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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감은 불안감이고, 가야할 길은 가야할 길이다 <특종: 량첸살인기> 노덕 감독
2015년 10월 30일 금요일 | 최정인 기자 이메일

데뷔작 <연애의 온도>보다 지켜보는 눈이 더 많은 두 번째 영화 <특종: 량첸살인기>(이하 <특종>)가 흥행부담이 더 높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손익분기점이 더 높으니까요. 손익분기점은 신경 쓰여요.

언론 시사회에서 기자들의 모습을 너무 왜곡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그런 지적은 예상했던 부분인가요.
기자를 소재로 한 영화다 보니 농담처럼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는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의 오락적인 측면을 감안해 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기자의 모습이 왜곡된 것 아니냐는 진지한 질문들이 예상보다 많아 조금 놀랐어요.

<특종>은 전작 <연애의 온도>와는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인데 새로운 시도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요?특별히 멜로만 선호하는 건 아니에요. 편애하는 장르는 없어서 장르에 대한 부담은 없었어요. 하지만 장르를 떠나 두 영화는 성격 자체가 굉장히 다른 영화인 것 같아요. <연애의 온도>는 인물의 감정에 굉장히 집중해야 되는 영화였어요. 그래서 인물의 감정을 제대로 담는 데 심혈을 기울였죠. 영화처럼 느껴지지 않게 하려고 인터뷰 영상이나 망원렌즈로 촬영한 영상을 많이 쓰기도 했고요. 현실적인 톤을 보여주려고 했거든요. 반대로 <특종>은 극적인 느낌을 잘 살리려 했어요. 또 액자구성의 영화다 보니 형식미를 잘 유지하려 한 부분도 있었죠. 그리고 인물에 다가가기보다는 인물이 휩싸인 상황을 보여주려 했어요. 그런 지점들에서 두 영화가 다른 거지 장르 때문에 연출에 다르게 접근한 부분은 없어요.

두 영화가 매우 다른 성격의 영화라고 했는데 본인은 어떤 영화가 더 연출하기 편했나요.
두 영화 모두 굉장히 어려웠어요(웃음). 쉬웠던 지점과 어려웠던 지점이 모두 다른 것 같아요. <연애의 온도>는 어떻게 보면 배우가 일단 감정선을 잘 표현해주면 저는 그걸 잘 담기만 하면 됐어요. 기다려주는 미덕이 있는 영화인 거죠. 하지만 <특종>은 조정석 뿐 아니라 사건을 만들어가는 다른 조연진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앙상블을 함께 신경 써야 했어요. 그런 부분이 조금 어려웠어요.

<연애의 온도>는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많이 수정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특종>은 말한 것처럼 주인공 이외의 인물도 많이 등장해요. <연애의 온도>보다 훨씬 많은 배우들을 통솔해야 되는 영화인데, 현장에서 그런 부분을 장악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나요.
제가 이끌어야 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좋은 동료를 만나는 게 일단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영화가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분들은 그분들이니까요.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그들에게 정확하게만 이야기하면 돼요. 촬영은 그분들과 협업해나가는 작업인 거죠. 물론 나부터가 아직 정리가 안 됐다면 촬영을 절대 시작할 수 없겠지만요. 그래서 두 영화 모두 배우들의 수와 관계없이 내가 찍고자 하는 바와 영화가 도달해야 되는 지점을 정확하게 알고, 그런 부분을 배우들에게 잘 이야기 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그게 어떻게 보면 장악이라면 장악이라 할 수 있는 핵심이겠죠.

