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던졌고, 숙제를 받았다 <버닝> 이창동 감독
2018년 5월 29일 화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버닝>으로 관객을 찾았다. 1997년 <초록 물고기>를 시작으로 <박하사탕>(1999), <오아시스>(2002), <밀양>(2007), <시>(2010) 이후 6번 째 작품이다. 그를 기다렸던 것은 비단 관객만은 아니었다. <오아시스>를 제외하고 그의 모든 작품을 초청할 만큼 감독을 사랑했던 칸국제영화제는 이번에도 역시 러브콜을 보냈다. 영화 전문 매체 스크린데일리 역대 최고 평점을 비롯하여 칸 현지에서 호평을 받은 <버닝>은 본상 수상이 유력시됐지만, 아쉽게도 무관에 그쳤다. 국제비평가연맹상과 벌칸상에 만족해야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 <버닝>은 초등학교 동창생 ‘종수’(유아인)와 ‘해미’(전종서),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남자 ‘벤’(스티븐 연)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다룬다. 국내 공개 후 관객의 반응은 극과 극이다.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가운데 대체로 난해하고 모호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젊은 세대가 지닌 세상을 향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밝힌 감독의 의도가 무색하게 젊은 세대의 호응은 인색한 편이다. 여러 겹으로 감아 생각하게끔 만든 영화라고 <버닝>을 소개하며 극에 대한 해석을 관객의 몫으로 돌리는 이창동 감독. 다양한 해석은 반갑지만, 그 의미를 규정하고 안 맞는다고 따지는 것은 당황스럽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관객에게 모호하지만 생각해 보라며 질문을 던졌고, 관객은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숙제를 내줬다.


(해당 인터뷰는 <버닝>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하지 않는 거로 유명하다.
아시겠지만, 그동안에는 영화 전문지와 몇 번 했을 뿐 언론 매체와 인터뷰를 거의 안 했었다. 이렇게 많은 매체를 앞에 두고 인터뷰하는 건 처음인 거 같다. 언론에 노출되는 직책을 맡아 사람들과 계속 만나야 했는데, 개인적으로 그 점이 힘들었었다. (기자 주 이창동 감독은 참여정부 시절 2003.2 ~2004.6 제6대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함) 그래서 가능하면 노출 빈도를 줄이고자 했다. 또, 작가나 영화감독은 작품으로 말해야지. 언론 노출이 홍보에 과연 효과가 있는지 의구심이 있었다. 마치 중국집 주방장이 나와서 얘기한다고 짜장면 맛이 좋아지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아마, 예전에 수업을 받을 때, 작품으로만 얘기하라고 세뇌받아서인 것 같다. 이렇게 만났으니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자. 사실 <버닝>은 관객이 느끼기를 바라고 만들었다. 인터뷰 하니 설명은 해야겠고, 그런데 설명하면 안 되는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다. 감안해 달라.

이번에도 어김없이 칸의 부름을 받았다. (웃음) 비록 본상 수상은 실패했지만, 초청 자체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칸의 레드카펫은 어떻게 보면 영화인의 꿈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그 레드카펫을 밟고자 갈망한다. 하지만 최상급의 레드카펫일지라도 나는 체질적으로 감정적으로 맞지 않는다. 걸어가면서 미소 짓는 게 마치 몸치가 춤추는 듯 불편하더라. 게다가 <버닝>은 ‘종수’(유아인)의 이야기인데, 첫 공개를 칸의 레드카펫을 밟으며 했다. 칸은 ‘벤’(스티븐 연)의 세계인데 아이러니하다. 그게 우리 영화의 운명인 것 같다.

