다. 매달 150만 원씩이라도 벌면서 우선 2,000만 원을 모아야 하는 건가 고민을 하던 찰나에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길을 찾았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독립영화를 발표하는 것을 보고 영화 쪽에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영화는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인 건가?
세상을 바꾸거나 목소리를 드러내기 위해 영화를 택한 건 아니다. 영화 작업은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뛰어들었다.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뭔가?
2007년, 아프리카에서 우연히 카메라를 잡았던 경험이 참 좋았다. 영화를 통해서 그냥 두면 잊고 지나갈 순간들이 영상으로 되살아나 모두와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영화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미지로 구현해낸다. 결국 영화도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는 수단이란 것을 깨달았다.

필모그래피를 보니 조연출 경험이 한 번뿐이다. 부족한 경험이 신경 쓰이지 않았나?
독립영화는 엎어지는 경우가 정말 많다. 계속 작업을 하다가도 영화가 엎어지면 크레딧이 올라가지 않는다. 완성이 돼도 개봉 못하는 영화가 부지기수다. 꾸준히 영화 작업을 해 왔지만 영화 현장은 돈을 벌기보다 오히려 돈을 써야 하는 환경이었다. 결국 생계유지를 위해서 영상 제작 쪽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인터넷 강의 영상촬영 편집 일 등을 해야 했다. 시간이 정말 금방 갔다. 여하간 늘 부족함을 느끼지만 차근차근 밟아나갈 생각이다.
<애국청년 변희재>가 차기작이다.
사실상 내 첫 장편영화는 <애국청년 변희재>다. 이 영화에는 내 모든 열정이 들어있다. <미션스쿨>은 우연히 만든 기획영화다. 예전에 내가 다니던 대광고등학교의 입학식 동영상을 공개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동영상이 사람들 사이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이걸 본 인권단체에서 내게 2,000만 원을 지원할 테니 영화를 찍으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당초 약속과는 달리 인권단체에서는 재정이 여의치 않다면서 1,000만 원만 지원해줬다. 그마저도 1년 반에 걸쳐 분할 지급했다. 결국 <미션스쿨>의 모든 것을 내 돈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찍는 모든 과정에 돈이 들어가더라. 몇 백만 원 나가는 건 우스웠다. 다행히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후반작업을 도와주긴 했지만 대략 내 사비로만 4,000만 원이 투자된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4,000만 원으로 다른 걸 했을 텐데(웃음).

첫 영화가 난항을 겪어 속상했겠다.
돈을 잃은 것보다는 나의 열정을 좀 더 차곡차곡 쌓아서 분출하지 못했다는 게 더 속상하다. 지금도 부족한데 2년 전이면 얼마나 더 부족했겠나. <미션스쿨>의 시나리오도 많이 바뀌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맛없는 요리를 어떻게든 살려보고자 이것저것 넣어보다가 결국은 더 이상한 요리를 만들게 된 기분이었다. 그런 문제점들이 결국 완성도에서 드러났다. 배우들과 스탭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미션스쿨>을 제작하느라 에너지 소비가 컸다.

영화의 시작부분과 결말 부분에서 재밌는 장면을 발견했다. 학생 주임에 의해 학생이 머리를 삭발 당하던 장면인데, 강의석 감독 본인이 직접 연기한 건가(웃음)?
나 맞다. 촬영현장이 열악했다. 사람들이 삭발하는 것을 기피해서 내가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 장면을 왜 넣은 건가?
내 의도가 담긴 몇몇 장면을 삽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체벌이나 두발규제가 정말 큰일이라고 생각한다. 단어도 어려운 혁명이나 계급투쟁 같은 사안보다 나를 실제생활에서 불편하게 만드는 인권적인 사안들에 집중하고 싶다. 야간근무도 마찬가지다. 인권 앞에 사소한 문제가 어디 있겠나?