동료들에게 본인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 본인만의 유용한 소통 기술이 있다면요.
기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솔직하려고 노력해요. 내가 무엇을 왜 원하는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영화가 나아갔으면 좋겠는지를 최대한 솔직하게 말하죠. 때로는 원하는 장면은 있지만 그게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이유가 막연한 순간이 있긴 해요.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서 전달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럴 때조차 막연하면 막연한 대로 최대한 솔직하게 이야기 하려고 해요. 촬영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다른 스탭들도 모두 경험자기 때문에 나의 그런 지점들을 잘 받아들여 준다는 거였어요. 제가 영화와 그분들을 굉장히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하고 있고 그들을 존중한다는 걸 알아주는 것 같아요.
작업할 때 배우들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인가요?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해요(웃음). 배우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인 것 같다가도 그들과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지 않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때도 있거든요. 진정한 소통여부를 현장에서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촬영하면서 서로 원하는 지점이 맞아 떨어지는 장면이 나오면 사전작업을 충분히 했구나 싶어요. 하지만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눠도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경우에는 그동안 우리는 서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구나, 하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사실 대화도 중요하지만 시나리오에 정말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의 전체적인 방향성 같은 부분은 당연히 대화를 나누지만, 대화를 통해서가 아닌 현장에서 그들이 직접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 또 있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를 조금 남겨 놓아요. 배우들의 예상치 못한 모습을 조금 기대하는 부분도 있고요. 연기도 예술인 거잖아요. 연기자만이 가지고 있는 본인만의 감정과 뉘앙스가 있어요. 그런 것들은 아무리 사전에 조율하려 한다 해도 정확하게 조율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고요. 저 또한 마찬가지거든요.

어쩌면 그런 식으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기 때문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장면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을 것 같아요. <특종>에서 그런 순간은 없었나요?
관객들이 웃고 재밌어 한 장면이기도 한데 허무혁이 본인이 쓴 가짜 편지를 회사에 들고 와서 ‘우리 입 다물어야 될 것 같아’ 라고 말하는 신이 있어요. 마지막 커트에서 허무혁이 ‘아니,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안돼!’ 하고 절규를 해요. 그런데 그 장면을 촬영할 때 조정석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포인트를 조금 높게 잡아 왔더라고요. 그걸 보고 처음에는 어라? 감정선을 이렇게까지 높게 가도 되나, 싶었죠. 그런데 조정석이 허무혁을 연기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왠지 이런 식으로 조금 과하게 반응해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듣고 보니 저도 조정석이 하는 말이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오케이, 한 번 가보자, 해서 감정선을 계획보다 조금 높게 잡아서 촬영을 했는데 편집하는 과정에서 다음 신을 붙여보니 두 신 사이에서 보이는 감정이 대비돼서 반전의 재미를 만들더라고요. 허무혁이 자신이 쓴 편지를 TV에서 직접 읽고 있는 신이 다음 장면이거든요. 그런 장면 같은 경우는 어떻게 보면 조정석이 만들어 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죠.

저도 그 장면을 재밌게 봤어요. 그런데 폐건물 시퀀스 같은 경우는 시간의 컨티뉴이티(장면의 연계성)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건물 신은 어스름한 저녁 무렵인 것 같은데 시퀀스 중간에 삽입된 허무혁의 신은 늦은 밤이더라고요. 편집된 부분이 있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사실 사건의 물리적인 시간 순서에 따른다면 폐건물 신은 밤이어야 맞죠. 하지만 수진과 범인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설정이 너무 늦은 밤에서는 현실감이 떨어질 것 같았어요. 도대체 어떤 여자가 한밤중에 낯선 남자와 그런 공간에 있겠어요. 그래서 폐건물 신은 수진이의 감정선에 맞춰서 조금 밝게 찍었어요. 색보정을 하는 마지막 과정에서 시간의 연속성을 맞춰놓고 보니까 장면의 진행이 어딘가 억지로 시간의 흐름을 설명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인위적인 느낌이 들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죠. 색보정하기 전에 장면들을 우후죽순으로 배열해 놨을 때는 시퀀스별로 그 신을 받아들이는 게 되는데 오히려 시간대를 맞춰 놓고 보니 영화의 사건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점점 흐른다는 또 다른 생각이 개입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 장면에서는 시간의 연속성에 대한 강박에서 조금 해방될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영화가 똑 떨어지는 것도 미덕일 수 있겠죠. 하지만 그 장면에서는 개인적으로 오히려 갑갑한 느낌이 들었어요.