칸의 호평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소감이 궁금하다.
칸에 오는 작품들 대부분이 꼭 예술영화는 아니더라도 개성을 지닌, 무난하지 않은 영화다. 그렇기에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버닝>도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했는데, 다들 좋다고 해서 의아했다. 예전 칸을 방문했을 때, 감동했다든지, 울면서 쫓아온다든지,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표현하는 등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황금종려상을 대놓고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런 칭찬이 부담됐던 게 내가 심사를 해봤기에 내부 사정을 잘 안다. 매년 좋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은 떨어졌었다. 자세히 설명하기 힘들지만, 구조적으로 그런 게 있다. 평가가 좋으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기에 내심 기대하면서도 불안했다. <버닝>이 수상했다면 한국 영화 전체에 자극이 되고 탄력을 받는 계기가 되었을 텐데 그 부분이 아쉽다.

개봉 후 <버닝> 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다.
그 역시 내 예상과 다르다, 호불호가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반응은 아니었다. 관객의 반응이 숙제처럼 느껴진다.

숙제 같다는 의미는.
영화가 낯설고 익숙한 관습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 다만, 영화 속에 있는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점이 의아하다. 그래서 숙제 같다.

주인공 ‘종수’(유아인)는 작가지망생이다. 세상의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까 고민하고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본다. ‘해미’(전종서)도 자신의 서사를 지니고 있다. ‘벤’도 마찬가지다. ‘종수’에게 언젠가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럼, 여기서 생각해 보자. 벤이 들려주고 싶다는 얘기는 무얼까. 연쇄살인? 혹은 아프리카에서 돈 버는 얘기? 글쎄, 중요한 것은 서사가 있는데 관객이 각자 자신이 원하는 서사로 바라본다는 거다. 그게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범의 얘기일 수도, 소설가의 상상의 산물일 수도 있을 거다. 어떤 서사로 바라보든 완벽하진 않고 완전히 퍼즐이 맞춰지지 않는다. 바로 그 점에서 관객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비판을 하는 것 같다. 모호함을 느꼈으면 했는데 모호함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거다.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기에 자기만의 서사로 받아들이길 바랐는데 말이다. 보는 이들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영화의 방식이 낯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화법도 필요하다고 본다.

필요한 이유는.
내 세대는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고 정치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았지만, 어딘가에 답이 있다고 믿었다. 불평등과 부조리, 각종 모순이 만연했지만, 그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이 있다고 믿었고, 믿고 싶었던 거 같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분명히 뭔가 잘못됐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세상은 빠르게 편리해지고 깔끔해지고 세련돼 간다. 그 속에서 개인은 점점 왜소해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진다. 분노함으로써 무언가를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지만, 해결되지는 않는다. 대상이 없다는 것 혹은 명확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 무력감을 느낀다. 극 중 ‘종수’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보자. 극 중 만약, 벤이 살인자라면 그에게 느끼는 분노는 당연한 거다. 하지만, 그게 진실인지 알 수 없기에 분노하고 나아가 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에 더 큰 분노를 느낀다. 우린 그렇게 일상의 작은 것들에 분노를 쌓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아, 자꾸 설명하면 안 되는데, 또 설명하고 있다. (웃음)

의도가 성공적이라 보는가.
관객이 영화를 본 후 혼란스러워한다면 괜찮은 결과인 것 같다. 그런데 의미를 규정하고 거기에 안 맞는다고 화낸다면 당혹스럽다. 거듭 말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물론 일부러 퀴즈를 내려 한 건 아니다.

난해하다는 게 중론이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 즉 없는 것인데 있는 것처럼 있는 것인데 없는 것처럼, 영화를 보고 수수께끼 같이 느끼는 게 자연스러운 거다. 많은 분이 아마도 ‘해미’가 왜 사라졌는지, ‘벤’이 어떤 인간인지를 궁금해할 것이다. 초반에는 ‘해미’의 행방과 ‘벤’의 정체가 주요 미스터리다. 그 후엔 여러가지 미스터리가 중첩을 이룬다. 실재한다고 믿는 것과 실재하는 것의 차이, 즉 인식의 문제로 들어간다. 독자나 관객은 소설이나 연극, 영화 등을 보면서 그들 나름대로 서사를 구성한다. 상당 부분 자의적으로, 자신이 믿는 데로 받아들인다.

