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적인 '집순이' <장산범> 염정아
2017년 8월 18일 금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화려한 삶을 살았다. 1991년 미스코리아 선(善)을 차지했고, 이듬해 미스인터내셔널에 3위에 올랐다. 자연스럽게 연예계에 데뷔해 25년간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는 배우로 살았다. 흔한 구설에 한 번도 오르지 않은 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확히 구분하려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태도 덕일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타인과의 만남에 훨씬 여유로워졌지만 여전히 가족과 보내는 안온한 하루로 가장 큰 위안을 얻는다. 스릴러 <장산범>이 주부 생활로 여념 없던 그의 심장을 뛰게 한 까닭에, 수수한 ‘집순이’ 염정아가 다시 한번 배우 염정아로 나들이를 나섰다.

개인적인 감사 인사로 인터뷰를 시작하고 싶다. <판도라>(2016)에 출연한 배우 문정희를 인터뷰할 당시, 운 좋게도 당신이 그에게 선물한 사과를 얻어먹었다.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웃음)
아~ 그 사과 너무 맛있지 않았나.(웃음)

절친한 후배인 문정희의 대표작 중 하나가 허정 감독의 전작 <숨바꼭질>(2013)이다. <장산범> 촬영에 돌입하기 전, 감독의 성향이나 작업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 같다.
영화를 꼼꼼하게 잘 찍는다면서 워낙 좋은 얘기만 해줬다. 사실 감독님 첫인상을 보면 스릴러 영화와 잘 어울리지 않는 순진하고 착한 느낌이다. 실제 성향도 비슷하다 보니 촬영 현장도 큰소리 한 번 나지 않고 조용했다. 그런 사람 머릿속에 어떻게 이런 내용이 구상돼 있는지 싶더라.

언론시사회 때 들어보니, 워낙 조곤조곤 말하는 스타일인 것 같더라.
그러니까 힘들지.(웃음) 이 장면에서는 이런 대사가 들릴 예정이고, 좀 이따 어떤 신호가 들리면 저쪽에서 저런 소리가 들릴 거라는 식으로 상황 설명을 해주시는데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네?” 하고 되묻기도 했다.

시각적 자극을 중점에 둔 여타 공포 스릴러와 달리 <장산범>은 누군가가 내 가족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는 설정의 ‘청각 스릴러’다. 후반부 촬영 당시에는 인이어를 끼고 연기할 정도로 소리에 집중했다고 들었다.
놀라는 연기는 상상으로 할 수 있지만, ‘희연’이 어떤 선택을 하는 결말부분에서는 청각적 도움을 받지 않으면 감정을 잡기 너무 힘들 것 같았다. 계속해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설정이라, 미리 아이 목소리를 녹음하고 그걸 들으며 연기했다.

스릴러 장르에 출연하는 건 <장화, 홍련>(2003) 이후 무려 14년 만이다. <장산범>이 당신의 마음을 끌어당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개봉을 앞두고 <장화, 홍련> 이야기가 많이 들려오는 걸 보니, 새삼 그때의 내가 운이 좋았구나 싶다. 관객이 많은 사랑을 준 작품인 데다가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걸 보면 말이다. <장산범>은 내가 연기할 부분이 있다는 게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단순한 공포영화가 아니라 ‘희연’의 드라마가 녹아있다. 그의 행동에 굉장히 공감했다.
공포물인 동시에 ‘아이를 잃은 부부’라는 설정으로 모성애/부성애를 원동력 삼는 작품이다.
감독님은 엄마의 감정에 관한 부분에서는 늘 내게 확인하셨다. “선배, 엄마는 이렇게 행동하는 게 맞겠죠? 라고 물으면 나는 맞다고 대답해주곤 했다. 결혼을 안 한 분, 엄마가 아닌 분이라면 그런 지점이 크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시나리오의 엔딩을 보고 엄청 울었다. 나라도 ‘희연’처럼 행동했을 것 같았다.