영화를 이성적으로 따라가기보다는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한 거군요. <특종>은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블랙 코미디와 스릴러의 조합이라 눈길이 갔어요. 두 장르를 배합하거나 장르를 전환시키는 부분에 있어서 고민은 없었나요.
영화를 만들 때 여기까지는 코미디, 여기까지는 스릴러, 이렇게 장르적으로 구분짓지는 않았어요. 개인적으로 <특종>의 매력은 의외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쪽 방향으로 흘러갈 줄 알았던 이야기가 저쪽 방향으로 흐르고, 그러다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는 재미가 있는 영화인 거죠. 그런 의외성에 집중해 영화를 만들다보니 초반에는 조금 유머러스한 톤으로 갔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점 더 이야기에 집중한 후반에는 조금 스릴러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 같아요. 하지만 촬영할 때는 장르적 성격에 따라 이분법적으로 이야기를 딱딱 나눠 찍지 않았어요. 그때 그때의 상황에 집중해서 찍었는데 후반작업에서 조금 더 분명하게 이야기의 틀을 짜고 거기에 맞는 음악을 입히다 보니 최종 결과물로서는 장르적인 부분이 많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촬영할 때는 어떤 부분에 가장 많이 신경을 썼나요?
장르보다는 오히려 톤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개인적으로 조금 묘한 톤이라고 생각했는데 톤을 잘 구현해야 될 것 같았거든요. 보통은 레퍼런스를 삼을 만한 영화를 찾게 되는데 <특종>은 생각하고 있는 톤이 나올 만한, 레퍼런스로 삼을 만한 영화가 딱히 없었어요. 그래서 하나하나 더듬거리며 만들어 가는 심정이었죠. 영화의 어떤 부분은 코미디적인 성격이 강하고 또 다른 부분은 스릴러적인 성격이 강하다 하더라도 영화가 어쨌든 일관된 성격을 지녀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런 부분에 집중해서 촬영했어요.

촬영 전에 톤을 확실하게 정하고 시작했나요, 아니면 촬영하면서 조금씩 만들어 갔나요.
지향점은 분명히 있었는데 촬영하면서 톤이 조금 더 높아지거나 조금 더 낮아지는 경우는 있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최종적으로 영상을 정리하면서 톤을 다시 지향점에 맞춰 간 거죠.

전에 없던 새로운 걸 만들 때는 불안감이 생길 것 같아요.
불안감이 있었죠. 하지만 불안감은 불안감이고, 가야할 길은 가야할 길이니까요. 그 불안감이 작업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노력했어요.

평소에 불안감을 잘 털어내는 편인가요.
감정이 저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정리는 잘하는 편인 것 같아요.

<연애의 온도> 때 스스로를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 기사를 봤어요.
만일 제가 감정적인 사람이었다면 <연애의 온도>를 그렇게 연출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스스로를 객관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연애의 온도>는 연애 자체를 조금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부분이 있잖아요. 개인적으로는 <연애의 온도>가 상황을 인물 외부의 시선에서 바라본 영화라고 생각하거든요. 만일 제가 인물들의 상황에 몰입해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게 어려웠을 거예요.

두 영화 모두 사람의 본심과 행동이 반대되는 지점들을 이용해서 코미디를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어요. 본인 스스로도 그런 부분을 인지하고 있는지, 의도적으로 활용하기도 하는지 궁금해요.
<연애의 온도>에서는 그런 부분을 많이 쓴 것 같아요. 그런데 <특종>에서는 잘 모르겠어요.

거짓말이란 것 자체가 본심과 반대되는 걸 이야기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시나리오 작업 과정도 궁금해요. 구상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나요.
작품마다 다른 것 같아요. 정답은 없는 건데 이번 영화 같은 경우는 기본적인 뼈대가 있었어요. 양치기 소년이라는 이야기의 원형에 연쇄 살인범 코드로 살을 붙여 만들었죠.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직업군을 생각하다가 기자를 떠올렸고요. 그런 식으로 조금씩 살을 붙여 나갔어요.