아쉽게도 <미션스쿨>의 만듦새가 투박하다.
영화 장소 섭외와 촬영 시간 때문이었다. 촬영감독님과 편집기사님, 믹싱팀, DI팀은 모두 실력 있는 전문가였다. 학생 인권을 다루는 영화다 보니 학교 섭외에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 섭외가 된다고 해도 시간 제약으로 인해 급박하게 촬영해야 했다. 엔딩신도 20분 만에 찍었다. 부끄럽지 않은 영화를 만들자던 결심이 깨졌다. 3회 차를 찍고 나니 촬영감독님이 영화를 엎을지 말지 판단하라고 말씀하시더라. 나는 부족해도 끝까지 해보자고 말했다. <미션스쿨>을 많은 관객이 볼 거라 예상하지 않았고 개봉할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첫 작품이 부족한 건 나쁜 게 아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부족한 평을 받으면 된다. 어제 관객 수를 보니 6명이었다. 예상대로다. 이제 시작이니 실망할 필요도 없다.

<미션스쿨>에서 극중 바울이 혼자 고군분투하는 게 외로워보였다.
나는 학교의 방침으로 인해 학교 내에서 철저히 고립됐었다. 바울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환경과 고립감, 외로움을 강조하고 싶었다. 또한 교목실장이던 유상태 선생님이 해고 당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내부고발자들이 외면받는 현실을 그려내고 싶었다. 그런데 관객들은 그 장면에서 나 혼자만의 싸움을 미화한다고 느낀 것 같다. 영화의 배경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 탓이다. 극중 바울은 계속해서 혼자 울고 엄마와 유상태 선생님은 다소 맥락 없이 등장했다. 모든 책임은 감독인 나에게 있다.

배우의 이름도, 극중 주인공의 이름도 바울이다. 기독교의 사도 바울과 연관성이 있나?
<미션스쿨>을 만들 때 주인공의 이름을 성경에 나오는 성인의 이름에서 따오기로 했다. 예수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았기에 요한이나 요셉으로 갈까 했다. 그러다가 바울로 결정했다. 바울은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하면서도 중의적인 인물이다. 혹자는 바울을 예수적인 인물로 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가 예수의 정신을 훼손한다고도 본다. 바울의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전달이 잘 안 된 모양이다(웃음).

강의석 감독은 혼자 활동한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국군의 날 퍼포먼스를 혼자서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국군의 날 퍼포먼스는 30명이 함께 준비했고 현장에도 그 사람들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도 마찬가지다. 같은 학교에는 물론 다른 학교에도 나와 함께 했던 친구들이 많았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학생의 날 행사를 크게 했다. 학생 자유 발언대를 만들어 급식에 벌레가 나오니 급식업체를 바꾸자는 토론도 했다. 토론을 본 학교가 징계위원회를 열어 내게 징계를 주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급식문제에서도 징계를 들먹이는데 종교수업을 거부한다면 분명 퇴학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에게 피해가 갈 것은 자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 측은 나와 이야기만 나눠도 징계를 주겠다며 방송했다. 그래서 같은 학교 친구들보다는 강북구 학생회 연합과 힘을 모았다. 주말마다 6, 7명씩 50회 이상 종교 수업 거부 서명운동을 했으니 나와 함께 했던 친구들이 100명은 족히 넘을 것이다.
당시 고등학생이 종교수업 거부권을 위해 단식투쟁을 했다는 게 크게 주목 받았다. 때때로 단식투쟁의 영향으로 서울대에 갔다는 논란도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나는 공부 잘 하는 학생이었다. 평균점수가 99.7이었다. 그런데 학교가 중간고사를 치르던 나를 퇴학시켜 놓고서는 시험 성적을 전교 꼴찌 수준으로 줬다. 학교장 추천도 해주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그 동안 사회봉사활동을 많이 했기에 사회봉사 선생님에게서 추천서를 받을 수 있었다. 서울대학교도 퇴학 당하기 직전 점수까지만 제출할 수 있도록 양해해줬다. 덕분에 서울대학교의 서류전형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논술과 구술 면접을 치렀다. 당시에는 수험자의 이름표를 가린 채 구술면접을 보는 게 원칙이었다. 나 역시 이름을 가린 채 구술 면접에 임했다. 다만 내 얼굴이 뉴스에 자주 보도됐으므로 면접관이 내 얼굴을 기억했을 수 있다. 그러나 면접관의 기억까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 않나.

