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리 토끼를 잡다 <악녀> 정병길 감독
2017년 6월 12일 월요일 | 김수진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김수진 기자]
대부분의 작품이 할리우드의 형식과 규칙에 안주한 채 제자리 걸음 중인 오늘 날. 답습을 거부한다는 건 어느 정도 보장된 수익을 포기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연출자가 있다. 바로 정병길 감독이다. 그는 액션물 <악녀>를 통해 한국영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웠고, 전작 <내가 살인범이다>(2012)에서부터 보여준 실험적인 카메라 구도와 독창적인 액션신으로 한국을 넘어 칸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문득 정병길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는 무엇일까 궁금해진 시점에서 직접 만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칸에 이어 한국에서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겠다.
요즘 여러 매체와 인터뷰 하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웃음)

5년 만에 칸 영화제와 언론시사회의 큰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접한 소감이 어떤가.
특별하진 않다. 촬영, 편집 과정에서 백 번 넘도록 봤던 장면들이라서… 촬영 당시 시간이나 제작비 등 현실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터라 몇몇 장면에선 아쉬움이 느껴지더라. 후반 작업도 급하게 마무리했었다. 그래서 언론시사회 이후 음향 싱크를 다시 맞추는 등 일부 수정에 들어갔었다.

<악녀>를 기획하는 단계에서 어려움은 없었는지 그리고 칸 영화제 출품은 처음부터 예정돼 있었는지 궁금하다.
일단 장르 영화이고,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 주체 액션물이라는 점에서 칸 영화제와 같은 유수의 영화제 초청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흥행되지 않을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럼에도 칸 영화제 출품 기간에 맞추기 위해 제작, 촬영 일정을 타이트하게 잡았는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많은 분들이 의문을 갖기도 하더라. 사실 알 사람은 알겠지만 한국 영화가 한 해에만 대략 70편정도가 개봉되고 대부분의 한국 영화들이 유수의 영화제 출품을 목표로 두고 기획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결과적으로 출품 기간에 쫓기다 보니 후반 작업을 확실하게 끝맺지 못해 내심 불안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칸 영화제에 초청이 돼 놀랐고 뿌듯했다.(웃음)
장편 영화 연출 세 번째 만에 칸 영화제에 초청됐는데, 만족스러운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글쎄, 말이 세 편이지 10년 동안 연출한 장편이 세 편이면 속도가 빠르다고 볼 수 없다. 영화제 초청도 마찬가지고. 물론 누구나 초청되는 영화제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타 감독들에 비해 일찍 주목 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늦은 케이스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변의 동료 영화 감독들을 보면 영화 연출을 시작한 지 시간이 꽤 흘렀지만 여전히 어려운 상황에 처한 분들이 상당하다. 그래서 답하기 더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다. 여하간, 28세 때 본격적으로 입봉작을 선보였다. 솔직히 영화 감독으로서 시작이 빨랐던 것도 아니었고... 가끔은 조금 더 일찍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계기로 영화계 진출을 결심했나.
미술과 영화 연출이 본질적으론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이질감 없이 직업을 전향할 수 있었던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잘하는 일보다 좋아하는 일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 결국엔 잘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여튼, 액션 스쿨에서 공부하는 것을 시작으로 영화계에 발을 담그게 됐다.

이번 영화에 대한 만족도는 어떤가.
<악녀>가 전작 <내가 살인범이다>보다 완성도 측면에서 훨씬 더 낫지만 아까도 이야기 했듯이 제작할 때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좀 더 공을 들이지 못한 점이 아쉽다. <내가 살인범이다> 때 액션 신을 연출하면서 겪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악녀>는 더욱 투철하게 준비했다, 그러나 생각했던 대로 완벽할 수만은 없더라.

