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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약은 가난한 사람에게 더 비싸게 팔릴까? '국경없는영화제'로 내한한 <피 속의 혈투> 딜런 모한 그레이 감독
2017년 12월 6일 수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국경없는의사회가 한국에서는 최초로 ‘국경없는영화제’를 개최한다. 자신들의 의료 지원 활동을 카메라로 담은 다큐멘터리 네 편을 상영하는 소규모 영화제다. 규모는 작지만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만큼은 묵직하다. 딜런 모한 그레이 감독의 <피 속의 혈투>도 그 중 하나다. 전 세계적인 제약업체 화이자가 항레트로바이러스 의약품(ARV), 이른바 HIV/AIDS 치료제 특허를 움켜쥐고 비싼 약값을 고수하는 동안, 아프리카를 비롯한 소위 제3세계 국가들의 감염인 수천만 명이 죽어 나간 실제 상황을 담았다. 미국과 유럽에서 HIV와 에이즈는 이미 충분히 관리할 수 있는 병으로 자리매김한 뒤인데도 말이다. 고가의 약을 구하지 못해 죽어 나가는 소외된 사람들의 실상을 접한 딜런 모한 그레이 감독은 묻는다. 도대체 그 약이 왜 가난한 그들에게만 그렇게 비싸야 하는가? ‘국경없는영화제’로 내한한 딜런 모한 그레이 감독을 만났다.

당신의 이름을 처음 듣는 한국 관객이 많을 것이다. <피 속의 혈투>를 소개하기에 앞서 당신에 대한 간단한 소개부터 부탁하겠다.
안녕. 내 이름은 딜런 모한 그레이, 인도계 캐나다인이다. 주로 뭄바이에서 생활한다. <피 속의 혈투>는 5년 반에 달하는 제작 기간을 거쳐 2013년 정식 개봉한 작품이다. 담고 있는 주제가 독특하다 보니 영화제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다양한 통로를 통해 지금까지 상영되고 있다.

<피 속의 혈투>는 이른바 HIV 치료제를 개발한 전 세계적인 제약회사 화이자의 ‘특허 오용’을 꼬집는 다큐멘터리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을 텐데. (기자 주: HIV로 인해 합병증이 생길 경우 AIDS가 된다)
2004년경에 한 기사를 보게 됐다. 인도의 의약품 제조업체와 인도 활동가가 연합해 HIV 치료제 복제약을 저렴한 가격에 내놓으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런 흐름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고, 그 분위기에 서양 정부가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적정한 가격으로 (아픈 사람에게) 의약품을 제공하겠다는데 말이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제약회사가 사람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약의 특허를 움켜쥐고, 비싼 약값을 고수한 채 동일한 성분의 복제약 제조까지 막는다고 비판한다. 서양 세계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제약업계의 이해관계가 걸린 내용인 만큼 제작비를 충당하는 것도 만만치는 않았을 텐데.
남아공, 우간다, 모잠비크, 인도 등 8개국에서 촬영을 했으니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든 건 사실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비영리 프로젝트로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 점을 내세워 많은 기부를 받을 수 있었다. 영화에 삽입된 음악을 무료로 작곡해준 분도 있고, 법률 관련 자문이 상당수 필요한 상황에서 법률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해준 분도 있다. 캐나다에서는 기금을 지원하는 재단이나 단체를 찾아가 우리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다만 인도는 그런 분위기가 자리 잡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비공식적인 설득 과정도 많이 필요했다. 어쨌든 기부를 할 상대가 나에게 물을 법한 모든 질문에 철저하게 대답할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에 제작비는 충분히 거둬들일 수 있었다.
HIV 감염인, 에이즈 환자, 의사, 활동가, 기자, 정치인 등 인터뷰 당사자만 스무 명이 넘는다. 작품에 드러내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훨씬 많은 이들을 만났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터뷰 요청에 반갑게 응해줬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이야기에 관한 여러 사실관계가 소실될 수 있기 때문에 그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HIV 치료제를 복제해 저렴한 가격에 보급한 인도 제약회사 ‘시플라’의 하미드 박사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업적에 비하면 인도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는데 <피 속의 혈투>에 출연한 이후 오히려 명성을 얻었다.