인물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만드는 편인가요, 아니면 사건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만드는 편인가요.
작품마다 다르기는 한데 인물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기는 해요. 인물을 통해 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엔딩이 흥미로웠어요. 원래부터 염두에 둔 결말인가요?
허무혁의 엔딩뿐 아니라 사건의 엔딩까지 모두 기획단계부터 정해져 있었어요. 범인이 만천하에 드러나거나 허무혁이 잡히는 결말보다 사건 자체는 또 다른 아이러니를 발생시키면서 종결되고, 허무혁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의심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엔딩을 원했어요. 허무혁이 죄책감과 불안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일종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엔딩을 미리 설정해놓고 그걸 향해 달려나간 거죠.

그렇다면 기획 단계부터 수진이의 이야기도 시나리오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일 텐데, 사실 수진이와 관련된 서브플롯은 영화에 유기적으로 잘 녹아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가장 눈에 띄는 영화의 약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수진이의 서브 플롯을 메인 플롯에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는 수진이라는 인물도 허무혁이 겪는 상황에 어느 정도 합류를 한다든지 하는 장치들이 필요해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것들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수진이는 수진이만의 드라마를 만들어주는 게 옳은 방법이지 허무혁에게 종속되어 허무혁의 드라마를 도와주는 단순한 조연으로 만드는 건 오히려 재미가 없게 느껴졌어요. 의미도 없어 보였고요. 사실 그런 식으로 작업한 적도 있었는데 작위적으로 느껴졌어요. 물론 허무혁의 드라마에 홀딱 빠져 있는 사람들은 중간 중간에 수진이의 이야기가 나오는 게 툭툭 걸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가면 수진이의 존재 이유나 수진이만의 드라마도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으니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개인적으로는 허무혁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이 캐리커처 식으로 그려졌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영화가 상황극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특종>과 같은 소동극을 제대로 그리려면 특별하고 입체적인 사람들이 사건에 휘말리는 것보다는 복잡하지 않게 상징화된 인물이 특별한 상황에 휘말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게 관객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관객들이 인물을 기본적으로 이해한 상태여야 상황에 몰입해 인물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러니를 공감할 수 있을 테니까요. 특별한 캐릭터가 특별한 상황에 빠진다면 관객들이 상황에 스스로를 이입해 영화를 보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특종>에서는 시청률에 목매는 보도국장이라든가, 아니면 진실을 추구하는 인물이라든지, 어떤 상징화된 인물 안에서 캐릭터를 조금 더 구체화 시키려 했지, 인물 개개인에게 그 이외의 새로운 목적성을 부여하는 건 조금 쓸 데 없는 행위처럼 보였어요.

집중이 분산될 수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죠. 모든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그리면 오히려 집중해야 할 때 집중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 알게 된 건데 18살에 첫 번째 단편 <컨닝>을 연출했더군요.
나이를 만으로 계산하면 그렇죠(웃음).

굉장히 어릴 때 입문한 셈인데 영화 연출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영화를 전공했어요. <컨닝>은 1학년 1학기 초반, 첫 번째 과제로 만든 첫 번째 습작이었는데 생일이 빨라서 입학이 빠르다 보니 나이가 어렸던 거예요.

원래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어 영화과에 지원한 건가요?
영화에 대한 관심은 원래 조금 있었어요. 그런데 영화도 영화지만 그때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었어요. 어떻게 해야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일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가 영화를 하면 연이 닿지 않을까 해서 진학하게 된 거예요.

어떤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나요? 저는 디즈니를 보며 자랐어요.
저도 디즈니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런데 우리 때는 일본 영화, 일본 만화를 많이 봤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것도 많이 봤고요. 애니메이션 뿐만 아니라 만화책도 많이 봤어요.

연출 공부하시는 분들 중에 만화책을 많이 보는 게 도움이 된다는 분들이 있던데 본인은 어떤가요?
연출 도움을 실제로 받은 건 영화를 통해서였던 것 같아요. 만화도 많이 보긴 했는데 영화도 많이 좋아해서 영화를 많이 봤거든요. 하지만 만화도 도움이 많이 되긴 하죠.

