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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문화는 선점하는 것, 위축되면 안 돼” 이상봉 디자이너
2018년 4월 10일 화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시대의 100인을 만나다"

외연을 확장한다. 영화배우와 감독이 주를 이뤘던 기존의 인터뷰에서 보다 분야를 넓혀 ‘피플’ 리스트를 채워 나갈 예정이다. 남다른 소신과 철학으로 우뚝 선 존재감의 이들은, 현실에 발을 붙인 흥미진진한 영화적 캐릭터에 다름 아니다.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우리 시대 100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ㅡ편집자 주.

어린 시절 심한 피부병 앓아 내성적
염세주의자 구원한 건 대학 시절 연극
패션 학교 졸업 뒤 85년 이름 딴 브랜드 출시
IMF 이후 파리서 한글 패션쇼 우리 문화 자부심 얻어
아시아 패션 시장 한국이 적극적으로 선도해야
문화는 선점하는 것 지레 겁먹어선 안 돼


명실상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당신이지만, 사회적인 활동에서도 쉽게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최근 제주 4.3 사건을 기리는 넥타이와 스카프를 선보였다.
아픈 영혼을 위로하고 싶었다. 제주 4.3에 관련된 모든 이의 상처가 아름다운 동백꽃처럼 잘 아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참여했다. 능력에 비해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그 과정을 통해 내가 모르는 사회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

세월호 당시에도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던 학생의 스케치를 옷으로 만들어 패션쇼에 올렸다. 2015 SS 서울패션위크에서 선보인 “하늘로 가는 길”이라는 콘셉트였다.
학부모 두 분이 나를 찾아왔다. 자식의 꿈을 어떻게 이뤄줘야 할지 고민하던 분들과 두 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눴다. 그 학생의 스케치를 골라서 옷을 만들고 그 옷을 런웨이에 올렸다. 학생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마음으로 패션쇼를 진행했다. 상처도 받았고 힘든 일도 많았다. 내가 그들의 아픔에 같이 빠져버렸다.
 이상봉 디자이너가 작업한 제주 4.3 손수건
이상봉 디자이너가 작업한 제주 4.3 손수건

 이상봉 디자이너가 작업을 프린트한 스마트폰 케이스
이상봉 디자이너가 작업을 프린트한 스마트폰 케이스

오늘 인터뷰를 앞두고도 긴 회의가 이어지더라. 시간을 쪼개서 쓰는 듯한데, 그럼에도 꾸준히 사회적 활동을 병행하는 이유가 있다면.
남보다 뛰어난 것도 없고 어린 시절 흔한 상 한 번 받은 적 없던 내가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지금 내가 누리는 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타인을 위한 나만의 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최고의 반열에 올랐지만 당신에게도 ‘첫 시작’이 있었을 텐데.(웃음)
딸 여섯 있는 집의 외아들로 태어나 소중하게 자랐다. 너무 가난한 집이었지만 나만큼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살았을 정도다. 그런데 성격이 너무나 내성적이었다. 극심한 피부병 때문에 몇십 년 간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백반증과 비슷한 병이다. 하도 긁어서 피가 나 잘 때는 손을 묶을 정도였으니, 고등학교 때는 염세주의에 자살 찬미론자가 돼 버렸다.(웃음) 아무튼 대중 앞에 나서기 참 어려웠다. 생각만 많은 소년이었다.

그런데 정작 서울예대 연극영화과를 지원했다.
소리 지르고, 뒹굴고, 발성하고, 몸을 움직이며 연극 수업을 받아보니 내 안에 있던 무언가를 표출할 수 있었다. 그 때 세상과 소통하는 통쾌함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군대에 가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복학 후에는 취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공연만 하고 미련 없이 연극판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 무대에도 서지 못하고 도망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관객을 만나는 게 두려웠던 모양이다.(웃음)

의외의 시절이다. 그러다가 어떻게 디자이너가 될 생각을 한 건가.
연극 무대에서 도망친 뒤에 국제복장학원(지금의 국제패션디자인직업전문학교)이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요즘으로 치면 패션대학원의 교육에 해당하는 내용을 알려주는 곳이었다. 이걸 한 번 해볼까? 하고 찾아갔는데 그걸 계기로 2년간 미친 듯이 패션 공부를 하게 됐다. 당시에는 그 학원만 졸업하면 백 퍼센트 다 취업이 됐고, 나 역시 바로 취업을 했다. 그 뒤부터는 정말 운이 좋았다는 말 말고는 표현하기 어렵다.

그 뒤로 승승장구한 모양이다.
1985년 내 이름을 건 브랜드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백화점에 입점했고, 당대 최고의 잡지사와 인터뷰까지 했었다.(웃음) 당시에는 그런 인터뷰가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다.