감독은 당신을 캐스팅 1순위로 생각했다고 하더라.
그렇다고 말은 하시더라. 속마음은 들어가보지 않아서 모르지만.(웃음)

스스로의 연기에 대해 평가하자면.
영화에는 만족하지만 내 연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좀 더 디테일하게 표현했으면 좋았을 것 같은 부분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인지는 말 안 하겠다.(웃음)

알겠다.(웃음) 남편역으로 출연한 박혁권은 당신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그와의 연기 협업은 어땠는지.
연기 호흡은 더할 나위 없이 잘 맞았다. 카메라 앞에 섰을 때는 진짜 남편처럼 편했다. 현장에서 남배우, 여배우 분장실을 따로 쓸 수 있도록 배려해준 덕에 정작 개인적인 대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오히려 홍보하면서 같이 밥도 먹고 친해진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친하다’고 인터뷰를 했는데 박혁권씨는 ‘안 친하다’고 딱 짤라 인터뷰했더라고.(웃음)

어째서 그런 상황이...(웃음)
기준이 다른 거지. 난 밥 같이 먹고, 마주보면서 웃고, 스스럼없이 대화하면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그쪽에서는 사적으로 연락하는 사이가 아니면 친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더라. 내가 문자 한 번 보낸 적 있냐는 식이다.(웃음) 브라운관, 스크린에서 볼 땐 워낙 센 역할만 맡아서 성격이 저럴 줄은 몰랐다. 하루 종일 무슨 장난을 칠 지만 생각하는 것 같다.(웃음)

이렇다 할 한국 공포영화가 없는 올해 여름 극장가에서 비교적 호평받는 분위기다.
음. 난 호평’만’ 봤는데…?(웃음) 물론 호평 밑에 몇 가지 아쉽다고 쓴 내용도 있었지만 어떻게 모든 점이 다 재미있을 수 있겠나. 스탭을 위한 시사를 진행할 때 우리 회사(아티스트컴퍼니) 분들도 함께 관람을 했는데 마침 내 옆에 고아라가 앉았다. 소리를 정말 많이 지르더라. 난 그게 너무 좋아서 웃음이 났다.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무서워? 하면서 말이다.
내색을 하지 않을 뿐, 배우도 자기 영화에 대한 좋고 나쁜 평가를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럴 때는 흥분도 되고, 힘이 난다. 자신 없는 작품을 홍보해야 할 경우 아예 입을 다무는 스타일인데, 이번 작품은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 이 마음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즘 기가 좀 살아있는 편이다.(웃음)

올여름 개봉한 작품 중 유일한 여자 주인공이기도 하다.
<범죄의 재구성>(2004) 때만해도 여자들이 할만한 역할이 많았다. 활동을 쉬던 결혼 전에도 시나리오는 꾸준히 줄었다. 그런데 지금은 받는 작품 편수가 현격히 줄었다. 내 경우는 나이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젊은 여자 배우들도 딱히 작품을 많이 하는 것 같지는 않더라.

왜 그럴까.
아마 스코어 때문이겠지. 투자 자체가 잘 안 되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 속상하다. 그래도 나이를 먹은 만큼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은 더 많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는 여전히 기대되기도 한다.

벌써 데뷔한 지 25년 차다.
내일모레 50이다.(웃음) 20대 초반에 내 연극 작품을 봤던 꼬마가 훤칠한 청년으로 성장해 드라마에서 시동생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때는 내 키의 반 밖에 안 되는 초딩이었는데 지금은 같은 어른인 걸 보니 ‘아… 세월이…’(웃음) 싶더라. 스스로는 많이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역이었던 여진구, 이세영, 문근영 같은 친구들을 보면 나도 나이를 많이 먹었구나 싶다.

영화 촬영 현장도 상당히 변화했다.
함께 일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젊어졌다. 예전에는 감독님이 나보다 열 살씩 많았는데 이제는 나보다 어리다. 모든 스탭이 나보다 어린 경우도 있다. 그럴수록 더 어른스럽게, 선배답게 행동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촬영시간을 엄수하는 노동 문화도 자리 잡고 있다.
사실 나는 옛날 사람이라…(웃음) 필 받으면 ‘아 오늘은 더 찍어도 될 것 같은데…’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스탭들의 노동 시간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내일 다시 찍어야 한다.
개인적인 변화도 겪었다. 결혼을 했고, 엄마도 됐다. 육아와 연기를 병행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망설임 없이) 힘들지. 그래도 받아들이고 헤쳐나가야 한다.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나.
열심히.(웃음) 어느 한쪽에도 무게추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 일을 하고 싶다고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해야할 일을 다 못하면 현장에 나왔을 때 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렇다고 너무 아이들에게만 치중하면 하고 싶은 일이 자꾸만 내 뒤를 잡아끈다. 그러니 남편과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나와서도 열심히 한다. 나만 힘들면 되니까.

흠.(한숨)
뭘 선택했든 무조건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그런데 요리는 최선을 다해도 잘 안되더라.(웃음) 겁부터 먹으니 자꾸 쩔쩔매고 그러니 맛을 못 낸다. 그래도 계속한다. 조금씩 늘고 있다.

