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세대 간의 교두보, 브랜드 ‘목은정’의 꿈” 목은정 디자이너
2018년 4월 29일 일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시대의 100인을 만나다”

외연을 확장한다. 영화배우와 감독이 주를 이뤘던 기존의 인터뷰에서 보다 분야를 넓혀 피플 리스트를 채워 나갈 예정이다. 남다른 소신과 철학으로 우뚝 선 존재감의 이들은, 현실에 발을 붙인 흥미진진한 영화적 캐릭터에 다름 아니다.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우리 시대 100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 주



오스카 레드 카펫은 그간 들인 시간과 돈의 결실,
‘페이스 오브 차이나’ 무대에서 한한령에도 불구하고 태극기를 올리다,
악플이 없는 이유? 문화 대물림을 위한 진정성이 통한 것,
삼청동 한복 체험, 전통 한복이 아니라도 칭찬해줘야 한다,
인파가 흘러가는 인사동에 젊은이들의 공간 ‘한복놀이터’를 만들다,
수입 드레스에 직격탄 맞은 국내 웨딩업계. 잘 나가던 웨딩디자이너로서 뿔났다,
브랜드 런칭이 중요한 게 아니다. 쉽게 카피할 수 없는 소재 ‘모시와 한지’,
한복디자이너로 바닥부터 시작하여 트렌드에 맞는 한복 개발에 주력하다,
패턴과 아이템 개발하며 견딘 가장 힘들었던 시기, 이후 자산이 됐다,
나 자체가 브랜드. 젊은 세대에게 영감을 주고 꿈을 지원하는 것이 내 몫,
세상 모든 것에 한국적인 옷을 입히고 싶다


# 오스카 & 페이스 오브 차이나 with 마이지놈박스

배우도 아니면서(웃음), 오스카(아카데미) 레드 카펫을 밟은 한국인으로 유명하다.
처음에 초청받았다고 하니 주위에서 다들 이상하게 봤었다. 혹자는 나보고 허언증 아니냐고까지 하더라. 23년 정통의 오스카 시상식 갈라쇼 중 최초의 패션쇼가 (나의)한복 패션쇼였다. 이전에 없던 것을 만든 셈이다. 쇼를 준비하며 색동 카펫을 깔고, 태극기를 올려달라고 두 가지 제안을 했었다.

오스카 초청장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웃음)
당연하다. 그 전에 라스베가스, 중국 북경 등 갖은 로비를 하고 자비로 쇼를 하는 등 한 5년 정도 공을 들였다. 그 결과 얻은 결실인 거다. 이후 오스카 그리고 뉴욕패션위크에 ‘돌체앤 가바나’의 초청을 받았다.

오스카에서 한복을 접한 이들의 반응은 어떻든가.
음, 첫 질문이 ‘너 모델이니?’이다. 그러면 ‘아니, 디자이너’라고 답하는데 그러면 디자이너가 너 같은 비주얼이 있냐면서 놀라곤 한다. (웃음) 내 영어 이름이 ‘제니퍼(Jenifer) 목’인데, ‘젤이뻐’와 발음이 비슷해서 ‘제니퍼’라고 지은 거다. 지금까지 경험상 미국인들은 사업적으로 접근하든가 아니면 그들을 감동시키든가 둘 중 하나로 접근해야 했다. 돈으로 그들의 환심을 살 수는 없으니 팬을 만들기로 했다. 그들은 비즈니스와 국가는 별개란 생각이 강한데, 나 같은 개인 디자이너가 전통 의상을 알리기 위해 자비로 쇼를 하는 것에 대해 감동했었다.

지난 4월 초 북경에서 개최된 2018아시아모델페스티벌 행사 의 일환인 ‘페이스 오브 차이나 with 마이지놈박스’에서 선보인 한복 드레스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고 들었다.
알다시피 한한령 이후 중국내 분위기가 싸늘했다. 좀 위험할 수 있었는데 무대 마지막에 태극기를 올렸고 다행히 중국패션위크조직위원회 장경휘 주석이 멋진 무대라고 칭찬을 해줬다. 아마 한복만 고집했다면 힘들었을 텐데, 중국 정통 의상을 결합한 옷을 입고 인사를 했기 때문인 거 같다.(웃음) 처음에는 한낱 디자이너가 태극기를 올려? 이런 분위기였다. 그런데 중국인이 좋아하는 붉은 계열 의상에 금박으로 장식하여 문화 콜라보레이션을 시도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좋아하더라. 전통에서 현대까지 그들과 우리의 것을 융합해 봤는데 성공적이었다.