2005년에 단편 <마스크 속 은밀한 자부심>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 받은 뒤 다음 영화 <연애의 온도>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어요. 보통은 그런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연출을 포기하게 되는데 그 시기를 어떻게 견뎠나요?
<연애의 온도>로 입봉 준비를 하다 엎어졌을 때였어요. 그때가 아마 말씀하신 대로 가장 많은 사람이 영화계를 떠나고, 저도 그랬을 법한 시기예요. 잠깐 다른 일을 알아보려고 하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정신적으로 너무 힘이 들어서 정신을 조금 다른 곳에다 팔고 싶었어요. 단 며칠, 단 한 달이라도 정신을 다른 곳에 돌려 버리자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시나리오를 쓴 게 <특종>이에요. <연애의 온도>를 2~3년 동안 준비하면서 인물들의 감정에만 계속 매달리고 파고 들다보니 정신적으로 너무 지치더라고요. 그렇게 공들인 영화가 엎어지니 굉장히 허망했죠 (웃음). 그런데 <특종>처럼 드라마가 세고 재미난 아기자기한 상황극, 즉 소동극의 시나리오를 쓰면 조금 치유가 될 것 같더라고요. <특종>는 그렇게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작품이었는데 그걸로 운이 조금 풀린 것 같아요. <특종>의 시나리오를 본 제작사 대표님이 계약을 하자고 했고 진행비를 받게 됐죠. 한마디로 <특종>가 그때의 상황을 타개하는 구원이 된 거죠.
<연애의 온도>보다 특종이 먼저 계약된 작품이었군요.
<특종>으로 본격적인 계약을 먼저 진행한 거죠.

입봉 준비를 하면서 여성 감독이기 때문에 투자 받기가 더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나요? 힘든 시기가 길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그렇게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내가 여자라는 사실은 바꿀 수 없잖아요. 타개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득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투자 같은 경우는 사실 제작사가 접촉하는 부분이라 잘은 모르지만 저에게 복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해요. 지금 같이 일을 하고 있는 회사나 제작사들은 제가 여자라서 안 된다는 식으로 저를 대한 적이 없어요. 여성감독이라고 특별 대우를 하지도 않았고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저 한 명의 감독으로 존중해 준 거죠. 그래서 입봉을 준비하면서 여성 감독이라 불리하다는 건 크게 의식한 적이 없었어요. 물론 영화 연출을 하면서 간혹 가다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빨리 떨쳐 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투자를 받는 건 정말 운이 좋아야 된다고들 하더라고요(웃음).
그러니까요(웃음). 영화판은 능력이 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운이 정말 좋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그렇게 따지면 남자로 태어나는 것도 운이 좋은 거죠. 투자를 받으려면 어떤 배우가 캐스팅 됐고, 투자사의 상황이 어떠하며, 어떤 시기에 영화가 기획되는 건지, 이 모든 운이 전부 중요해요. 그래서 <연애의 온도>가 투자 받은 것도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생각은 해요. 투자를 받는 건 운이 따라줘야 하는 일이 분명 맞지만 투자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감을 느껴요. 왜냐하면 <연애의 온도> 같은 경우는 사실 선배 여자 감독님들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을 때 투자를 받은 거였거든요. 여자 감독님들이 그 당시 좋은 결과를 내고 있으니까 저에게도 조금 더 넓은 기회가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저도 제가 맡은 영화를 잘 연출해서 좋은 결과를 내야지 지금 입봉을 준비하고 있는 여자 감독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사실 동료나 주변 사람들은 저를 여성 감독이라고 해서 다르게 대하는 건 없어도 저 스스로가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 당시 결과가 좋았던 여성 감독님의 작품에는 뭐가 있을까요.
변영주 감독님의 <화차>도 있었어요. 연배 차이가 많이 나는 선배님들이기는 하지만 임순례 감독님, 변영주 감독님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실 때였어요.