고양이 ‘보일’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름 ‘보일’만 해도 그렇다. 영화 제목 ‘버닝’(burning)의 ‘타는’과 ‘보일’(끓는), 연관성이 보인다. 게다가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던 존재다.
그런 의미를 두진 않았다. 공동 작업한 작가가 친구 고양이의 이름을 따서 쓴 것이다. 극 중 사연처럼 실제로 보일러실에서 발견됐기에 ‘보일’이라고 붙였다고 들었다. 지금 그 말을 들으니 한편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종수’의 집을 ‘파주’로 설정한 이유는.
극 중 ‘종수’가 사는 파주의 공간이 그리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질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 공간은 엄연히 해체되고 없어져 가는 농촌 공동체의 현실이다. 대남 방송이 들리고 요즘 모습 같지 않게 낙후된 곳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깔끔한 곳에 살겠지만, 그런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이 실제로 많이 존재한다. 그 공간은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종수’에게 물려준 현실이다. ‘종수’에게 파주의 집은 아버지가 싫어 어릴 때부터 도망가고 싶은 공간이었지만, 결국 홀로 남겨진 송아지 밥을 주기 위해서 다시 돌아간다. 젊은이의 눈으로 본 세상이 미스터리한 것처럼, ‘종수’는 아버지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이유로든 ‘종수’는 다시 아버지의 공간으로 돌아온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곳은 ‘종수’의 공간이다.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말을 듣고, ‘종수’는 동네를 뛰어다니며 비로소 동네를 똑바로 바라본다. 생각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이 아름답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아니, 아름답다기보다는 좀 더 원초적인 무언가를 느끼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비닐하우스가 태워진다는 말에 자신의 어렸을 적 무언가가 태워진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저녁노을 아래 ‘해미’가 춤추는 시퀀스의 영상미가 뛰어나다.
그 공간은 실제로는 전혀 아름답지 않은 곳이다. 옆에 찢어진 태극기가 펄럭이고, 축사가 있고, 소똥 냄새가 풍기는, 대남 방송이 수시로 들리곤 하는 공간이다. 초승달이 뜬 어슴푸레한 노을 속에서 젊은 여성이 춤을 추니 아름다워 보이는 거겠지. 일부러 아름답게 찍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고 총체적인 것을 담으려 했다. 일부러 유도했다면 역설적으로 그렇게 아름답게 찍히지 않았을 거다. 인공적인 조명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우연히 포착한 결과물이다.

해미의 춤 시퀀스에서 ‘저녁’이라는 시간에 의미가 있는지.
중요하다. 낮과 밤의 경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표현하기 위해 저녁이라는 시간을 택했다. 서서히 어두워지면서 눈에 보이던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젊은 세대의 고민을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극 중 세 인물이 젊은 세대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을까.
젊은 세대의 사회를 향한 고민을 보고 출발한 영화이긴 하지만, 꼭 청년의 이야기라고 카테고리화 되는 건 거북하다. 시작은 그렇지만 여러 겹을 가지고 있기에 단순하게 한정 지을 순 없다. 청년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 모습을 어떻게 그리냐는 여러 시각이 있을 거다. 개인적으로 ‘종수’보다는 ‘해미’가 요즘의 한국 청년 모습에 좀 더 가깝지 않을까 한다. 힘들게 살긴 하지만, 비록 카드빚이 있지만, 그래도 해외여행을 가고 가끔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러면서도 삶의 의미에 대해 해답을 찾으려 한다.