# 문화를 대물림하다

최근 KBS 아침 프로그램 출연으로 오스카 관련 히스토리를 많은 사람이 알게 됐다.
사실 세 번 고사 끝에 나간 거였다. 방송 한번 나가니 소위 다 털리더라. (웃음) 그나마 악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악플이 없었던 이유가 뭘까.
비즈니스와 홍보를 위해서 방송에 나온 게 아니라는 걸 시청자들이 파악했다고 본다. 특히 젊은이들이 내가 하는 일에 공감을 많이 해줬다.

젊은 세대가 공감했다는 당신의 지향점은.
내가 한복 디자인을 하는 건 단순한 사심이 아니라 문화의 대물림을 위해서다. 한국의 전통문화 중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것, 경쟁력을 갖춘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한복’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데 전통적인 한복만을 고수하는 건 트렌드에 맞지 않다. 세계 어느 나라도 전통 의상을 그대로 실생활에서 입진 않는다. 시대에 맞게 개량해서 입는다. 가까운 예로 중국 브랜드 ‘상하이탄’을 봐라, 중국 전통을 계승한 고급 브랜드로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우리도 한복을 모티브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요새 ‘한복 체험’이 삼청동 관광의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외국인 관광객 위주에서 한국 젊은 층들로 그 대상도 점차 확대되는 추세다. 반면 변형 한복에 대해 우려도 있다.
젊은 세대가 입어주는 것 자체로 환영할 일이다. 그러니 한복 모양이 전통의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기보다 손뼉 쳐줘야 한다. 저렴한 비용에 체험을 제공하기 위해 중국에서 대량 생산해오고 그러다 보면 한복의 질이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많이 입는 게 중요하다. 옷이라는 건 보면 볼수록, 접하면 접할수록 기준이 올라가게 돼 있다. 처음에는 싼 가격에 잠시 한복을 빌려서 사진을 찍지만, 점차 고급 한복을 찾을 것이다. 그 시작점에 와 있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니 종로에서 한복 입고 돌아다니는 젊은 친구를 만난다면 그게 일본풍이든 중국풍이든 칭찬해 주길 바란다.

대학생들과 함께한 ‘한복 입기 도전’도 같은 맥락일 것 같다.
보따리 싸들고 가서 뉴욕 패션위크에 참석하고, 이후 백악관 앞에서 한복 입고 사진 찍어 올렸었다. 그 사진을 보고 제자들(덕성여대)이 함께하고 싶다고 하더라. 이후 우리나라 최초 한복 동아리가 덕성여대에 생겼다. 한복 입기 인증 이벤트를 한 건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신라호텔에서 한복 복장을 거부한 사태로 시작했다. 그때, SNS 공간에서 ‘한복 입기 도전’을 했고, 그렇게 10대와 20대 학생들 사이에 한복 입기 도전이 시작됐었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한 번 입고 말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들을 담을 수 있는 공간 즉 그들이 생각을 펼치고 숙성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힘도 돈도 없지만, 아이디어가 있고 나는 아이들의 생각을 모아 기관을 두드릴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한국 문화 관련 일을 하고 싶은 아이들에게 그 일거리를 만들어 줄 수 있다면 내 인생이 행복하게 마무리될 것 같았다.