다른 일을 할까 생각을 했다고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시나리오가 쓰고 싶었나요. 영화 때문에 힘든 상황이었는데 시나리오란 어차피 영화의 일부잖아요.
솔직히 방법이 없었어요. 다른 일을 알아보자니 굉장한 자괴감이 들었고, 가만히 있자니 엎어진 영화와 인생에 대한 고민이 너무 커지더라고요. 물론 그런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지만 시나리오를 쓰는 게 힘들다는 생각조차 빨리 뛰어넘어서 영화 안에 몰입하고 내 안의 모든 잡생각들을 빨리 떨쳐버리자는 생각 뿐이었어요.

자괴감이라니요?
영화를 전공했고 다른 경력은 전혀 없는 데다가 나이는 29, 30이 된 상태였어요. 다른 일을 하려고 해도 막상 할 만한 일이 없는 거죠. 영화를 하지 않는 내 인생을 생각해 보니 이제까지의 시간이 굉장히 쓸모 없는 시간처럼 느껴져서 자괴감이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오기로 매달린 거군요.
좋은 말로 하면 그렇죠(웃음). 그런데 사실 그때는 오기나 악을 부릴 힘도 없었던 것 같아요. 단지 저를 힘들게 하는 생각을 밀어내려고 <특종>를 작업하기 시작한 거지, 그때는 이 작품으로 다시 일어설 거라는 생각조차 못했어요.

힘든 일이 있으면 이겨내려 노력하는 게 바람직한 일이라는 건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사실 그걸 실천하기는 힘들잖아요. 힘들면 한 없이 힘들기만 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그런 부분을 잘 해결해 나가는 편인 것 같아요.
사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보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에요. 그런데 시나리오를 쓴다는 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저도 이겨낸다는 생각보다는 조금 막연하게 시작한 거죠. 이겨낸다는 생각 자체도 없이 그냥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까, 라는 막연한 생각 속에서 살았어요.
이제는 그런 시기가 지나고 영화 두 편을 찍은 상태예요. 지금 돌이켜 그때를 생각해보면 어떤 느낌인가요.
그런데 그런 시기가 언제든지 또 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두 편의 영화가 개봉했지만 <특종>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아직 모르는데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하지만 너무 괴로운 시기니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죠(웃음).

평상시에 연출 실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일들이 있다면요. 예를 들어 공부를 한다든지.
사실 공부를 정말 해야 되는데(웃음)! 연출할 때 부족함을 너무 많이 느끼거든요(웃음). 늘 이번 작품만 끝나면 빨리 공부를 조금 더 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는데 막상 영화가 끝나면 쉽지 않더라고요(웃음). 연출하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못하거든요. 촬영에만 매진하게 되다 보니 봐야 되는 영화도 밀려 있고, 할 게 굉장히 많아요 (웃음).

시간이 나면 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뭔지 궁금해요.
사실 영화를 봐요. 극장에 가서 못 본 영화를 챙겨봐요. 그것 말고는 사실 딱히 없는 것 같아요. 밀렸던 책도 보고, 한 동안 사람도 못 만났으니까 사람도 보고요(웃음).

영화를 볼 때는 레퍼런스 될 장면을 눈 여겨 보는 건가요?
그런 식으로는 생각 못해요. 사실 어떤 특정 장면을 레퍼런스 한다는 건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엄청나게 잘 만든 영화를 보면 굉장한 자극을 받죠. <특종>의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위플래쉬>를 봤는데 너무 많은 자극을 받았어요. <위플래쉬>도 연출자 나이가 29인가 그렇고 입봉작이에요. 그런데 너무 잘 만들어서 나도 정말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어요(웃음). 나이도 내가 많더라고요(웃음). 그런 영화를 보면 분발하게 되는 거죠. 그 다음에는 영화를 뜯어보면서 그 감독이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어떻게 구성했는지, 어떤 식으로 접근했는지를 살펴보고요. 그런 게 공부가 되는 것 같아요.

