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시대의 100인을 만나다”
외연을 확장한다. 영화배우와 감독이 주를 이뤘던 기존의 인터뷰에서 보다 분야를 넓혀 피플 리스트를 채워 나갈 예정이다. 남다른 소신과 철학으로 우뚝 선 존재감의 이들은, 현실에 발을 붙인 흥미진진한 영화적 캐릭터에 다름 아니다.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우리 시대 100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 주
전주국제영화제, 영진위 영화제 평가 2년 연속 1위,
내적으로는 좀 더 독립영화다운, 외적으로는 신인 감독과 작품에 주목,
영화에 대한 명확한 철학을 갖춘 3인의 프로그래머가 전주를 지켜,
‘디즈니 레전더리’ 특별전, 가족 관람 추천,
JCP 영화에 대한 관심도 점차 높아져,
지금 화려하진 않아도 5년 후 10년 후 빛을 발할 프로그램을 갖췄다고 자부,
<남부군> 조연출로 맺은 인연이 현재까지,
할리우드의 드라마틱함과 유럽의 책무성을 동시 지닌 한국 영화,
다양성과 토대가 약해지는 게 문제, 독과점 해소 필요,
내년 20살, 성인이 될 전주국제영화제를 기약하다
# 전주국제영화제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영화제 평가에서 2년 연속 1위를 했다. 축하드린다. 2015년 8월 집행위원장을 맡은 이후 주목할만한 성과다.
알다시피 지난 정부에서는 평가 결과가 예산에 반영되지 않았었고, 결과 발표가 없었기 때문에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잘 몰랐었다. 이렇게 구체적인 결과가 나오고 어쨌든 잘 했다고 해주니 기분이 좋다. 무엇보다 우리가 가는 길이 맞다고 확신했고, 관객이 알아봐 주시는 것 같아 기쁘다.
처음 전주영화제를 맡으면서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자 했는지, 즉 지향점은.
전주영화제는 내가 집행위원장을 맡기 전에도 워낙 친근한 영화제였었다. 1회 때부터 왔었고, 직접 출품한 적도 있었다. 사실 내가 맡기 전 몇 년 전부터 다소 잡음이 있었는데, 그때문에 좋은 영화제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었다. 그래서 크게 바꾸거나 새롭게 뭔가를 시도한다기보다는 잡음을 없애고 좀 안정감 있게 이끄는 데 초점을 맞췄던 것 같다. 전주의 정체성이 ‘디지털, 대안, 독립’인데, 영화제가 독립영화 중심으로 진행되니 일반인에게 정체성을 알리는 게 쉽지 않았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공고하게 드러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었고, 다행히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기존의 정체성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고 볼 수 있겠다. 타 영화제와 차별점 혹은 자부하는 면이 있다면.
차별화가 참 쉽지 않은 일인데....내적인 것과 외적인 면, 두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겠다. 내적으로는 조금 더 독립영화다운, 좀 더 자신만의 표현 양식을 지키려 하고 드러내고 싶어 하는 실험성에 방점을 두고 작품들을 초청하고 부각하려 했다. 영화제 내부적 지향점이었는데, 프로그래머들이 고생 많았지만, 잘 지켜져 왔다. 외적으로는 신인 감독과 그들의 작품에 주목했었다. 신인 감독을 발굴하여 세계적으로 뻗어 나가는데 조력하고자 했다.
영화제의 결이 프로그래머에 의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현재 활동 중인 프로그래머(김영진, 이상용, 장병원)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그들이 전주에 이미 둥지를 튼 상태에서 내가 나중에 합류했는데, 세 명의 프로그래머 모두 개인적으로 잘 알던 사이였었다. 김영진 수석 프로그래머의 경우, 그가 대학생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내가 영화 교육과 영화 운동하던 시기인데 당시 그는 혈기 넘치고 진지한 학생이었다. (웃음) 이후 ‘씨네 21’ 등에서 기자와 평론 활동을 활발히 했다. 이상용, 장병원 프로그래머도 마찬가지로 영화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한국 영화에 대해 애정이 깊은 친구들이다. 다만, 내가 오기 전 3년 동안은 고생만 하고 빛을 못 봤다면, 영화제가 점차 자리 잡으면서 그들의 영화에 대한 관점이나 안목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다. 우수함이라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 ‘차별화된 우수성’이라면 감히 전주가 우리나라 국제영화제 중 제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모두 세 명의 프로그래머 덕분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지닌 영화에 대한 명확한 철학이 대안과 독립이라는 전주의 철학 자체와 잘 맞고 일관성이 있다. 또, 프로그래머 간의 팀워크가 아주 좋다.