파격적이고 강렬하게 마무리한다. 의도는.
의도가 있긴 하다. 특정 해석을 받아들여 달라는 게 아니라 단지 던져 놓고자 했던 게 내 의도다. 관객이 영화적으로 느끼기를, 이미지로 받아들이길 바랐다. 벌거벗은 남자가 어딘가로 떠난다. 방금 살인을 저지르긴 했지만, 세상에 태어난 모습 그대로(벌거벗은 채로) 무언가를 두려워하거나 슬퍼하는데, 그런 감정이 무엇인지 어떤 느낌일지 관객에게 던져 놓고 싶었다. 세상의 미스터리에 대한 무력감과 그 무력감에 대한 분노를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던져 놓고 싶었던 거다. 한편으론, 종수의 소설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다. 아버지도 여자친구도 없어진 상태에서 앞으로 ‘종수’가 도대체 무슨 소설을 쓸까. 그리고 그가 쓴 소설의 의미는 무엇일지 (관객에게) 묻고 싶었다.

함께 했던 배우들과의 호흡은.
유아인은 촬영장에서 내가 요구하거나 원하는 것을 전적으로 잘 받아들여 줬다. 극 중 ‘종수’는 감정이든 무엇이든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다.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역할이라 배우로서 어려운 연기다. 연기자는 퍼포먼스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묻힌다는 위기감에 퍼포먼스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렇기에 힘든 역인데 아주 잘 해줬다.

극 중 ‘벤’은 모호함의 대상이고 미스터리 그 자체다. 이런 인물은 관념으로 이해할 수 있어도 몸으로 표현하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스티븐 연은 처음부터 잘 하더라.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힘들게 배우 생활하다가 큰 성공을 거둔 경험이 있기에 ‘벤’의 바닥에 있는 공허감을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벤’을 내면화하여 쉽게 그 인물 자체가 되어줬다. 한국어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했는데, 본인이 열심히 노력했고 뉘앙스를 감각적으로 잘 파악하더라. 어떤 의미에선 한국 배우보다도 예민하게 알아챘었다. ‘벤’의 뭔지 모를 미묘한 느낌은 스티븐 연이 아니면 만들어 내지 못 했을 것이다.

<버닝>의 흥행 예상은.
본의 아니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데드풀 2> 등과 붙게 됐다. 관객은 그냥 히어로도 아닌 슈퍼히어로가 세상을 구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우리 곁에 있는 서사가 무엇인지, 무엇을 지킬 것인지 질문하는 <버닝>을 재미없어 한다.

그간 작품이 많진 않았지만, 항상 상업영화를 만들었고 상업영화로 마케팅을 해왔었다. 지금까지 예고편을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관객이 안 드는, 보통의 마케팅 방식으로 소화해 내기 힘든 작품들로 항상 어려운 승부를 해야만 했다. (웃음) 지금까지 이런저런 방식으로 손해는 안 봤었다. 이번 <버닝>도 당연히 상업영화다. 당연히 (흥행이) 힘들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영화는 많은 사람의 의견을 거쳐 제작이 결정되는데, 의견을 나누다 보니 그럼에도 해볼 만 하다는 결론을 내려서 시작했다. 사실 영화의 흥행은 당시의 마케팅과 분위기에 따라 반응이 많이 달라진다. 대중적으로 쉬운 영화는 아니지만, 대중적인 접점을 찾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홍보 면에서) 칸의 수상에 올인한 것이 나쁜 방향으로 영향을 준 것 같다. <버닝>이 향후 안 좋은 사례로 남아 다양한 시도가 위축되지 않았으면 한다. 영화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관객을 위해서도 누군가는 새롭고 낯선 것을 시도해야 한다.

차기 작품 준비는.
잘 모르겠다. 8년 만의 신작이라고 하지만, 그동안 쉬고 있던 건 아니고 많은 프로젝트를 준비했고 고민했었다. 하고 싶은 얘기는 많이 있었기에, 곧 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아직 모르겠다. 일부는 <버닝>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를 해야겠다는 의욕을 되살리는데 시간이 걸릴 듯하다. 일단 숙제를 풀어야 한다. 영화를 설명만 한 것 같아 미안하고 아쉽다.

2018년 5월 29일 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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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_CGV 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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