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올해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20주년이다. 1회부터 지금까지, 20년간 함께해왔다.
내 인생과 떼어놓을 수 없는 애증의 영화제다. 코디네이터, 수석 프로그래머, 집행위원, 집행위원장까지 20년을 활동하는 동안 충성도 높은 많은 관객이 함께해줬다. 지금까지의 성과를 말하기보다는 여태껏 잘 했고 앞으로도 잘 하자는 격려를 서로에게 해주고 싶다. 앞을 보고 가야 한다.
관객 만족도가 상당히 높은 영화제로 알려져 있다. 참고할만한 지표가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영화진흥위원회의 ‘글로벌 국제영화제 지원사업’ 지원을 받는 6개의 국제 영화제가 열린다.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DMZ국제다큐영화제 그리고 우리 영화제다. 세금을 지원받기 때문에 당연히 평가도 엄격하다. 5명의 평가 위원이 각 영화제에 파견돼 관객 만족도를 조사하고 이렇-게 두꺼운 책자로 결과를 평가한다. 그 평가에서 거의 매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만족도 1등이었다. 지난해도 마찬가지다. 우리 스태프 중 한 명이 말하길 “작지만 큰 영화제” 라더라.(하하하)
홍보성 멘트를 말하고 스스로 상당히 민망해하신다.(웃음) 20주년을 맞은 덕인지 영화제 규모도 지난 회에 비해 상당히 커졌다. 개막식을 야외에서 진행하고, 장편경쟁 부문도 신설했다.
박근혜 정권 당시 <다이빙벨>(2012)을 상영한 부산국제영화제 지원금액을 대폭 축소하면서 6개의 국제 영화제에 전체에 대한 지원이 줄었다. 이번 정부에서 그걸 원상 복구해줬다. 서울시도 보다 전향적인 태도로 지원 폭을 넓혀줬다. 특히 장편경쟁 부문 신설은 우리의 오랜 꿈이었는데 올해 도입하게 돼 기쁘다.
우리 영화제 경쟁 프로그램에 유일하게 장편만 없었다. 그게 늘 아쉬웠다. 10대가 만들고 10대가 평가하는 ‘아이틴즈’ 부문이 있고, 단편 영화끼리 경쟁하는 ‘아시아단편경쟁’ 부문이 있고, 아직 영화화하지 않은 시나리오끼리 경쟁하는 사전제작 지원 프로그램 ‘피치 앤 캐치’가 있다. 장편 경쟁 부문은 그것들보다도 한 차원 위의 단계다. 10대에 영화를 시작한 여성 영화인이 단편을 만들고, 이후 장편 특히 극영화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구조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올해 개막작은 프랑스 출신 감독 아녜스 바르다의 신작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다.
아녜스 바르다는 세계 영화사를 여성 중심으로 다시 쓴다면 굉장한 무게감과 상징성을 자랑하는 인물로 평가받을 것이다. <여성은 좋은 영화를 만든다>(2015)라는 짧은 독일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전 세계 영화계가 여성에게 너무나 불평등하다는 발언을 한 사람이다. 게다가 2015년 열린 제68회 칸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종려상(기자 주: 일종의 공로상)을 탔다. 우리 영화제가 어떻게 그의 신작을 놓칠 수 있겠나. 우리는 아녜스 바르다의 모든 작품을 다 상영했다. 3회 영화제 때는 특별전을 준비했고 그가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올해는 때마침 영화 수입배급사 영화사 진진이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수입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들과 협조해 개막작으로 상영할 수 있었다.
낙태, #미투, 디지털 성폭력을 주요 주제로 꼽은 ‘쟁점들’ 섹션도 눈에 띈다.