초청 영화 선정에서 프로그래머의 재량권은 어느 정도인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영화를 선정하는 권한은 프로그래머에 있는 것이기에 관여하지 않지만, 간혹 추천하는 경우는 있다. 해외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좋은 작품을 발견하면 건의하는데, 추천해도 한방에 무시하기도 하고 때론 오케이 하기도 한다. 전적으로 그들의 권한이라 추천하면서도 항상 조마조마하다.
이번 영진위 지원으로 2017년 25억 원이었던 예산이 대폭 상승하여 40억 가까이 되는 거로 알고 있다. 재원 구성은.
관람 수익 포함해서 45억 정도로 전주시에서 한 26억, 국고에서 7억 8천 정도를 지원받았다. 나머지가 협찬과 판매 수익이라고 보면 된다. 또, 전주시네마프로젝트(이하 JCP)로 투자 수익이 좀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운영 인원은 어느 정도인가.
영화제를 위한 상근 직원이 13~14명 정도다. 지금 인터뷰하는 장소인 전주영화제작소(전주디지털 독립영화관)을 중심으로 전북지역의 독립영화 제작과 후반 작업 지원 등을 하는 조직이 따로 있는데 이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함께 운영하고 있다. 그들까지 합한다면 약 27명 정도가 상근으로 일하고 있고, 영화제 임박해선 비상근 직원들이 많이 투입된다. 예산은 보통 영화 수급 비용과 초청 비용, 돔 설치 등 행사 등에 소요된다.
이번 영화제를 방문하는 관객에게 추천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꼽는다면.
스페셜 포커스인 ‘디즈니 레전더리’ 전이다. 보통 디즈니 작품을 다 봤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 중 <판타지아>를 비롯한 초기 작품을 많이 봤으면 싶다. 초기작들에는 현란한 영상과 음향 효과를 앞세운 요즘 애니메이션에는 없는 인간적인 꿈과 낭만이 있다. 이번에 30여 편 넘는 작품이 준비돼 있으니 가족이 함께 즐기면 좋을 것 같다.
‘디즈니 레전더리’는 확실히 의외의 기획이다. 기획자가 누군지.
장병원 프로그래머가 디즈니쪽과 개인적으로 여러 번 접촉한 끝에 성립시켰다. ‘디즈니’ 특별전을 한다기에 처음에는 전주에서 디즈니라고?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디즈니라고 하면 할리우드에서도 메이저 중의 메이저이고 더구나 최근엔 마블이 떠오르니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전주의 정체성과 맞을지 우려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장병원 프로그래머가 뚝심 있게 오늘날 디즈니가 있기까지 역사를 제대로 훑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사람들이 ‘디즈니’를 잘 아는 것 같지만 의외로 모르는 부분이 많다고 하는데 설득당했다.(웃음) 흔히 ‘디즈니’라고 뭉뚱그려 표현하는데, 그들이 지닌 100년 역사와 영화적 가치를 다시 볼 필요가 있겠더라. 이번 영화제 기간에 어린이날이 껴있으니 극장에서, 제대로 된 환경에서 자녀와 부모가 관람하면 좋을 것 같다.
올해 총 241개 작품이 상영된다. 몇 편만 추천해달라.(웃음).
사실 나도 많이 보진 못 한다. 실제 초청받아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는 보는 게 쉽지 않다. 초청하기 전에 20~30편 정도 보고 국제영화제에 방문해서 보는 게 대부분이다. 프로그래머들도 전체 다 보기는 힘들고 그들이 맡은 분야의 해당 작품을 중심으로 관람한다. 이번에... JCP 작품 중 <굿 비지니스>(연출 이학준), <파도치는 땅>(연출 임태규)이 좋았다.
작년 JCP 작품인 <초행>(연출 김대환), <시인의 사랑>(연출 김양희), <우리 손자 베스트>(연출 김수현) 등이 좋은 평가를 받았었다. JCP 작품 선정 기준은.
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연출 이창재)도 있다. 외부 인사 초청이나 의뢰 없이 지원작 하나하나 직접 자체 심사를 통해 선정한다. 무엇보다 우리 정체성에 맞는지 중심으로 본다.
지역 영화 제작 지원 프로그램도 특징적이다.