크레딧에 보니 제작사가 ‘강의석 필름’으로 돼 있었다. 제작사를 직접 차린 이유는 뭔가?
인권단체가 지원하는 1,000만 원으로는 기존의 제작사와 함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달 월급으로 지급하면 사라지는 액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업자가 있어야 법률관계를 명확히 조율할 수 있었다. 강의석 필름은 법률관계를 조율하기 위해 만든 제작사다. 제작사에는 프로듀서와 나, 촬영감독까지 셋 밖에 없다. 사실상 이 제작사는 <미션스쿨>보다도 <애국청년 변희재>를 찍기 위한 것이다.

제작사 이름을 ‘강의석 필름’으로 한 이유가 궁금하다.
제작사의 이름을 많이 고민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내가 <미션스쿨>을 찍었다는 것을 알 테고 제작사 이름을 달리 한다고 해서 욕을 덜 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강의석 필름’은 우선 가제로 지은 것이다. 나중에 천천히 고민해도 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차기작 <애국청년 변희재>는 소재 자체가 흥미롭다. 변희재 씨와 강의석 감독 둘다 정치적 견해가 굉장히 다른 사람들이지 않나.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느낌이다(웃음).
내가 재미동포 신은미 씨의 콘서트를 촬영하고 있을 때였다. 콘서트 촬영 도중에 폭탄테러 사건을 목격했다. 종북 콘서트라는 프레임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 와중에 변희재 형이 종남 콘서트를 연다고 했다(웃음). 종남 콘서트에 관심이 가서 변희재 형에게 촬영하고 싶다고 연락했다. 종남 콘서트 촬영 현장에서 애국산악회를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애국산악회도 순순히 오라고 했다. 사실 변희재 형과 나는 고소로 맺어진 인연이다. 과거에 변희재 형이 나를 친노종북의 아이돌로 몰아간 적이 있다. 그를 고소했는데 변희재 형이 의외로 순순히 사과를 하더라.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좋아보였다.

변희재 씨와 편하게 호형호제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한 건가?
나는 누구와도 편하게 형, 동생, 한다. 감옥에서 나는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이유로 독방에서 지냈다. 한 쪽 옆방에서는 사형수가, 다른 쪽 방에서는 장차관 같은 정부 고위직 관료들이 수감돼 있었다. 나는 사형수와도 편하게 지내서 그 형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면 받아먹기도 했다. 비록 사형수였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서는 거부감 없이 편하게 지냈다.

어떻게 변희재 씨로부터 영화 촬영 허락을 받아낸 건가?
물론 변희재 형 주위에서도 형을 만류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다큐멘터리는 원본을 공개할 필요가 없기에 변희재 형의 못나고 악마적인 모습만 모아서 편집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나를 가리켜 좌익의 스파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형이 나를 신뢰해줬다. 내가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6, 7번씩 산을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 듯하다. 내가 그렇게 고생하면서까지 변희재 형을 해하는 다큐멘터리를 찍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한 것 같다. 또한 형을 음해하는 다큐멘터리를 찍는 건 내가 나의 인생을 부정하는 일이라는 걸 알아준 셈이다. 지금은 변희재 형과 계약서도 쓰고 형에게 출연료도 지급하면서 70회 차 이상, 70일 이상을 붙어 다니는 상황이다. 변희재 형도 나에게 무슨 이야기든지 편하게 말한다. 영화는 내년에 개봉예정이므로 나도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편집할 계획이다.

변희재 씨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뭔가?
나는 <애국청년 변희재>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점점 더 집단 간 갈등과 혐오가 심해지고 있다. 너무 쉽게 오해가 혐오로 바뀌곤 한다. 특히 여성혐오와 남성혐오가 심각하다. 개인적으로는 좌우대립보다도 여성혐오나 남성혐오가 더욱 심각한 것 같다(웃음).

여성혐오와 남성혐오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군대문제가 여성혐오와 남성혐오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남자들은 ‘내가 군대에서 뼈 빠지게 일하는 동안 너는 행복하게 지내놓고서 왜 임금격차를 운운하느냐’는 시선으로 본다. 여자 입장에서도 남자가 군대를 다녀오면 폭력적으로 변한다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쌓이는 오해가 결국 증오나 혐오로 변질되는 거다.