<악녀>와 <내가 살인범이다>간에 유사한 신이 몇 가지 있다. 이번 작품으로 인해 정병길 표 액션이 무엇인지 더욱 확고하게 보여준 느낌인데.
그렇다. 카 체이싱 연출 같은 경우는 항상 머릿속에 그려놓는 액션신이라서 이번 작품에서 업그레이드 시켜 등장시켰다. 특히 자동차 보닛 위에서 펼치는 액션 신은 두 작품에서 모두 등장했는데 다른 점이라면 <악녀>에서는 ‘숙희’(김옥빈)가 보닛에 올라 팔을 뒤로 뻗어 깨진 창문 너머로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한다는 것이다. 충분히 신빙성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서 연출했다. 완성시켜 놓고 보니 그럴 법하게 그려진 듯해 만족스러운 신 중 하나다.
반면 두 작품 간에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살인범이다>는 미디어 풍자 등 사회적 메시지가 녹아있다. 그런데 <악녀>는 메시지보단 장르적 쾌감을 구현하는 데 더 힘을 준 듯하다.
맞다. <내가 살인범이다>에서는 TV가 자주 등장한다. 미디어를 제3자의 시선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악녀>에서도 마찬가지로 CCTV모니터가 등장하는데 시나리오 맥락상 필요한 설정이었지만, 어떤 상징으로 바라보고자 한다면 나름 해석할 가치가 있다. 흔히 오늘 날 사람들이 CCTV를 비롯해 스마트 폰, 노트북 등에 달린 각종 카메라에 노출돼 있지 않나.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감시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경각심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악녀>는 이왕이면 오락물로 바라보고 즐기길 권한다. 만드는 입장에서도 장르적 쾌감에 더 무게를 두고 연출했다.

그렇다면 영화의 주제는 무엇이라고 봐야 할까. 권선징악인가.
권선징악보다는… ‘숙희’라는 한 여성의 한 서리고 굴곡진 삶이 중심 주제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상상력 넘치고 다채로운 액션신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관객들은 언제나 새로운 걸 원한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장면엔 대체적으로 흥미를 갖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늘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인 듯싶다. 그래서 여성 액션이지만 칼이나 도끼 등 다양한 무기를 사용했고, 카메라의 움직임도 불안감을 가중시키기 위해 남다르게 다루려고 했다.

연출작들을 보면 오프닝 시퀀스가 인상 깊던데.
해외에서도 <악녀> 오프닝 시퀀스에 대해 칭찬을 많이 해주더라.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장면이었다. <하드코어 헨리>(2016)처럼 슈팅 액션게임이 연상되는 1인칭 시점으로 시작해 롱테이크로 오랜 시간 총칼로 결투를 펼친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3인칭 시점으로 카메라의 시선이 전환되고 이윽고 ‘숙희’ 모습이 드러나는 구성이다. 그때의 짜릿함이 상당한 듯싶다. <내가 살인범이다>에서도 오프닝 시퀀스에 대한 호평이 많았다. 핸드 헬드 기법으로 극중 ‘형구’와 살인 용의자의 추격신을 격렬하게 따라 붙었는데 찍고 나서 보니 카메라가 심하게 흔들려서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데 뜻밖에 관객 분들은 높은 점수를 줘서 놀랐다. (두 작품 모두) 롱테이크로 찍어서 되려 지루하게 비춰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의도적으로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그랬기에 더 좋게 봐준 게 아닌가 싶다.
그밖에 애정하는 장면이 있다면.
전반적으로 작품 속에서 한국의 여타 액션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이고 신선한 액션을 연출하려고 노력했다. 그 중에서도 오토바이 위 장검 액션신은 독보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 같다. CG를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속도감이 충분히 살아서 만족스럽다.

며칠 전 김옥빈과 인터뷰했을 때 작품의 잔혹함 정도를 두고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다는 말이 나왔다. 감독의 생각은 어떤가.
억지로 잔인하게 보이기 위해 피를 과도하게 사용한 건 아니다. 단, 가해자인 ‘숙희’를 피해자처럼 그리고 싶어서 피범벅을 의도한 건 있다. 영화를 보면 핏줄기가 여기저기 뿜어져 나오지 않나. 결국 처치 당한 상대방의 피가 ‘숙희’에게 잔뜩 묻는데, 혈전을 끝낸 뒤 ‘숙희’의 모습을 보면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온다. 그런 ‘숙희’의 모습에 의미를 둔다면 작품이 좀 더 가치 있게 다가올 듯싶다.

가장 아쉬운 신은?
‘숙희’가 요정에서 한복 속치마만 입고 비녀로 혈투를 벌이는 장면이 있다. 그 신을 마지막 회차에 찍었던 터라, 시간이 굉장히 부족했었다. 더 찍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쉽게도 1회차 만에 촬영을 끝마치고 말았다. 사실 그 신을 시나리오 상에서 기획했을 때만 해도 압도적인 액션신이 탄생될 것 같다는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막상 결과물을 보니 부족한 게 많아 가장 아쉬운 신으로 남는다.