#한복 놀이터

그 마음이 지금 인터뷰하는 장소인, ‘한복 놀이터’의 탄생으로 이어진 거 거 같다. ‘한복 놀이터’에 관해 좀 더 소개를 부탁한다.
인사동은 주말만 되면 사람들끼리 어깨가 부딪쳐야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흘러가고 머물 곳이 없다. 쌈지길도 이젠 물건을 파는 공간일 뿐, 문화는 없다. 이곳은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놀고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이다. 메이크업, 악세사리, 의상, 사진 등등 모든 것이 다 한 공간에 배치돼있다. 이곳에 있는 소품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창작품이자 상품이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방석만 해도 그렇다. 한지에 기반한 특수 소재로 만든 것이고 무늬는 전통 문양에서 따온 것이다. 앞으로 이 공간에서 물건을 팔기도 하겠지만 판매를 위한 상업적인 공간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규모가 꽤 크다. 공간 마련과 유지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140평 정도 된다. 솔직히 부담된다. 다행히 청년 문화 공간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후원 문의가 꽤 들어오고 있고, 내가 앞장서서 리드한다면 후원하겠다는 분들이 여럿 계시다. 또, 딸이 옆에서 든든하게 한몫해주고 있다. 정부에서 청년 일자리를 만든다고 하지만, 대부분 기존의 일자리 안에서 일부를 비워 청년의 자리를 마련하는 형태다. 이는 한정된 자리를 놓고 주인만 바꾸려는 것으로 경쟁만 심화시킬 뿐이지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청년을 위한 새로운 일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게다가 기성세대의 그릇에 젊은세대를 담으려 하는데 잘 담가지겠나. 이번 ‘한복놀이터’의 문을 열며 SNS를 통해 아르바이트를 구한다고 하니 1시간 안에 24명이 지원할 정도였다. 그만큼 새 일자리에 목말라하는 젊은 친구들이 많이 있다. 이곳을 그들이 쉬고 놀고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과연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느낌이다.
우린 테이블 번호도 일월, 이월, 삼월.... 이렇게 붙였다. 그리고 수문장, 좌의정, 영의정 이런 식으로 서로를 지칭한다.

후배들을 위한 창작과 경제 활동의 장으로서 ‘한복놀이터’를 마련한 것으로 이해된다.
평소 선배의 역할은 영감을 주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우리가 굳이 서양 명품 디자인을 카피할 필요가 뭐가 있나. 우린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게 뭘까. 당연히 우리 것, 즉 우리 전통의 것일 거다. 전통이 대중화된다는 건 상품화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래야 경제적으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를 매개하는 것이 현재 40~50대의 몫이라고 본다.


#웨딩디자이너에서 한복디자이너로

웨딩디자이너로 활동하다 한복으로 눈을 돌리게 된 계기는.
2010년 대 초부터 정확히 김남주가 결혼식에서 베라왕 드레스를 입으면서 수입 드레스 선호 열풍이 시작됐다. 드레스 가격이 천만 원이 넘으니 처음에는 연예인 위주로 입기 시작했는데 이후 일반일들도 수입 드레스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국내 제작 웨딩샵들이 다 망가지고 문 닫기 일수였다. 이건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다. 그래서 너희가 침투하면 우리도 (세계로) 나가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마음이 한복 드레스의 출발이었나 보다.
2011년도에 한국 드레스를 개발하여 50여 개국 모델을 초청해서 세뱃돈 줘가면서 쇼를 했다. 우리나라 드레스도 ‘벨 라인’(기자 주: 종 모양의 실루엣. 스커트 부분이 마치 교회의 종과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 나올 수 있다는 걸 보여줬었다. 내가 의상을 전공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번 평창 올림픽 성화대가 달항아리 모양인데 그것도 한복의 패턴의 일부다. 17~18세기 화가 신윤복 등의 풍속화에서 보면 아녀자들이 입고 있는 치마 모양이 달항아리 곡선이다. 패션은 항상 문화를 선도한다. 우리 전통에도 ‘벨 라인’이라는 드레스 패턴이 이전부터 있었던 거고, 조선 후기로 가면서 소박해진 에이라인 등 이미 우리 전통 의상에 다 녹아 있던 패턴이었다.

자비를 들였기에 돈을 꽤 많이 탕진? 했다고 하던데....
집도 팔고 땅도 팔고 한 15억 정도 멋지게 썼던 거 같다. 그만큼 웨딩드레스로 벌어 놨기에 가능했었다.