군대얘기가 나왔으니 묻겠다. 강의석 감독이 등장하는 기사에는 ‘군대나 다녀오고 말해라’는 댓글이 달리곤 한다.
그 사람들은 무언가를 경험해야만 그것에 대해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본데 말 도 안 되는 생각이다. 장애인 권리를 주장하려면 장애인이 되거나 장애인 체험을 해야 하고 여성 권리를 주장하려면 여성이 돼야 하는 건가. 이런 분위기가 만연해질수록 우리 사회가 본질을 말할 수 없게 된다.

언론이 강의석에 대해 가십거리에 집중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이렇게 인터뷰 하는 것 자체가 불편할 수도 있고.
비록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긴 하지만 인터뷰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말한 게 전문으로 실리지도 않고 기자 입장에서 편집되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 언론사와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다. 점심 식사를 하며 오프 더 레코드로 기자와 대화를 나눴다. 그때 기자가 서울대학교에 진학한 게 기득권에 편입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당시 나는 공부를 잘 하면 당연히 서울대에 입학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신이 아닌 이상 모든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때 서울대학교는 김민수 교수의 재임용 문제를 두고 학내 사회가 시끄러웠다. 나도 그 일에 관심이 많았기에 학교에 돌아가면 학내 활동에 동참하고 싶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그런데 인터뷰 타이틀이 ‘서울대를 바꾸리라’로 나왔다. 그 이후 나는 오만하다며 많은 욕을 먹었다. 국토대장정으로 바빴기에 기자의 보도에 대해 그냥 넘어갔다. 사실 많은 기자들이 나를 인터뷰 하겠다며 온다. 그러나 나에 대해 간단한 사전조사도 하지 않고 오는 경우가 많다. 나를 정의석이라 부르는가 하면 내가 어떤 학교에서 단식투쟁을 했는지, 어떤 학교를 다니는지에 대해서 모르기도 한다. 그래서 인터뷰 요청은 거절하지 않되 인터뷰 페이를 받기로 정했다. 자기 돈이 들어가면 더 열심히 하게 되는 메커니즘이 있잖나. 이번 같은 경우에는 배급사에서 영화 홍보를 해야 한다기에 인터뷰를 허락했다.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 같다.
물론 상처받는다. 하지만 보도가 왜곡되는 것보다는 인터뷰를 하느라 시간을 빼앗긴 게 더 속상했다. 기자들이 왜곡하는 부분은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상처를 어떻게 극복하나?
상처를 가라앉히기 위한 잠수기간이 필요한 것 같다. 잠수기간에는 사적으로 만나는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함께하면서 지낸다.

상처를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고자 하는 이유는 뭔가?
나는 사람들이 서로 담을 쌓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에 대한, 그리고 활동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아야 한다. 사람들은 한 사안이 자신의 일이 되기 전까지 행동하는 것을 주저한다. 비정규직 문제에 청소년이 공감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군대문제도 그렇다. 사람들은 군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문제의식을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에 있어서 망설인다. 행동을 망설이는 사람들을 위해 내 연락처를 편하게 공개했다. 내가 활발히 활동하던 2008년에는 하루에 2, 300통의 전화를 받았던 것 같다. 내게 또라이 아니냐고 시비 걸어도 또라이 아니라고, 뭐가 궁금해서 전화하셨느냐며 대화하려고 했다. 진입장벽을 낮춘 덕에 내가 활동하는 모임들도 친구 모임 같이 편안한 분위기가 됐다. 군대문제를 이야기 하는 데에 남자 10명, 여자 20명이 모이기도 한다.