IMF 이후 신문을 프린트한 옷으로 패션쇼를 선보였고 이후에는 한글을 수놓은 옷을 해외 무대에 세웠다.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서 굵직한 업적이 많다.
IMF 전까지만 해도 신문을 잘 보지 않았다. IMF 이후 ‘뉴스 페이퍼’라는 테마로 쇼를 준비했다. 신문을 인쇄해서 옷을 만들었다. 마지막에는 모든 모델이 신발을 벗고 퇴장하게 만들었다. 쇼로 사회와 소통하기 시작했다. 한국 상황이 조금씩 안정되면서 프랑스 파리에서 한글을 주제로 첫 전시를 할 수 있었는데 그때 한글을 ‘모던하다’고 표현하는 반응도 난생처음 들어봤다.(웃음)

당신의 ‘한글 패션쇼’ 이후 한글에 대한 이미지가 대폭 바뀌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도 한글보다는 영어가 세련되다고 여기는 풍토가 없지않아 있으니, 작업 당시 고충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제일 먼저 부딪힌 벽이 누군 줄 아는가. 우리 팀의 젊은 스태프들이었다. 이 촌스러운 한글로 왜 패션쇼를 하느냐고 하더라. 우리도 모르게 가진 선입견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내 청바지와 티셔츠부터 한글을 써서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젊은 스태프들도 조금씩 따라서 만들더라. 한글 작품이 제대로 응원받은 건, 결국 외국에서부터다. 해외 언론이 먼저 한글 작품을 의미 있게 다뤄줬고 그다음에 한국이 그 평가를 받아들여 준 거다. 과거에는 문화체육관광부의 한류 회의에도 ‘한글’은 없었다. 이제는 한글을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여긴다. 모스크바에서 패션쇼를 할 때는 한글 옷을 입고 찾아온 손님도 있었다. 너무나 고마워서 그를 끌어안을 정도였다.

내부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업신여기는 분위기도 힘들었겠지만, 외부에서도 한국 출신 디자이너에 대한 신뢰가 없었을 듯하다. 특히 당신이 파리에 진출한 2000년대 초반이라면 더더욱.
당시만 해도 외국인들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거의 모르더라. 한국 국기라면서 북한 인공기를 준비해 큰 충격을 받은 적도 있다.(웃음) 지금에야 공개할 수 있는 일이지만, 독일 기성복 브랜드와 작업할 일도 있었는데 내 작품을 ‘메이드 인 재팬’으로 표기해줄 수 있냐는 요구까지 받았다.

쉽지 않은 생활이었다. 그럼에도 단청, 자수, 한복, 소주까지 한국적인 소재를 끊임없이 디자인에 활용했다. 우리나라의 문화를 매우 사랑하는 게 느껴진다.
(하하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그렇지 않을까. 외국에 나가서 활동하는 사람은 그런 마음이 더 커진다. 외국의 높은 벽에 부딪히고 초라한 내 모습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문화를 더 공부했다.

패션디자인 업계에 30년 넘게 몸담았다. 가장 시급하게 꼽는 문제점이 있다면.
우리 기술과 디자인을 외부로 확산해야 한다. 그러려면 국가적인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서울패션위크도 자꾸만 (그 규모를) 오므라트리는데 그러면 안 된다. 우리 전문성을 외부와 공유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예전에는 패션으로 일본을 넘어설 거라는 상상을 전혀 못 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그들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나. 아시아는 충분한 소비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시아 패션의 중심에 한국이 서야 한다. 그런데 금세 중국에 쫓기는 입장이 됐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등 우리가 개발도상국으로 생각하던 나라도 국가적인 패션 프로젝트를 통한 국가 선진화를 외치고 있다.

중국은 모든 분야에서 우리를 추격한 상황이다. 패션도 예외가 아닌가 보다.
물론이다. 하지만 아직 중국은 각 성(省)이 개별 국가처럼 작동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에 그들 전체를 통괄하는 패션이 존재하기 어렵다. 같은 중국이지만 서로 지역도, 기후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가 먼저 문화를 선점하느냐가 중요하다. 유럽이나 영미권 사람들은 라면이 일본 것인 줄 안다. 이른바 ‘라멘집’ 덕분이다. 내가 작업했던 환(동그라미) 모양의 먹물이 번지는 이미지 역시 이미 중국에 존재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상봉의 상징적인 작업처럼 인식 돼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우리 능력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초라하게 생각하고 지레 그 위대함을 포기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쉴 때는 좀 어떤가. 책이나 영화를 접할 시간이 있을지.
한때 내 꿈이 영화감독이었다.(웃음) 영화를 보고 구상한 패션쇼도 있다. 최근에는 <신과함께-죄와 벌>(2017) 을 재미있게 봤다. 예술적으로 평가하면 어떨지 몰라도 우리의 정신과 가치관을 담아낸 이야기를 풀어낸 건 상당히 신선했다.

최근 가장 소소한 행복이 있다면.
음… 이제서야 교육자로서 행복을 느껴본다. 옛날에는 대학교수 부탁에 못 이겨 억지로 회사로 출강을 나가곤 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진짜 내 제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보고 느낀 걸 그들에게 제대로 전해주고 싶다.

2018년 4월 10일 화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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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이종훈 실장(Ultr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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