웨딩디자이너로서 성공했던 비결이 뭘까.
2009년쯤인데 당시는 화이트에 레이스가 웨딩드레스의 기본이었다. 우아하고 여성스러워도 너무 여성스러웠었다. 그래서 난 체인을 걸어 봤다. 아주 여성스러운 동시에 아주 거친 것의 조합, 클래식하면서 미래지향적인 것. 그게 내 웨딩드레스의 특징이었다. 체인드레스는 대성공이었고 예약이 줄을 설 정도였다. 즐겁고 재미있었고 돈을 많이 벌었다. 좀 전에 말했듯 이후 수입 드레스가 대세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한복 드레스 패턴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소위 잘 나가던 웨딩 디자이너에서 한복 디자이너로 급 방향을 선회한 셈이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닥부터 시작하겠다고 찾아갔는데 아무도 안 받아 주더라. 그러던 중 유일하게 한 곳에서 받아줬고 새벽에 나가 청소를 미리 해 놓는 등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2년 반 동안 한복 업계의 마케팅을 배우면서 내가 개발한 패턴을 테스트할 수 있었다.

패턴 테스트란.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한복을 맞추러 온 고객에게 내가 만든 패턴을 제시해 봤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복 드레스가 젊은 세대의 니즈를 충족시킬지 확신이 안 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간의 테스트를 통해 확신이 섰고 압구정, 홍대 앞에서 병행하던 웨딩샵을 접고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전통 한복 종사자들의 ‘한복 드레스’를 향한 반응은 어땠나. 그다지 반기지 않았을 거로 예상된다. (웃음)
새로운 아이템이 개발되면 기존 시장을 주도하던 이들은 자신의 영역이 침해당했다고 생각한다. 광장 시장으로 대표되는 전통 시장에 자리한 한복집들은 - 그곳은 보통 원단상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 내가 처음 업계에 입문했을 때 어쩌다 들리면 밥 먹고 가라고 반가워했었다. 내가 나온 방송 덕에 매출이 상승했다고 좋아하셨었다.

보통 전통 시장이 텃세가 심할 듯한데, 의외다.
텃세가 심한 곳은 따로 있었다. 강남 고급 한복샵들이 ‘네가 신한복이면 우린 구한복이야?’ 라고 비꼬고, 내가 한복의 전통을 헤치고 있다고 비난했었다. 하지만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한복이 다르듯 복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보기에는 단지 전통 의상이지만 당시를 살던 사람에게는 일상복이었고, 당시 유행에 따라 끊임 없이 변천을 거듭했을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건 트렌드에 맞는 한복을 개발하는 거다. 우리가 현대적인 한복을 만들지 않는다면 시간이 흐른 후 ‘한복’이란 걸 박물관이나 역사서에서만 구경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내 10년 작업의 이유다.


# 모시와 한지

언제까지 자비를 들여 한복쇼를 할 수는 없을 거다.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 런칭은 언제쯤 예정인가.
예전 얘기지만 수입차를 두 대 몰고 명품도 아주 좋아했었다. 그런데 차 팔고, 집 팔아 이렇게 한복드레스에 전념하니까 지인들이 속상해하곤 한다. 그런데 나를 끝까지 지지해 준 분이 우리 아버지다. 이제껏 브랜드 런칭을 미룬 이유가 지금 세상은 온라인을 통해 하나로 연결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뭔가를 하나 만들면 세상 반대편에서 너무 쉽게 카피뜰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이 쉽게 카피 뜰 수 없는 소재를 찾고자 했고, 결국은 찾았다.

어떤 소재인가.
한지와 모시이다. 일단 소재 개발을 했으니 내가 비록 상품화를 못 한다 해도 후배들 혹은 내 딸 세대가 할 수 있을 거다.

모시하면 ‘한산’ 모시가 떠오른다. 주로 더운 여름에 어르신들이 많이 입으시지 않나? (웃음) 대중적인 소재는 아닐 듯한데....
한산모시가 유명한데 현재 고급품은 중국 VIP가 와서 다 쓸어가는 형편이다. 국내에는 주로 중국의 저렴한 제품이 유통되고 있다. ‘모시’ 소재로 당신이 떠올리는 한정된 이미지의 옷이 아니라 현대화된 패션 의상이 나올 거다. 진짜 고급스러움이 뭔지를 보여주겠다는 의미에서 ‘뭐시(무엇이)’ 라고 생각해도 좋다.