HIV 감염인과 에이즈 환자도 다수 출연한다. 이들의 촬영 동의를 얻어내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남아공에서는 의외로 별로 어렵지 않았다. HIV 감염인이 워낙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척 중에 감염인이 있는 경우가 많았고, 관련 문제를 다루는 활동가도 많았다. 자연스럽게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는) 낙인 효과도 적은 편이다. 반면 의료지원이 잘 되고 치료제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콜롬비아 같은 곳에서는 확실히 취재에 어려움이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내가 HIV감염인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 있기 때문에 주변의 낙인 효과를 두려워했다. 무엇보다 다들 카메라 앞에 서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인터뷰 직전 마음을 바꾸는 경우도 꽤 있었다. 지인들의 만류도 한몫했을 것이다. “네가 그 촬영에 임하면 그 감독은 돈을 벌겠지만, 정작 네가 얻는 건 대체 뭐냐”고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카메라 앞에 앉힐 수 있는 적절한 시기를 잡아내는 게 참 어려웠다.

심지어 화이자에 몸담았던 피터 로스트 전 부사장까지 등장한다. 자신이 몸담았던 업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작품에 출연하게 만든 과정이 상당히 궁금하다.(웃음)
다들 그걸 궁금해하더라.(웃음) HIV 치료제 이슈와 직접 관련된 사람은 아니지만 제약업계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증언할 수 있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의외로 흔쾌하게 응해주더라. 그런데 영화를 공개하고 난 후 일각에서는 (피터 로스트 경우 같은) 제약업계의 목소리를 너무 배제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사실 제약업계에 몸담았던 사람들과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그들이 퇴직할 때 ‘어떤 정보도 외부에 유출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걸고 계약했기 때문에 영화에 출연시킬 수 없었을 뿐이다.

영화에서는 특히 제약업계의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지적한다.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제조한 복제약의 위생 상태가 불량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화이자의 CF 화면을 활용하기도 했다.
제약업계가 마케팅에 쓰는 비용은 연구 개발 예산의 두 배 이상이다. 물론 언급한 TV 광고에 든 비용도 포함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많이 지출하는 마케팅 비용은 의사에 대한 것이다. 인도를 예로 들자면, 제약회사가 의사에게 TV도 사주고 자동차도 사준다. 의료 콘퍼런스라는 명목으로 여행도 많이 보내준다. 하와이에서 의료 콘퍼런스를 진행한다고 하면 오전에 한 세션 정도만 관련 내용을 마련하고 나머지는 전부 투어로 채워주는 식이다. 가족을 데려가는 비용까지 다 부담한다. 그 대가가 무엇이겠는가. 의사가 처방전을 쓸 때 접대를 받은 제약회사가 만든 약을 사용하는 것이다. 기브 앤 테이크다.

제약업계와 의료집단의 커넥션은 인도뿐만 아닌 전 세계적 문제일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처방전에 “품질이 같은 복제약을 쓸 수 있다”고 기록하긴 한다. 하지만 그 처방전을 보고 약을 내어주는 약국에서는 여전히 (대형 제약회사의) 브랜드가 붙어 있는 약을 처방한다. 제약 회사가 약국까지 매수하기 때문이다. 말로는 연구 목적으로 협조를 구한다고 하지만 실제 목적은 어떤 의사가 어떤 약을 처방했는지 체크하기 위해서다. 의약품에 대한 정부 보조 비율이 높은 국가에서는 의사의 과다 처방을 막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의사 처방 기록을 자료화해두기도 하는데, 제약회사는 (로비를 통해) 이런 정부 자료에까지 접근하곤 한다.

영화는 앞으로 인류가 HIV나 에이즈 같은 예상치못한 질병에 맞닥뜨렸을 때, 가난한 개발도상국 사람들은 또다시 약을 구하지 못해 쉽게 죽어 나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맞다. 결국은 구조적인 문제다. 국경없는의사회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노력을 통해 HIV 치료제 복제약은 이제 저렴한 가격에 공급된다. 하지만 (‘특허 오용’과 제약업계의 로비라는) 기본적인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약값이 이렇게 높아야만 하는가? 이 약을 개발하는 데 얼마가 들었고, 원재룟값은 대체 얼마길래 최종 생산물(의약품)의 가격이 그렇게 높은가? 그 점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질문하려 하지 않는다. 그 질문을 할 힘을 가진 정치인, 연구자, 의료인, 언론인이 모두 제약 회사의 로비를 받기 때문에 토론의 장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이의제기를 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일정 부분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다 보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약값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아예 단절된다.