왠지, 남편이 요리를 잘 할 것 같은데(웃음)
원래는 부엌에 잘 안 들어오던 남잔데, 최근에는 주말마다 거의 부엌에 있다. 아이들이 아빠가 만들어준 요리를 정말 맛있게 먹는다. 나도 맛있게 먹는다. 그런 걸 보면 마음이 좋은 모양이다.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우리 식구 네 명은 아무튼 매일 같이 모여 있는다. 그게 참 든든하고 위로가 된다.

영 힘들어만 보이지는 않는다. 결혼이든, 출산이든 자기 선택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과거보다 결혼한 내가 더 좋은 쪽으로 변화했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일이 끝나면 집에서 가족들과 있는 것 외에는 밖에도 잘 나가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는 게 불편해서 미스코리아 모임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남편 모임까지 다 따라 나간다.(웃음) 남편도 재미있어 한다. 반대로 내 친구나 후배를 만나기도 한다. 그쪽 남편까지 함께 만나면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가도 문제가 없다.

긴 연예계 생활에도 구설에 오른 적 없는 당신 아닌가.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편이다. 실수를 안 하려고 노력도 많이 한다. 그리고, 예전부터 밤에 잘 안 돌아다닌다. 술도 집에서 즐긴다. 그래서 문제 일어날 일이 없다.(웃음)

은근히 집순이다.(웃음)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겠다. 엄마의 직업에 대해 알고 있는가.
물론이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이 어딜 가냐고 물으면 연기하러 간다고 말을 해왔으니까. 엄마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려주고 싶어서 <여선생 대 여제자>(2004)를 보여준 적도 있다. <카트>(2014)는 보여주고 후회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나?
이름 모를 아저씨들이 엄마를 밀고 때리는 장면을 보면서 ‘진짜 때렸냐’고 울더라. 화면 안에서 엄마가 우니까 따라서 울었던 것 같기도 한데, 왠지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파업이 주된 소재인 만큼 격정적인 장면이 몇 차례 등장한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한 덕에 JTBC 뉴스룸까지 출연했다.
(절레절레) 그때 너무 많이 떨었다. 대학 입시도 아니고 그렇게 떨다니… 생방송인 데다가 뉴스에 출연한다는 사실에 겁을 먹었다. 게다가 손석희씨가 옆에 앉아있는데 머리가 다 하얘지더라. 너무 부끄러워서 내가 출연한 영상을 한 번도 다시 본 적이 없다.(웃음)

그래도 당신에게 큰 추억을 남겨준 작품일 것 같다. 함께 호흡을 맞췄던 배우들과도 정이 많이 들었을 텐데.
한 명 한 명 다 기억난다. 서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동료의식이 생겨서 서로 끈끈했다. <장산범>에 출연한 길해연 선생님도 그때 ‘진상 고객’ 역할로 출연하셨다. 문정희에게 “무릎 꿇어!”하고 소리치는.(웃음) 요즘에는 (돌아가신) 김영애 선생님도 많이 생각난다. 그립다.

앞으로 어떤 작품에 자주 출연하고 싶은지.
맡는 영화가 워낙 무거워서 코미디를 하고 싶다. 평상시에도 개그 하는 걸 좋아한다. 로맨틱 코미디도 좋고, 휴먼 코미디도 좋고, B급 코미디도 좋다.

올해의 목표가 있다면.
영화든 드라마든 올해 안에 좋은 작품을 만나서 작업을 시작하는 것. 그리고 두 아이들의 2학기를 잘 준비하는 것.

인터뷰를 하면서 느끼는 건데, 말이 그리 긴 편은 아닌 듯하다.
오늘 상당히 길게 한 거다. (홍보팀을 바라보며) 나 오늘 완전 길게 하는 거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 하고 말이야.(웃음) 내 연기를 말로 설명하려니 부끄러워서 그렇다. 홍보할 때가 제일 힘들다. 그냥 알아서 잘 써주면 안 되나 싶다. 워낙 말이 짧아서 인터뷰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다. 나랑 인터뷰하면 오히려 기자가 불편할 거다. 나랑 린아(<장산범>의 아역 배우)랑 같이 다니면 더 대박이다. 린아는 ‘장산범에서 미스터리한 역을 연기한 신린아입니다’라고 외운 문장 딱 한마디 하고 끝이다.(웃음)

충분히 재미있는 시간이었으니 걱정 안 해도 되겠다.(웃음) 마지막 질문, 요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영화 개봉을 앞두고 밖에 나오면 왕성하게 활동하던 예전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정말 좋다. 주부로만 살다가 배우 염정아가 된 기분이다. 피곤하지만 행복하다.


2017년 8월 18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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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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