영화제가 성장하려면 궁극적으로 지역의 토대가 단단해야 한다. 현재 보통 영화제라 하면 영화 매니아나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 전국에서 몰려 관객을 형성하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제를 방문해보면 가장 중요한 자원은 지역주민이다. 그들이 연령대에 상관없이 영화제에 참여하고 애정이 깊어 스스로 자원봉사자가 되곤 한다. 지역 주민의 영화제를 향한 애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지역 영화 지원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전주 시민의 영화제를 향한 애정을 자평한다면.
지금은 많이 이해해주고, 자랑스러워하고, 좋아해 주신다. 국제적인 평가도 좋은 편이다. 우리끼리, 즉 영화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전주 프로그램이 참 좋다고 평가했었는데, 그런 점을 이제 전주 시민도 알아봐 주신다. 행사 자체가 화려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전주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 앞으로 더욱더 전주 시민의 것으로 성장하리라 본다.
지금까지 전주를 이끌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지자체는 예산을 지원하며 영화제가 지역에 기여하길 기대한다. 보통 화려하고 대중적인 것을 원하는데 우리 전주영화제 성격이 화려하지도 유명하지도 않으니 아무래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 하는 면이 있다. 지자체의 기대를 충족하고자 너무 맞추다 보면 전주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게 되니, 그 균형을 맞추는 게 어렵다면 어려운 점이다. 전주영화제 프로그램은 5년 후 혹은 10년 후에 빛을 발할 프로그램이기에 당장은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될 수 있다.
# 이충직
<남부군>(1990)에서 조연출을 맡았었다.(웃음)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강사를 하던 때였다. 당시 부산에서 이용관, 고 김지석 등등과 매일 영화 이야기하던 중 어느날 <남부군> 감독이셨던 정지영 감독이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게 됐다고, 연출부에 공백이 생겼다고 하더라. 내가 학교에서 영화 공부만 했지 현장 경험이 없었기에 잘 됐다 싶었다. 이후 들어가서 정지영 감독님, 안성기 선배 등과 인연을 맺고 함께 <남부군>을 마무리했다. 정말 힘들었는데 재미있었던 시간이었다.
<남부군> 관련 에피소드가 많을 것 같은데, 좀 풀어놔 달라. (웃음).
그때는 정말 환경이 열악했었다. 1년을 일했는데 총 25만 원을 받은 게 다니 말이다. 또, <남부군>을 봤는지 모르겠지만, 눈 속 장면이 많은데, 영화 25도에서 촬영하고 했다. 그렇게 고생했는데도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었다는 기억뿐이다. 사람들이 나보고 영화 현장 사람들과 소통이 잘 된다고 얘기하는데 그건 그때의 인연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안성기 선배는 얼마나 한결같은지. 당시는 유명 감독님과 이하 연출부를 무슨 무슨 팀 이렇게 불렀었다. 예를 들면 임권택 팀, 배창호 팀, 정지영 팀 이런 식으로. 이 팀이 계속 편집실에서 마주치곤 하는데, 나름 기 싸움이라고 할까, 경쟁한다고 할까. 마치 강호에서 서로 다른 문파가 만난 듯한 느낌? 하하, 그런 게 있다. 당시 나는 정지영 팀이었는데, 우리가 제일 약했었다. 상대 연출팀에는 허진호, 이현승, 김성수 등등이 있었다.
‘영화’가 소위 밥벌이가 보장되지 않는 분야다. 당신이 공부했던 시기는 특히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선택했다.
어릴때부터 원체 영화 보는 걸 좋아했었다. 어린 시절 울산 비료공장 사택에 살았었는데, 당시 배가 정기적으로 하역하러 들어오면 선원 관람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영화를 빌려주곤 했었다.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았던 영화를 자막도 없이 레크레이션 센터에 모여서 봤었는데 그게 너무 좋았다. 이후 영화를 꼭 하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영화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내 나이 때 영화 전공이 흔하진 않았었다.
이후 현장보다는 주로 강단과 기관쪽에서 활동했다.
음, 연출하긴 했었다. 옴니버스 드라마인 <아미그달라>(2002)를 2002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했었다.(웃음) <남부군>을 끝내고 운이 좋게 중앙대에 지원했다가 임용되면서 학교로 가서 일하게 됐고, <아미그달라> 이후 연출을 또 해보려 했는데 당시 영진위에 호출당해서 위원장으로 일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현장에서 멀어지더라. 나같이 재능 없는 사람은 영화를 만들지 말고 일이나 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웃음)
혹시, 아직도 영화 연출에 대한 미련이 있는지?(웃음) 꼭 한번 만들고 싶은 작품이라든가.
