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시대의 100인을 만나다"
외연을 확장한다. 영화배우와 감독이 주를 이뤘던 기존의 인터뷰에서 보다 분야를 넓혀 ‘피플’ 리스트를 채워 나갈 예정이다. 남다른 소신과 철학으로 우뚝 선 존재감의 이들은, 현실에 발을 붙인 흥미진진한 영화적 캐릭터에 다름 아니다.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우리 시대 100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ㅡ편집자 주.
대한민국 내로라하는 남자 배우 옷 다 입혀본 유명 디자이너의 삶
1987년 남성복 디자이너 브랜드 ‘카루소’ 론칭 뒤 90년대 파리행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 출연과 홈쇼핑 진출, 시류 거부하지 않아
1년에 500~1,000명 찾아오는 모델 지원자 중 ‘원석’ 발굴
디자이너 브랜드 살아나려면 대형 백화점의 상생 협조 필수적
진부한 삶이지만 재미있고 성실하게 일하면 누구든 잘 살게 돼 있어
때로는 아내와 촌스러울 정도로 속 없이 떠들고 사는 게 행복
디자이너 장광효 하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남자 배우 옷은 다 입혀본 거로 가장 유명하다.
60대가 되니 조금 덜 유명한 삶이 더 좋은 것 같다. 유명세를 타지 않은 사람은 나를 부러워할지도 모르지만, 대중이 나를 알아본다는 건 꽤 불편한 점도 있다. 사생활이 없다. 일주일 전 JTBC 예능 <팬텀싱어2> 공연장을 찾았다. 싱어 중 한 명에게 옷을 해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비를 돌아다닐 때마다 잘 모르는 분들까지 인사를 해주더라. 내 분야에서 열심히 일해서 알아주는 건 행복한 일이지만, 분야 외에서 날 알아봐 주는 건 좀 낯설다.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2005~2006) 드라마 <소울메이트>(2006) 등 티비 프로그램에 다수 출연한 영향이 있을 것이다. 국내 패션 디자이너 중에서도 대중적인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다.
내가 좀 엉뚱한 데가 있다. 시트콤은 처음엔 카메오 정도로 시작했는데 인기가 좋아 9개월 정도 출연했다. 벌써 10년이 더 지난 얘기다. 아마 TV에 출연하지 않았으면 대중이 이렇게까지 나를 잘 알아봐 주지는 못할 거다. 이제는 구태여 나를 알리려고 오버하지 않는다. 연기의 달인인 안성기 배우가 오버하지 않는 것처럼.(웃음)
상당히 조곤조곤 말씀하시는 편이다.
어릴 땐 워낙 조신했다. 들꽃 같은 스타일이었다고 할까.(웃음) 그림 그리고 책 읽는 걸 좋아했다. 디자이너가 돼서 그나마 활동적으로 변한 거다. 예전에는 무대나 카메라 앞에 서면 울렁증이 심했다. 백 번도 넘게 경험해보니 이제는 그리 두려워할 건 아니었다는 걸 안다.
그 옛날 미대를 졸업했다. 예술적인 ‘끼’는 분명 있었을 것이다.
내 끼는 전부 옷 만드는 데 푼 것 같다. 끼와 호기심이 있다고 다 객기를 부리는 건 아니니까. 난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운다. 밤 12시면 잠들고 7시에 눈 뜬다. 술집이 좋을 때도 있지만 익숙하지 않아 불편하다. 이런 말을 하면 ‘에이 거짓말’ 하는 사람도 있는데, 자기가 그러니 남도 그런 줄 안다.(웃음) 나는 자기관리를 잘 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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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당신의 브랜드 ‘카루소’를 론칭했고 90년대에는 자비를 들여 파리에 진출했다.
1992년에 처음 파리로 진출했다. 우리나라 남성복 디자이너 중에서는 내가 선두였다. 많은 돈을 까먹었지만 디자이너로서 해보고 싶은 걸 해봤으니 후회는 없다. 지금 해외에 진출한 후배들은 나 같은 선배들이 닦아놓은 길을 조금 더 편히 걷는 것이다.(웃음) 영화계를 예로 들자면 이병헌, 장동건, 유아인 같은 친구들이 요즘 상을 많이 받지만 혼자 잘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지 않겠나. 그동안 한국 영화계를 개척한 선배들의 역사와 전통이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중에는 처음으로 홈쇼핑에서도 활약했는데.
그때만 해도 선배들이 만류했다. 디자이너 브랜드가 홈쇼핑에 진출하다니 자존심도 없냐는 식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는 게 눈에 보이더라. 핸드폰으로 옷을 구매할 수 있는 인터넷 쇼핑몰이 개발 단계일 때였다. 시류에 맞춰 가보고 싶었다. 요즘 홈쇼핑에서 파는 옷 반품률이 상당이 높은 거로 아는데, 당시 내 브랜드 반품률은 20% 전후를 오갈 정도로 낮았다. 3년 정도 하니 돈은 그만 벌어도 되겠다 싶더라. 아쉬울 때 떠났다.(웃음)
데뷔 후 지금까지 매년 크고 작은 쇼를 준비하며 활동 중이다. 최근 가장 열중한 작업이 있다면.
지난 3월 서울패션위크에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주제로 컬렉션을 선보였다. 그때 반응이 좋아서였는지 오는 5월 초에 서울시립미술관 리모델링 개관 기념 쇼를 맡게 됐다. 오늘 10월 서울패션위크에서 선보일 컬렉션도 준비하는 중이다. 주제는 ‘루나’다. 이태리 말로 달이라는 뜻이다. 이미 절반 정도 작업을 마쳤다. 6월까지 작업하고 7월엔 휴가를 갈 계획이다. 8월에 스타일링을 마치고 9월이면 모델 섭외를 한다.
