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이 인터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녀> 이야기 전에, 잠시 올 1월 이야기부터 하자.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다큐멘터리 <공동정범>(2016) 상영 한회 차를 전석 구매해 관객과 함께했다.
돈 버는 영화 쪽에만 몸담고 있어서 그쪽(독립영화) 세계를 너무 모르고 지냈다. 우연히 단편영화 한 편을 찍게 되면서 인디스페이스라는 독립영화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거기에서 상영할 법한 영화를 만드는 분들이 잘 돼야, 나 같은 배우도 할 게 많아진다는 생각이 들더라. 사실은, 유지태가 간간이 인디스페이스를 대관한다고 하길래 멋있어서 나도 흉내 내본 거다.(웃음) 후배라도 배울 건 배워야 한다.
그 생각이 더 멋있다.(웃음)
김일란 감독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어 그에게 선물을 주고 싶기도 했다. 한 번 그런 일을 해 보니까, 내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어떤 식으로 돈을 써야 하는지는 좀 알겠더라.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늘 한곳으로만 향하던 내 시선을 바꿔봤다는 것 자체로 스스로를 칭찬한다. 요즘은 독립영화 쪽에 몸담은 분들을 만나면 “이 어둠의 자식들! 자존심밖에 없는 놈들!” 하면서 장난도 친다.(웃음) 늦게 철든 기분이다.
본격적으로 <마녀> 이야기를 해보자. 모처럼 만의 장편 영화 출연인데, 총평을 내린다면.
긴장감과 공포를 주는 방법이 낯설게 느껴졌지만, 그게 박훈정 감독의 색깔이구나 싶더라.
예컨대 <마녀>에서는 내가 연기하는 호흡을 일부러 끊어버린 편집이 눈에 보이더라. 그런 방식으로 작품 특유의 공포 분위기를 밀고 나간 거다. 관객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도라 익숙하지 않을 수 있지만 창작자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걸 보여줘야 한다. 어떤 시도든 자꾸 하는 게 낫다.
<마녀>는 박훈정 감독의 전작인 <신세계>(2012) <브이아이피>(2016) 등과 마찬가지로 액션과 폭력성, 누아르 정서를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 장르물이다. 다만, 핵심 주인공이 모두 여성으로 바뀌었다는 게 눈에 띈다. ‘자윤’역에 김다미, ‘닥터 백’역에 당신 조민수가 낙점됐다.
제작 투자를 맡은 워너브러더스에서 박훈정 감독에게 먼저 제안했다고 하더라. ‘닥터 백’ 역할을 여자로 바꾸면 어떻겠냐고 말이다. 처음에는 별로라고 하던 감독이 ‘그럼 조민수는 어떻냐’는 제안을 받더니 오케이 했다는 거다. 내가 인복이 있는 것 같다.(웃음) 그게 이 영화에 대한 애착이 생긴 첫 번째 이유다. 날 믿어준 사람에게 절대 실수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 그리고 잘 해내고 싶다는 욕망이 컸다. 아마 박훈정 감독보다 내가 시나리오를 더 들여다봤을지도 모른다.
일각에서는 박훈정 감독의 전작 <브이아이피>가 일으킨 ‘여혐 논란’ 때문인지 <마녀>가 그에 대한 일종의 변명 작품 아니냐는 비판적인 시각도 나온다.
그건 진짜 아니다. <브이아이피>가 제작되기 전에 내가 먼저 <마녀> 시나리오를 받았다. 그래서 <브이아이피> 시사회 때도 초대받았던 것 아닌가. 박훈정 감독이 다음 작품을 한다기에 꽃다발까지 전해주고 왔는데… 아니라고 말해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라고들 하시니, 내가 미치겠다.(웃음) 만약 <마녀>가 <브이아이피>가 일으킨 논란의 변명 혹은 해명 격인 작품이라면 나는 절대 이렇게 대답하지 않는다. ‘그 감독 괜찮은 감독이야’ 정도로 말하고 말겠지.
<고스트 버스터즈>(2016) <오션스8>(2018) 등 국내 극장가에 소개된 작품처럼 성별 전환은 할리우드에서 이미 유행처럼 번지고 있기도 하니까.
굳이 이렇게 성별을 나눠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면 더 좋겠지만, 어쨌든 그런 변화가 있는 건 사실이고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다만 할리우드 영화나 세계적인 뉴스에 나오는 여성은 여전히 실제 우리 삶과는 이질감 있다고 본다. 그들은 세상을 앞질러 간다. (현실이 아니라) 이미지화된 여성이다.
나도 그 시절(기자 주: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를 통칭) 활동한 여성 배우 중에는 꽤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봤다는 사람 중 하나인데, 그래 봤자 판사, 검사, 의사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무조건 정장에 바지 차림을 해야 했다. 감독이 여성 배역에 요구하는 정형화된 이미지를 정답처럼 여기던 시절이다. 그다음 조금 발전해서 새롭게 등장한 직업이 의상 디자이너였고... 그런데, 과연 그런 인물이 당시 사회에서 실제로 얼마나 활동하고 있었을까? 문화가 사회 흐름 안에서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너무 앞장서 나간 것 아닐까. 그래서 소위 말해 ‘깨진’(흥행에 실패한) 영화도 있다. 그러면서 여성 주인공인 영화에 투자 안 하겠다는 소리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분석하는 시각도 있을 수 있겠다.