한국의 전통적인 매력이 담겼어야 할 요정 액션신이 아쉬움으로 남은 한편, 한국적인 색채가 진한 OST는 작품 속에서 제 역할을 했다는 느낌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OST를 선정할 때 신중을 상당히 기했다. 꽹과리 같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타악기의 매력을 녹여내면 어떨까 싶었고, 결과적으로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 것 같아 만족스럽다.
김옥빈과 신하균은 스크린에서 익숙한 배우들인데, 성준은 브라운관에 더 익숙한 배우다. 캐스팅은 직접 했나.
그렇다. 드라마 <상류사회>를 보고 멜로물에 탁월한 배우인 듯싶어 ‘현수’ 역할에 직접 캐스팅했다. 성준만이 가진 부드러움이 좋았다. 함께 촬영을 하면서 더욱 눈길이 가는 배우이기도 했다. 보통 영화 촬영 시작 전에 고사 리딩이라는 형식적인 자리를 갖는데 대부분의 배우들은 감정 없이 대사만 읊는다. 그런데 성준은 달랐다. 리딩 전부터 열심히 연습을 해왔는지 온 감정을 담아 열연을 펼치더라. 사실 그렇게 열심히 할 거라고 생각 하진 않았는데 매 촬영 때마다 캐릭터에 대한 분석도 철저하게 해오고 진지하게 임해줘서 고마웠다.

‘숙희’와 ‘현수’의 멜로신이나 ‘중상’과 ‘숙희’의 과거가 교차편집으로 등장하는데 시나리오에서부터 그렇게 설정됐던 건지 아니면 촬영을 진행하면서 수정한 건지 궁금하다.
교차편집과 멜로가 영화의 몰입을 깨트린다는 평도 일부 있더라. 난 교차편집과 장르 전환을 통해 액션신에서 느껴질 권태로움을 상쇄시키고 싶었다. ‘숙희’와 ‘현수’의 멜로는 보는 사람들이 한 템포 쉴 수 있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또 ‘숙희’와 ‘중상’의 과거 신이 교차편집된 것은 원래 시나리오에서부터 있었던 구성이었다. ‘숙희’와 ‘중상’의 전사가 대폭 축소되긴 했지만 여성인 ‘숙희’가 남성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게 되는 원동력을 교차편집을 통해 충분히 끌어냈다고 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과거가 바로 ‘숙희’가 가진 괴력의 원천인 것이다.

‘숙희’를 연기한 김옥빈의 말에 따르면 연기 디렉션이 거의 없었다고.
평소에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다. 솔직히 배우들은 이미 프로이기 때문에 감독이 디렉션을 주구장창 하는 것을 싫어한다. 물론 일부는 자세하게 설명하는 디렉션을 선호할 순 있지만, 극히 일부라고 생각한다. 배우들 나름대로 자신만의 표현방식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감독이 무언가를 요구하면 오히려 어긋나고 그 결과, 연기를 어색하게 펼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마치 왼발 잡이 축구선수가 오른발로 공을 차려고 하면 힘들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물론 양발잡이라면 어느 쪽이라도 걱정 없겠지만.(웃음)
<악녀>가 전세계 136개국 선판매된 데 이어,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 제의도 상당하게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감독의 해외 진출이 코앞이다.
예전부터 할리우드 진출을 꿈꿔왔다. <악녀>에 대한 전세계적인 관심을 기점으로 할리우드 어느 제작사에서는 함께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제안도 해왔다. 현재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 중이다.

차기작도 액션일까.
현재 영화 제작사 대표로 있는 친형(정병식)과 전부터 함께 구상해온 시나리오 몇 개가 있다. 코미디, 드라마 장르 등 다양한 작품들이 있는데 차기작은 어떤 게 될지 아직 모르겠다.

앞으로 연출자로서 어떤 행보를 보여줄 건가.
이번 <악녀>도 많은 분들이 호평을 해주긴 했지만, 내 눈엔 실수한 것만 보이고 아쉬운 부분이 꽤 남더라. 앞으로는 지난 작품들을 타산지석 삼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관객들에게 완벽한 작품을 선사하고 싶다.

이번 영화 스코어는 어느 정도 됐으면 하나.
손익분기점(190만명)만 넘으면 좋을 것 같다.(웃음)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행복했던 기억은?
너무 당연한 말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칸 영화제에 다녀온 게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아닌가 싶다. (웃음)

2017년 6월 12일 월요일 | 글_김수진 기자(Sujin.kim@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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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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