또 다른 신소재인 한지는 어떤가. 한지는 종이 아닌가.
한지와 면을 5:5로 혼용하여 한지의 장점과 면의 장점을 살렸다. 땀이 많이 흘러도 냄새가 배지 않고 통풍이 잘 되는 게 한지의 장점이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남방셔츠가 바로 한지와 면을 혼방한 소재로 만든 거다.

오, 그런가? 데님 남방셔츠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봐서는 한지가 혼용됐다는 게 전혀 안 느껴진다.
그렇지? 이미 개발이 끝났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유일한 친환경 소재이다. 한국 화장품이 뛰어난 성능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듯, 패션에서는 한지와 모시를 기반으로 한 신소재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으리라 본다. 모시는 코팅하면 플라스틱보다 단단하고, 한지는 통풍과 보온에서 뛰어난 기능성을 갖추고 있다. 그 옛날 조상들의 문풍지를 떠올려 봐라.


# ‘목은정’ 자체가 브랜드

그간의 활동이 모두 ‘목은정’ 자체를 브랜드화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알았지? (웃음) 단순히 의류 브랜드 하나를 런칭하는 것보다 일단 나와 한국 전통의 것을 세계에 알리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내 자체가 브랜드가 된다면 그 이후 하나둘 추가해 나가는 건 쉽겠더라. 그런 생각에 자비로 패션쇼를 꾸준히 개최했고 이후 세계적인 행사에 초청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오스카, 아시아모델페스티벌에 꾸준히 참여했고, 브랜드 홍보를 위해 참여한 게 아니기에 눈치(?) 보지 않고 소신을 펼칠 수 있었다.

‘목은정’ 브랜드를 일궜던 과정을 돌아본다면.
음, 디자이너의 포장지를 갖고 있는 로비스트가 됐다고 할까. 아무리 자비를 들인다 해도 세계 무대에 쉽게 올라갈 수는 없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과 교류하며 정말 로비스트처럼 활동했던 거 같다. 그렇게 한복뿐만 아니라 한국의 것을 세계에 알리려 노력했고 어느 정도 현실적인 결실도 얻었다.

앞으로 꿈이 있다면.
세계에 한국적인 옷을 입히고 싶다. 우리가 비록 작은 나라지만 한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전통과 문화는 절대 영향력이 작지 않다. 세계 곳곳에 한국의 옷을 입히려면 창의력 있는 디자이너가 배출돼야 할 것이고, 그들이 안정되게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일자리가 마련돼야 할 것이다. 그 교두보 역할을 지치지 않고 하고 싶다.

성공하기까지 힘든 일이 많았을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때와 어떻게 그 시기를 극복했는지.
콕 집는다면 2008~2011년 사이에 가장 힘들었었다. 내 나라에서 내가 인정 못 받았던 시기다. 내가 10대와 20대에게 ‘한복 입히기’ 프로젝트를 하겠다, 그들이 안 입는다면 앞으로 한복은 박물관 혹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사장된 옷이 될 것이다, 이를 방치한다면 직무유기라는 취지로 글을 쓰고 얘기를 했었다. 그랬더니 “xx하네” 딱 이러더라. 이후 내가 썼던 칼럼도 다 내리고 말이다. 또, 오스카 간다고 하니 처음에는 얼마나 비웃던지! 그 시기가 암흑기였는데 동시에 정말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그 후 2013년까지 세상에 안 나가고 숨어서 혼자 패턴 연구를 했거든. 경제 행위를 비롯한 일체의 외부 활동을 관두고 엄마 옆으로 가서 오로지 패턴과 아이템을 개발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복 드레스를 완성할 수 있었다.


#목은정

좀 전에 ‘한복 놀이터’를 만드는데 딸이 믿음직한 지원자라 했다. 젊어 보이는데, (웃음) 장성한 딸을 뒀다는 게 의외다.
고맙다. 72년 쥐띠다. 내 한복 드레스 디자인의 시작은 아이의 옷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에서 출발한 것 같다. 아이가 어릴 때 한 살에 맞는 한복, 두 살이 되면 또 거기에 맞는 한복, 이렇게 아이가 커가면서 패턴도 달라졌던 것 같다. 대한민국의 엄마는 못 하는 게 없는 다방면 기능인인데, 나는 그 중 옷을 좀 더 잘 만들었다고 할까.