다들 성급하지 않게, 사회 흐름과 같이 갔으면 좋겠다. 일상적인 것들을 잘 얹혀야 한다.
‘닥터 백’ 역할은 어떤가. 그는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다.
감독님은 ‘닥터 백’이 능력자인 건 맞지만 과한 표현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욕망을) 쪼개고 쪼개서 역할을 만들었다.
‘자윤’의 정체도, ‘닥터 백’의 역할도 아리송하던 영화는 후반에 들어서면서 모든 의문이 해소된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10여 분에 달하는 ‘닥터 백’의 설명 시퀀스다.
대본에서 그 장면을 보는데 눈앞이 까매지더라. 읽는 나도 혀가 꼬이고 지겨운데 이걸 관객에게 어떻게 늘어지지 않게 보여줄 수 있을까. 상대와 주고받는 게 아니라 나 혼자 10분 동안 떠들어대는 장면 아닌가. 더군다나 촬영 공간도 너무 좁아 관객의 눈이 도망갈 데가 없더라. 분명 갑갑할 텐데, 어떡하지? 감독과 무수히 많은 상의를 했다. 이 신, 잘못 찍으면 대단히 늘어지고 설명적으로 보일 거라고 말이다.
완성된 장면을 보고 나서 나 역시 비슷한 우려를 했다. 명색이 장르물인데… 그 시퀀스 만큼은 너무 설명적이랄까. 물론 배우의 역량보다는 연출 관점에서 접근하고 해결할 숙제였다고 본다.
그런데 그 ‘설명적’인 부분이 없으면 영화의 반전이 살지 않는다. ‘닥터 백’이 온갖 잘난 척은 다 하면서 이야기를 깔아줘야만 ‘자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감독도 고민이 많았겠지. 어쨌든 그 공간 안에서 나올 수 있는 최상의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시사에 초대한 일반인 동생 중 한 명이 그러더라. <반지의 제왕>(2002~2003)도 1편부터 싸우지는 않는다고.(웃음)
대신 후반부에 액션 시퀀스가 몰아서 등장한다. 특정 관객층의 입맛은 맞출 수 있겠다 싶었다.
내가 아날로그 액션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아저씨>(2010) 무술 감독이 함께해준다고 할 때 정말 좋았다. SF물에서는 사람들이 자꾸 날아다니기만 하는데, 그게 너무 많이 나오면 지겹다. 나 같으면 저렇게 (화려하게) 회전할 때 이미 다 죽였겠다 싶은데도 기다리고만 있다. 그런 것보다는 직접 치고 때려야 통쾌하지 않나.
정작 당신이 액션에 합류한 지점은 거의 없는데.(웃음)
난 이미 시체 상태가 된 뒤에 다른 배우들의 액션이 시작된다. 언제 (죽어있는 내 모습이) 카메라에 걸릴지 모르니까 숨도 쉬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다른 배우들의 액션 연기를 지켜봐야 했다. 속으로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 나도 액션 하고 싶은데! 처음에는 그러고 있는 나를 다들 걱정해주더니, 촬영이 시작되니까 관심도 없고 심지어는 나를 타고 넘어가더라.(웃음)
2편 시나리오는 이미 완성된 건가. 그때도 ‘닥터 백’을 만나볼 수 있을까.
나도 감독님께 물어보고 싶다. 인터뷰와 홍보 일정이 다 마무리되면 물어봐야지. 근데 워낙 시크하게 말하는 분이라…(웃음)
어쨌든, 1편이 흥행해야 2편과 3편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말이다. 하필이면 개봉 날이 한국과 독일의 월드컵 경기 날이라 한숨이 나온다.(웃음) 요즘 사람들은 이벤트나 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나. 영화를 봐야 하는데 다들 거리로 나갈 것 같다. 그런데 나부터도 축구를 워낙 좋아해서 때만 되면 우리 집 식구, 언니네 집 식구가 모이니... 나라의 흥과 우리 영화의 명운을 두고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웃음)
그냥 13년 정도로 쳐주면 안 될까.(웃음) 30년 차 하면 너무나 완숙하게 연기를 해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이 든다. 숫자가 참 무섭다. 너 정도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아? 하는 시각 때문에 말이다. 할수록 힘든 게 연기인데…
앞으로 <마녀>처럼 조민수의 마음을 흔들 작품이 또 찾아올까.
찾아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앞으로 몇 작품이나 더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남에게 피해 안 주고 대사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을 때까지로 본다면 한 열 개쯤은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 작품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
최근 재미있게 본 영화가 있다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티모시 샬라메 연기를 보는 순간 저 친구는 작품 안에 녹아들어 놀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행동거지도 크지 않고 살포시 연기하는 데 너무 매력적이다. 동물적인 감각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 그런 배우가 연습을 하기 시작하면 누구도 감당하지 못한다. 배우는 꼭 연습을 해야 한다. 재능이라는 재료는 다 쓰면 없어진다. 나도 그것만 믿고 까불었던 적이 있는데, 다른 능력이 나오지 않고 실력이 멈춰버리더라.(웃음)
진실한 조언이다.(웃음) 최근 행복한 순간이 있었는지.
촬영 현장에서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어떤 아이디어나 감정이 확 튀어나올 때. 그럴 때 참 행복하다.
2018년 6월 29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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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엔터스테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