왜 법학과에 진학했나?
생명권이 흡연권보다 우선하듯 종교적 자유도 학교의 자유보다 우선이다. 당연한 일임에도 법으로는 학교의 종교수업 강요를 막을 수 없었다. 종교수업 강요를 경찰에 신고할 수 있는 것도, 형법에 의해 처벌할 수 있는 것도, 헌법재판소로 넘길 수 있는 사안도 아니기 때문이다. 민사소송에 의한 손해배상으로 학교 측에 압박을 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손해배상으로 학교에 압박을 가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선거인단을 모으려고 했지만 아무도 동참하지 않았다. 결국 나 혼자서 6년의 소송 끝에 2,500만 원의 손해배상을 받는 것으로 종교수업 강요 소송이 끝났다. 심지어 고등법원에서는 패소했다. 당시 고등법원 판사가 교회인이라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종교 사립학교가 고작 2,500만 원으로 끄덕이나 하겠나. 그때는 법이 돈 없고 기댈 곳도 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덕 사회구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대로 진학한 이유는 한 변호사의 도움으로 퇴학무효는 아니지만 임시학생 신분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법이 힘없는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는 거구나 싶어 법대 하나만을 지원했다.

학교를 떠난 이유는 뭔가?
6년 간 소송의 결과가 너무 실망스러웠다. 법의 한계를 실감했고 법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법이 세상을 좋게 만들 수 있고 좋은 법을 만들면 우리가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게 충격적이었다. 그러면 내가 굳이 법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학교의 종교 강요 문제는 굉장히 명쾌한 법률문제다. 종교 수업 강요 문제가 6년이 걸린다면 부당해고, 전세문제, 용산 참사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600년이 걸리겠다 싶었다. 그래서 법으로 뭔가를 하겠다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기로 했다. 그럼에도 사회운동을 하는 건 살아가면서 이상하거나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순간들이 쌓이면 어쩔 수 없이 행동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변호사 자격증이 있다면야 그걸로 나설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시위나 UCC영상을 만드는 방식을 택해 사회에 참여하는 거고.

때때로 신분이나 계급이 목소리의 크기를 결정짓기도 한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본 적은 없나?
고등학생 때 열심히 공부했던 이유는 공부를 잘 하면 학교에 내 이야기가 더 잘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 이야기는 학교에 반영되지 않았다. 또한 힘을 가지거나 유력한 정치인, 대통령이 되어 문제를 바꿀 것이라는 사람은 많았지만 실제로 해낸 사람은 없다. 결국 힘을 얻는 과정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신념은 변하기 마련이다. 권력을 가지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회의가 들었다. 만일 내가 변호사 자격증을 갖게 된다면 보다 더 화려한 수식어로 묘사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끝이다. 그래서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게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해 변호사 자격증을 따는 것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회비용으로서 변호사 자격증을 딸 시간에 좋은 영화를 보고 현장에서 스탭으로 일함으로써 사람들을 끌어올 수 있는 매력 있는 영화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병역 거부나 세계 평화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묻고 싶다.
나는 군대를 없애는 게 당장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 자유도 6년을 넘게 소송을 했지만 바뀌지 않았다. 그래도 지향점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군대가 없어지면 우리 사회가 좀 더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다. 예컨대 다들 핵 확산 금지 조약이나 군비축소 기조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나. 다들 무기 없는 세상이라는 평화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것 같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나는 좀 더 나아가 군대를 없애는 것까지 바란다.

강의석이 생각하는 평화란 무엇인가?
세상의 모든 갈등이 없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상대방을 혐오하기만 한다면 같은 땅에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서로가 적이 되지 않고 다름을 인정하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게 진정한 평화인 것 같다. 물론 힘들다는 것을 인정한다. 당장 해고 당했는데 사장을 껴안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그거야 말로 예수다(웃음). 명쾌한 답은 없다. 영화작업도, 평화도 모두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 그 자체다.

제작자, 감독으로서의 포부는 무엇인가?
천천히 생각을 해서 연출이든, 제작이든, PD든 상관없으니 꾸준히 좋은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게 목표다. 오늘은 6명이 <미션스쿨>을 봤지만 다음 영화는 10명이 보면 되는 거고, 그 다음 영화는 20명, 30명 이렇게 늘어나면 된다. 아직 젊으니까 천천히 해도 좋을 것 같다.

2015년 10월 26일 월요일 | 글_이지혜 기자(무비스트)
사진_박광희 실장(ULTR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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