수많은 모델, 특히 남자 모델을 만났을 것이다.
모델로 데뷔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1년에 500명에서 많게는 1,000명까지 나를 찾아온다. 아는 사람이 잘 좀 봐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은데, 일에서 만큼은 내 고집을 지킨다. 가능성 있는 아이를 찾으면 ‘너는 귀한 아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고 내 브랜드 ‘카루소’ 무대로 데뷔시킨다. 그러면 탑 모델로 자리 잡는다. 한현민도 우리 무대에서 데뷔했다. 운이 참 좋은 아이다. 이 시대에 어울리는 흡입력이 있다.
워낙 업계에 오래 몸 담았으니, 뜰 것 같은 모델을 판별하는 기준 같은 게 있을 것 같다.
남자 모델 기준으로 보면 키는 185cm를 넘기고 몸무게는 80kg 아래인 게 좋다. 볼륨감은 있지만 골격은 크지 않아야 한다. 요즘 남자 신인은 이종석처럼 예뻐야 스타 되기가 좋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예쁘면서도 은근히 남자 냄새가 난다. 그런 섹시함도 매력적이다. 음… 하지만 내 기준으로 사람을 이렇게 판단하는 건 어쩌면 실수일 수도 있다. 사람의 순수한 면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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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업계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면.
너무 많지. 그중에서도 백화점에 할 말이 많다. 그들은 전부 수입 브랜드만 취급한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는 다 쫓겨났다. 물론 우리(디자이너 브랜드) 실적이 부진했기 때문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럼 잘할 수 있게 키워줄 생각도 좀 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외국 브랜드를 유치하는 데 돈을 다 쓰고 그저 임대업만 하고 있다. 그러니 백화점이 다 망하는 것이다. 일본도, 미국도 마찬가지다. 뉴욕에서 제일 큰 백화점에 갔는데 판매 사원과 호객하는 사람뿐이다.
수수료 문제가 큰 거로 안다.
백화점은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에게 50%에 가까운 수수료를 받는다. 그런 상황에서 재고 처리도, 직원 월급도 전부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수입 브랜드에는 20%도 되지 않는 수수료만 매긴다. 명품은 8% 수준밖에 되지 않는 거로 안다. 그러니 디자이너 브랜드가 백화점에 들어가면 망할 수밖에 없다. 백화점을 소유한 곳은 다 대기업이니, 처음에는 좀 힘들더라도 돈 있는 그들이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를 키워주면 결국은 그게 더 쉽게 살아남는 길일 것이다.
앞으로 디자이너 브랜드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웃음) 당신은 특히 남성복 전문이니 여성복 브랜드와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듯하다.
이미 망했지 뭐.(웃음) 농담이다. 멋 부리는 남자가 많아진 것 같아도, 사실 남자들은 갈수록 돈이 없다.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는 친구들은 마음대로 돈을 쓸 수가 없다. 부모가 금수저이거나 독신인 사람들이라면 또 모르겠다. 게다가 지금은 돈 모으기가 힘들다. 집도 사야 하고, 자동차도 사야 하고… 8~90년대가 남자들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 많이 벌었고 많이 썼다.
젊은 친구들에게 업계 입문을 추천하겠는가.
나처럼 원로들이 문제라는 거지, 젊은 아이들은 기회가 충분하다. 만약 돈이 좀 없다 싶으면 아르바이트를 해도 된다. 젊을 때부터 돈이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은 이상하다고 본다.(웃음) 이 업계가 돈도 안 되고 정책적 배려도 없는 것처럼 말하는데, 신진 디자이너는 두 번까지 무료로 쇼를 할 기회가 있다. 나라가 공짜로 키워주는 셈이다. 다른 나라는 이 정도 지원도 없다. 무엇보다 어떤 일이든 열심히 일하고 가정생활에 충실하면, 결국에는 누구든 잘 살게 되어있다. 매일같이 놀고먹고 마시면서 허송세월만 하지 않으면 된다.(웃음)
정직한 조언이다.(웃음)
이런 걸 노력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구태의연하고… 재미있고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면 된다. 우리 삶은 사실 상당히 진부하다. 똑같은 밥 먹고, 똑같은 데서 잠잔다. 그래도 항시 어떤 일이 즐겁게 느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예컨대 나는 일 년에 두 번 인테리어를 바꾼다. 한 달에 한번 침대 시트를 바꾸고, 소파 위치도 옮긴다.
최근 재미있게 본 영화가 있다면 한 편 소개해달라.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팬텀 스레드>를 굉장히 재미있게 봤다. 실제로는 디자이너 발렌시아가에게 영감을 받은 이야기로 안다. 남자 주인공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약간 꾸깃꾸깃한 듯한 와이셔츠를 입고 피곤하게 앉아있는 표정의 현실감이 상당히 좋았다. 그 인물처럼 창작 욕구가 강한 사람은 결혼하면 안 된다. 어쩌면 그게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이기도 한데, 난 다행히 일반적인 삶을 살고 있다.(웃음)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요즘 봄나물이 맛있다. 재료를 사다가 요리하고 와이프와 함께 와인을 곁들여 먹는다. 그리고 시시콜콜하고 쓸 데 없는 수다를 떤다.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그러고 있는 모양새가 재미있다. 때로는 좀 촌스러울 정도로 속 없이 떠들며 사는 게 좋다.(웃음)
2018년 5월 2일 수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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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 장광효 '카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