딸도 엄마의 뒤를 이어 의상학을 공부하는지.
딸은 페인팅 아트를 공부할 예정이다. 엄마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주고, 우리나라 전통을 담을 수 있는 페인팅 아트를 하고 싶다고 한다. 아무래도 젊은 친구들이 온라인에서 소통에 능숙하니 그런 부분에서 도움을 많이 받는다. 이 공간도 딸의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딸(김채영)이 이 공간의 대표인 ‘영의정’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옷을 만들 수 있다니, 그 능력이 진심으로 부럽다. 어릴 때부터 패션 쪽에 관심이 많았었나.
대학에서 의상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직접 만들 수 있었던 거지. 그런데 어릴 때부터 좀 남다른 건 있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의류 브랜드가 다양한 시기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뱅뱅’, ‘죠다쉬’가 다였다. 그러니 학교에 가면 대부분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또, 우리 집이 딸만 넷인데 어머니가 색상만 다르게 옷을 사주시곤 했다. 그럼 난 단추를 다 뗀다든지 해서 어떻게든 변화를 줬었다. 어쩔 때는 중간 중간 찢기도 했는데 그럼 어머니가 그 부분을 다른 천으로 덧대주셨었다. 어떻게 해서든 다른 아이들과 달라야 성에 찼었다.

보통 그러면 ‘등짝 스매싱’ 감인데? 어머니가 참 성격이 좋으셨나 보다.
하하! 내가 의상학을 전공하고 한복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사실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딸 넷을 키우다 보면 옷을 당연히 물려 입히게 되는데, 매번 새 옷을 사주실 수 없는 노릇이니, 어머니는 절대 그냥은 안 물려 주셨었다. 자수를 놓아서 어떻게든 변화를 주셨고, 조끼나 스웨터 등은 손수 뜨개질로 다 떠서 입히셨었다. 딸을 얼마나 곱게 키웠냐 하면 발이 미워진다고 버선을 신게 했는데 어린 마음에는 너무 창피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다. 또, 어머니는 평생 집에서 한복을 입으셨었다.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부모님 상을 당하고 3년 동안 소복을 입으셨었다. 생각해 봐라, 조부모님이 차례로 돌아가시니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항상 하얀 무명옷을 입고 계셨었다. 언젠가 어머니한테 왜 소복을 입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어머니가 부모님 저승길을 밝히는 거라고 하셨었다. 이 모든 것들이 이후 내 창작 활동의 바탕이 됐다. 어린 시절 추억이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로 영감을 어디에서 얻는가. 혹시 영화를 자주 보는지.
보통 패션쇼나 공연을 현장에서 보지 않는 편이다. 왜냐하면, 직접 눈으로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내 작품에 담을 수도 있기에 일부러 피한다. 다만 사진과 자료를 통해 트렌드를 파악하려 한다. 현재 알면서도 혹은 무의식적으로 명품이나 외국 브랜드 베끼기가 너무 만연해있다. 더이상 모방 디자이너는 안 나왔으며 좋겠다. 그렇기에 나를 단속하는 차원에서 일부러 안 보는 것도 있다. 영화의 경우도 너무 화려한 의상이 나오면 일부러 피한다. 지금까지 진짜 재미있게 보고 또 본 영화는 <전우치>(2009)다. 당시 네 번을 봤는데 그냥 웃을 수 있는 시간이라 좋았다. 또, 오스카 시상식 후보로 오른 영화는 챙겨본다.

최근 인상적인 일이나 행복했던 순간을 꼽는다면.
지난 2월 딸이 고등학교 졸업했다. 딸에게 졸업 선물로 손수 다듬이질해서 염색하고 아주 정성껏 한복을 만들어 줬었다. 이번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딸 아이가 초청을 받아 외국 VIP와 함께 입장하게 됐는데, 한복을 입고 입장하겠다는 거다. 정말 추운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기회에 한복을 널리 알리고 싶다면서 입고 입장해서 인터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이 헛되지 않았음을, 내 길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이번 중국 ‘페이스 오브 차이나 with 마이지놈박스’에서 피날레에 태극기를 올렸음에도 잡혀가지 않아서 기뻤다.


2018년 4월 29일 일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
사진. 박광희 실장(Ultr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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