옳은 지적이다.
나의 어머니는 캐나다에서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가 처방받은 약의 성분을 살펴보니 인도에서도 똑같은 원재료를 사용해 만드는 성분이 같은 약품이 있더라. 그런데 가격은 캐나다에서 판매하는 쪽이 200배 비쌌다. 문제는 내 어머니 역시 (두 약의 품질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잘 인정하려 들지 않으셨다는 거다. 질문해야 할 사람들이 질문하지 않고, 정보를 얻어야 할 사람들에게 정보가 단절되니 대중은 이런 식으로 세뇌당한다. 국경없는의사회를 비롯한 NGO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본다.

<피 속의 혈투>가 세상에 공개된 후 많은 긍정적인 변화들이 있었지만, 개중에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었을 텐데.
넷플릭스, 알자지라, 전 세계적인 TV방송국과 영화제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작품을 공개했고 그중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도 물론 있었다. 첫 번째는 앞서 말한 것처럼 제약업계의 목소리를 너무 조금 담았다는 거다. 두 번째는 유독 HIV감염인과 에이즈 환자가 많은 특정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정부에 대한 책임을 거의 지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같은 생각을 했다.
사실 최초 버전에는 정부에 대한 지적도 상당 부분 포함했다. 하지만 너무 큰 주제이기도 했고 영화를 보며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를 입력하느라 버거워하는 관객의 반응을 반영해 그 부분을 편집했다. 세 번째는 영화에 등장하는 빌 클린턴에 관한 비판이다. 영화에서는 그가 퇴임 후 클린턴재단을 통해 HIV 치료제 복제약을 대량 주문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그 덕에 복제약 가격을 낮춰 여러 사람을 살려낸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하지만 정작 대통령 재임 당시에는 에이즈 치료와 복제약 관련 문제에 아주 형편 없는 태도로 임했다. 다만 빌 클린턴의 재임 시절과 퇴임 후 시절의 상반된 대응을 함께 담았다면 관객이 혼란스러워질 테고, 영화의 메시지도 희석될 것 같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개중 가장 의미 있게 받아들인 비판이 있다면.
폴란드의 한 영화제에서 내 영화를 본 관객이 “너무 단순하게 흑인과 백인의 문제처럼 바라본다”는 지적을 했다. 정말 의미 있는 지적이었다. 폴란드나 헝가리에 사는 백인들 역시 상당히 비싼 의약품 가격을 감당해야 하고, 주치의는 왜 그렇게 약값이 비싼지 설명해주지도 않는다고 했다. 백만장자가 아닌 이상 원하는 의약품을 구하기 쉽지 않은 건 흑인이나 백인이나 마찬가지라는 거다. 그런데 “과연 백인이 에이즈에 걸렸어도 이렇게 안일하게 대처했을까?” 식의 영화 속 가정이 너무 단순하게 느껴져 불쾌하다는 거다. 인종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는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제라고 접근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한국에서도 글리벡이라는 백혈병 치료제 복제약 관련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안다. 아직까지는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작품의 의미를 잘 알겠다. 새롭게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고 들었다.
인권과 보건에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각기 다른 국가에서 태어난 다섯 명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경험과 가치관을 공유하며 결론을 얻어 나가는 과정이다. 난민과 빈민, 약물 중독자, 성 소수자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이 보건 정책에서 얼마나 소외되어 있는지를 다룰 예정이다.

한국 관객이 그 작품을 볼 수 있을까.
물론이다. 내년 2월쯤 완성될 예정이다. 어떤 방식으로 개봉할지는 조금 더 논의해봐야 하겠지만 내년 안에 한국 관객 역시 그 작품을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피 속의 혈투>를 통해 지난 4년간 전 세계의 매체와 인터뷰하고 다양한 관객과 대화를 나눠왔다. 이 경험이 당신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영화를 만들 당시에는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말도 못 하게 힘들었다. 하지만 작품이 공개된 후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관객의 관점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만족스럽다. 어떤 사회적인 주제도 시간이 지나면 논의 열기가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데 <피 속의 혈투>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어 기쁘다. 내 커리어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작품으로 남을 것 같다. 인생이 변화하는 기분이다.

2017년 12월 6일 수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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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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