아니, 그런 거 없다. 요즘 젊은 감독들이 얼마나 영화를 잘 만드는데! 우리 영화제에 출품한 감독만 해도 싱싱한 20대나 30대 초반 청년들이 너무 뛰어나다. 나처럼 재능 없는 사람이 이제 와서 뭘....
오랜 시간 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의 변화가 느껴질 것 같다.
글쎄, 별로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다만 학생들이 적응해야 할 영화계가 달라졌겠지. 내가 초반 교수에 임용할 때와 지금은 영화 제작 환경이 너무 다르다. 1990년대는 영화계 자체가 혼돈스러운 시기였다. 과거의 주먹구구식 영화 제작 관행과 대기업의 투자 지원, 영화 제작사 활성화 등등 여러 형태가 공존하는 동시에 모든 것들이 떠들썩한 상태였다. 당연히 학교에서 공부하던 학생도 어딘가 들떠있었고 도처에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현재는 영화 산업이 자리 잡았고 대부분 정형화됐다. 대기업 중심으로 재편되다 보니 학생들 입장에서도 명확한 한계가 보이는 거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가 분명해진 거지. 예전보다 전문적인 능력은 훨씬 좋아졌는데 의욕이나 열정 면에선 다소 시니컬해졌다고 할까. 그런 부분이 요즘 특징인 것 같다. 어느 정도 쉽게 포기하고 전략적인 선택을 한다.
영화로 진로를 정하고 일하면서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면.
어렵다는 건 개인에 따라 다른 거라....굳이 뽑자면, 유학간 후 집안이 쫄딱 망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힘들었었다.(웃음)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댔기에 몸은 참 고생했는데 시간이 흐른 후 생각해 보니 정신적으론 좋았던 것 같다. 유학하던 중 단 한 번 한국에 들어왔었는데 마침 1987년이었다. 영화 <1987>의 그때였다. 당시 진로 선택으로 고민하고 방황하던 때였는데 내 괴로움이 일순간에 사라지더라. 1987년을 목도하면서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을지, 역사의 흐름 속에 작으나마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하니 내 사소한 고민은 바로 극복됐었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유학 시절이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데, 물어보기에 굳이 대답한 거다. (웃음)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 영화가 지닌 힘은 무엇인지.
유연성과 사실성이다. 할리우드 영화와 비슷하면서 또 다른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다. 즉, 할리우드의 드라마틱한 파워를 갖췄으면서도 유럽의 사회적 책무성을 잊지 않는다. 드라마를 추구하지만 완전한 허구성에 빠지기보다 사회적 역할을 늘 고민하는데, 그런 이중적인 부분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쉽게 말하자면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갖췄다고 할 수 있겠다.
맞다. 할리우드 특징이 강하면 국제영화제의 콜을 못 받다가 이창동 감독이나 홍상수 감독 등이 돌아오면 바로 초청돼서 간다. 또, 봉준호 감독 영화같이 상업 영화와 예술 영화를 넘나들기도 한다.
한국영화계의 문제점과 해결 방법은.
대기업 중심의 독과점 문제와 요새 마블 영화가 2,000여 개 넘는 스크린을 독점하는 등 특히 스크린 독점 문제가 심각하다. 또, 영화 제작 자체의 양극화이다. 제작비 100억이 넘는 대규모 영화와 3억 미만 저예산 영화가 대부분으로 중간 규모 영화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이는 대기업 중심의 영화 제작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심화됐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100억 이상의 영화가 승산 있다고 보고 집중하는 거겠지. 그러다 보니 모든 영화가 모 아니면 도가 돼 버리고, 장르적 다양성이 약해졌다. 지금 같은 흐름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곪아 터질 수 있다. 다양성과 토대가 사라지고 있으니 말이다. 요새 한국 영화는 액션과 스릴러 나머지는 사적인 예술 영화가 대부분으로 그 중간에 있던 로맨틱 코미디, 멜로가 사라졌다. 영화는 다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독과점이 해소돼야 할 거다.
좋아하는 감독이나 영향을 받은 감독이 있다면.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빔 벤더스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그리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을 좋아한다. 히치콕은 워낙 영화의 교과서 같은 분이고, 평소 현대사회의 소통과 소외를 다룬 영화를 좋아하다 보니 벤더스와 안토니오니를 좋아하는 것 같다.
최근 행복한 순간 혹은 인상적인 일이 있다면.
음.... 작년 전주국제영화제를 무사히 마쳤을 때, 아주 행복했었다. 올해도 아마 5월 12일이 되면 아주 행복하지 않을까! (웃음)
2018년 5월 15일 화요일 | 박은영 기자(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
사진. 박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