‘쟁점들’ 섹션은 시대를 관통하는 첨예한 여성 이슈를 다룬 작품을 선정한다. 20년 동안 내내 운영해왔지만 이렇게까지 부각된 적은 없다. 희한하고 특이한 현상이다. 우리가 그렇게 작품 선정을 잘 했나?(하하하)
여성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가 상승했기 때문 아닐지…
사실 전체 36개국 147편 중에서 ‘쟁점들’ 섹션에 해당하는 작품은 9편이다. 어떻게 미투 관련 영화로만 몇백 편을 찾아내겠나.(웃음) 예컨대 ‘새로운 물결’ 섹션에서 가능성 있는 신인 감독의 신작을 소개하고 마르타 메자로스 감독의 <전장의 오로라>(2017)나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의 <붉은 거리>(2006) 등 중견 감독의 작품도 선보인다. 영화제에 방문하면 굉장히 다양한 섹션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거다. 도식적이거나 교훈적인 영화만 있을 거라는 선입견을 품을 필요 없다. 영화 한 편 자체로 예술성과 완결성을 갖춘 즐길만한 작품이 많으니 즐기러 와줬으면 좋겠다.
그랬지.(웃음) ‘피치 앤 캐치’ 본선에 진출한 다섯 팀에게 각각 멘토가 붙는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 창작자 입장에서도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방향으로 프로젝트가 개발된다고 본다. 본래는 본선에서 우승한 한 팀이 상금을 독식하는 체계였는데 올해는 본선에 진출한 다섯 팀 모두에게 소정이나마 금전적 지원을 할 수 있게 됐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수입한 영화사 진진의 지원 덕이다.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1955)을 개막작으로 한 1회부터 지금까지 여성 영화를 발굴하고 여성 영화인을 육성하는 데 큰 공을 들였다. 마음에 품은 굳은 목표가 있을 것 같다.
영화계에 성평등한 환경을 조성하는 게 최고의 목적이다. 여성이 더 이상 영화판을 떠나지 않도록, 영화계에 애정을 두고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 여전히 촬영 현장에서는 여성이 고통받는 온갖 이상한 이야기들이 많다. 무엇보다 관객 입장에서도 획일적으로 기획된 남주인공 영화만으로는 다양한 취향과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지난 3월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개소 기자회견 자리에도 함께했다.
미투 운동과 마찬가지로 반(反)성폭력 활동이기 때문에 함께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제도적인 운동도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적어도 나는, 남녀 동수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구의 반이 여자고 세금의 반도 여자가 낸다. 그렇다면 적어도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의 모든 기관에서는 전체 지원의 절반을 여성에게 할당해야 한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하는 멘토링 제도도 무조건 심사위원의 반은 여성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기계적인 개입을 통해서라도 결정권자 자리에 여성이 재배치돼야 한다.
역차별을 말하기 전에, 칸영화제 수상 이력부터 보자. 71회 동안 영화제를 이어왔는데 역대 황금종려상 수상자 중에 여성은 <피아노>(1993)를 연출한 제인 캠피온뿐이다. 정말, 진짜, 여자가 남자보다 영화를 못 만들고 열등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비율 차이가 너무 크다. 물론 남녀 동수운동은 내 생각이니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의 영역에서 어떤 식으로 여성이 분리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 한다.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진 만큼 당신의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쪽도 충분히 있을 것으로 본다.
음…(웃음)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느낌이지만 나 젊을 때 비해 요즘 젊은 여성들이 훨씬 똑똑한 것 같다.
어째서 그렇게 느끼는가.(웃음)
내 부모님 세대의 여성들은 이른바 ‘엄마부대’로 불리는, 굉장히 보수적인 분들이다. 그 아래인 내 세대는 민주화운동을 경험하긴 했지만 여성 문제를 마치 사소한 일부분으로만 치부하는 분위기에 많은 억압을 당했다. 하지만 요즘 여성은 정말 깨어있다. 우리 때는 사회와 관습에 따라 으레 그러려니 했던 문제에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낸다. 잘못됐다고 말할 줄 안다. 너무 좋다. 계속 그렇게 용감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웃음) 그분들에게 우리 영화제가 위안이 될 거다.
흐뭇함이 느껴진다.(웃음)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영화제 개막이 5월 31일(목)이다. 스태프와 함께 정신없이 일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자잘한 일부터 큰 건까지 정말 깔끔하게 처리해주는 스태프를 보면 너무 행복하다. 그러면 내가 실수 땜빵을 안 해도 되니까.(웃음)
2018년 5월 31일 목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
사진 제공_서울국제여성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