현장에서 본인이 부족하다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기술적인 부분은 너무 빨리 발전하기 때문에 그때 그때 부족함을 느껴요. 필름에서 디지털로 변한 부분도 있지만 정말 어려운 게 카메라만 해도 두 작품을 연출한 2~3년 사이에 출시된 종류가 굉장히 많거든요. 그리고 영화 연출 스킬 같은 경우도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특종> 같은 경우는 정통적인 느낌의 영화로 만들고 싶었어요. <연애의 온도>가 현대물 같은 느낌이라면 <특종>은 제가 좋아했던 70년대 할리우드 스타일의 느낌으로 가고 싶었죠. 어쨌든 기술적인 부분이나 표현 방법에 있어서 조금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해요.

스스로 생각하는 본인의 연출가로서의 장점은 뭔가요.
콘셉트 잡는 걸 좋아하는데 콘셉트를 잘 잡아서 관객들이 영화를 빨리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 보이는 화면과 그 화면들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장면들을 연출할 때 콘셉트를 잡는 걸 재밌어해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특종>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요.
예를 들면, 타이틀 장면 같은 경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사건 브리핑을 한다는 소식에 마구 달려가잖아요. 그리고 난장판이 돼서 우르르 무너져요. 그런데 우르르 무너지는 것 자체를 현실감 있게 그려내면 뭔가 역동적인 장면이 될 수는 있겠지만 저는 그 장면을 굉장히 우스꽝스럽게 그려내고 싶었거든요. 그 장면이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은유하는 느낌을 가졌으면 했어요. 기자들이 경찰을 깔아 뭉개는 장면이니까요. 그런 식으로 장면의 콘셉트를 잡는 거죠.

매 장면의 콘셉트를 잡는 게 빠르다는 말이군요.
빠르다고 하면 좀 건방져 보이고(웃음) 제가 그런 작업을 흥미롭게 생각한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방금 설명한 장면에서의 경쾌한 음악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관객들이 극장에 와서 영화를 볼 때 <특종>이 어떤 색깔의 영화인지를 초반에 잘 이해하고 보는 게 감상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초반에는 영화의 톤을 소개하는 차원에서 그런 경쾌한 음악들을 콘셉트에 맞게 썼죠.
좋아하는 감독은 누군가요?
이안 감독의 작품은 무조건 좋아해요.

어떤 면이요?
영화로서의 밸런스가 완벽한 것 같아요. 재미도 있고, 영화를 본 시간을 굉장히 가치있게 만들어 줘요. 그리고 그분의 영화들은 매우 용감하다고 생각해요. 또 영화에서 그분의 성품이 느껴지는데 그런 부분이 너무 좋아요.

용감하다고 하니까 아까 놓친 질문이 생각 났어요. 아까 <특종>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했는데 어떤 부분인가요.
<특종>는 사실 ‘톤의 영화’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물론 드라마도 있고 허무혁이라는 인물도 있지만 연출하는 입장에서는 ‘톤의 영화’인 것 같아요. 톤을 제대로 잡느냐, 안 잡느냐가 영화가 잘 만들어졌느냐, 못 만들어졌느냐의 기준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톤을 잡는다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거든요. 전형성을 이용하면서도 전형성을 탈피해야 하는 선택의 연속이니까요. 그런 부분이 가장 큰 숙제였어요.

용기 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데 의의를 느끼나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감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제 탄탄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한 입장에서 연출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요.
탄탄하지 않아요. 이것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 같은 겁니다! (웃음) 그런데 저도 막다른 골목에서 어떻게 보면 영화로 해답을 찾은 거잖아요. 글쎄요. 영화는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은 적은 예산으로도, 하다못해 핸드폰으로라도 영화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들이 만들어지고 있거든요. 현실은 물론 힘들겠지만 영화를 직접 만드는 걸로 치유가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싶어요(웃음).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은 없나요?
아직 없어요. 이제 시작해야 돼요.

서랍만 열면 나오는 준비된 시나리오들이 있는 건 아니고요?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웃음). 써 놓은 게 없어서 다시 작업해야 해요. <특종>이 사실 20대에 작업한 것의 종착역이고, 이제 다시 시작해야죠.

또다시 높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거군요.
그렇죠(웃음).

2015년 10월 30일 금요일 | 글_최정인 기자(무비스트)
사진_박광희 실장(ULTR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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