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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고음 부심’없어, 이제 후반전이다” 배우 한지상
2018년 7월 20일 금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국내에서 뮤지컬 좀 봤다는 관객이라면 한지상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 <넥스트 투 노멀>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두 도시 이야기> <데스노트> <프랑켄슈타인> 등 수많은 작품으로 준수한 노래와 춤 실력을 자랑하며 두터운 팬층을 확보해온 그다. 무엇보다 시원시원한 고음은 관객의 귀를 매료시킨 강력한 무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돌연 ‘더는 고음에 대한 자부심은 없다’고 선언한다. 대형 극장에 오르며 많은 걸 배우고 얻었지만, 어느 순간 뮤지컬 특유의 연기 관습에 젖어 들어 기본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는 걸 느꼈단다. 이 인터뷰는 그가 치열한 자책의 시간 동안 내린 결론이다. 꽤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은 과감한 말들이 작심한 듯 튀어나온다. 이제는 그간의 관성에서 벗어나는 진일보가 필요한 순간, 배우로서 맞아들여야 할 후반전이라고.

지난 6월부터 국내 창작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에서 ‘앙리’와 ‘괴물’ 두 역을 맡아 공연 중이다. 인터뷰 일정이 나던가.
어제는 공연히 없었다. 그래서 술을 좀 마셨다.(웃음) 물론 공연 전날에는 절대 마시지 않는다. 나는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배우라 관리를 하지 않으면 타격이 크다. 나만의 금기 조항을 철저히 지키는 편이다.

연극 <세발자전거>(2003)로 데뷔해서 뮤지컬 계에 발을 들였다. 대중적인 작품 <그리스>(2005)를 거쳐 <두 도시 이야기>(2014) <데스노트>(2017) <나폴레옹>(2017) <모래시계>(2017) 등 최근까지도 쉴 새 없이 많은 작품을 소화했다.
대학에서 전공한 건 연극이었다. 연극을 직접 만들고 배역을 연기하는 데 푹 빠져 살았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다른 교양 수업은 빠져도 연극 수업만큼은 꼭 나갔으니까. 꿈 없이 학창시절을 보낸 나를 구원해준 의리 있는 장르랄까.(웃음) 그런데 우연한 기회로 뮤지컬 오디션을 보면서 갑작스럽게 뮤지컬 배우의 삶이 시작된 거다.

연극과 달리 뮤지컬은 노래까지 잘해야 한다. 또 하나의 재능을 발견한 셈인데.
노래를 좋아하긴 했지만, 데뷔 이후에도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요구하는 창법이나 발성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리스>처럼 대중적인 팝을 위주로 한 작품은 소화할 수 있었지만, 장차 노래로 강점을 보여주지 못하면 뮤지컬 배우로서 야망을 품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뮤지컬 작품 대부분은 80퍼센트쯤 노래로 이루어지니까. 20대 중반에는 스스로 성장의 여지가 별로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다행히 <스위니토드>(2007)라는 작품에서 배우 홍광호를 만났고 많은 걸 배웠다. 그 친구가 연기하는 걸 보며 두성을 독학했고, 그 덕에 뮤지컬 조연 배우로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를 장착하게 됐다.

홍광호와의 만남…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다.(웃음)
생각해보면 거기까지가 딱 내 인생의 전반전이다.

그 말은, 후반전도 있다는 뜻인데.
먹고 살 정도를 벌고 어느 정도 부를 얻게 돼서인지 조금씩 타성에 젖기 시작했다. 연극을 너무나 좋아했던 20대 초반의 내 정체성을 잊고 산 것 같다. 2009년에 군대를 갔는데 그때까지 쭉 그런 상태였다. 그저 ‘어떻게 어떻게’ 살아온 느낌이다.

너무 박한 평가 아닌가.(웃음) 한지상이라는 이름이 낯선 대중도 많겠지만 뮤지컬 업계에서만큼은 고음을 확실하게 소화해내는, 노래 잘하는 배우로 유명하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2013)의 ‘유다’역으로 특히 빛을 발했고 든든한 팬층도 보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간 목 관리를 워낙 철저히 했고 지금도 그렇다. 허세가 아니라, 작품에 임하는 동안 나만큼 철저하게 관리하는 사람은 정말 없다고 봐도 된다.(웃음) 하지만… 뮤지컬 작품에서 오랫동안 노래를 하다 보면 정말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연기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무엇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인가.
뮤지컬에서는 목이 상하지 않는 효율적인 발성을 하는 게 중요하다. 마치 성악 하듯 말이다. 하지만 자꾸 그런 방식으로 소리를 내다 보면, 평범한 대사를 할 때까지도 비슷한 식으로 연기하게 된다. 말은 (노래가 아니라) 정말 말인 것처럼 느껴져야 하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뮤지컬 배우에게 갖는 편견도 주로 그런 것들 아닌가. 실제로 뮤지컬 배우가 드라마나 영화 오디션을 보러 가면 아무리 노력해도 “배우님, 지금보다 힘 빼고 연기해주세요”하는 말을 듣게 된다. 아는 후배도 조심한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 우리 같은 배우는 그런 과정을 거치며 느끼는 게 많다.

예컨대 담백하게 연기하지 못하고 다소 과장된 듯 보이는 특유의 느낌을 뜻하는 건가.
그렇다. 연극 <레드>(2013)를 함께한 연극계 대선배이신 강신일 선생님께 따끔한 조언을 듣기도 했다. 말은 말처럼 느껴지게 연기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엄청 부끄러웠다. 배우의 연기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자학을 많이 했다.

지금 공연 중인 <프랑켄슈타인>에서 그런 심경 변화가 반영됐다고 봐도 될까. 초연(2014), 재연(2015)에 이어 올해가 삼연째인 만큼 지난 연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 눈에 띄겠다.
노래보다는 연기에 집중하고 있다. 둘 사이 함수관계에 정답은 없겠지만, 노래에 적합한 발성에 익숙해지면 대사에 적합한 발성은 약해지는 반비례 관계가 있다고 느낀다. 노래는 연기 건강에 확실히 좋지 않더라. 세 번째 <프랑켄슈타인>을 연기하는 이번만큼은 독백을 할 때 ‘지금 이 대사를 왜 하고 있는지’를 꼭 이해하며 발성하고 싶었다. 예전보다 노래가 약해졌다는 평가도 있지만, 오히려 지금 더 큰 희열을 느낀다.

누군가 당신의 변화를 알아채고 일종의 지적을 한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면 목 상태가 괜찮냐는 질문을 여러 번 들었다. 예전만큼 고음을 내지 않으니 내 목 상태가 이상해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 성대는 그 누구보다 깨끗하다. 최근 이비인후과에서도 같은 소견을 받았다. 이건 결국 연기에 대한 내 철학과 소신의 문제라고 본다.
오늘 이 자리에 상당한 각오를 하고 나온 것 같다.(웃음) 정확히 해두자. 노래를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한다는 말이다. 더 나은 연기를 위해서 말이다.
노래를 못하고 고음도 못 내면서 연기로만 승부 보겠다면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결코 그렇지 않다. 관리할 걸 다 하면서 배우로서 진일보 해보겠다는 거다. 물론 그동안 내 뮤지컬을 좋아해 준 팬 입장에서는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네가 누구 덕에 이 자리에 올라왔니? 네가 얻은 부와 명예는 다 누가 준 것이니?”(웃음)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뮤지컬로 얻게 된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정말 고마운 마음이다. 하지만 연기하는 사람은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진일보시키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진일보로 도달하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가.
지금 공연 중인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에 남자 아역 배우가 세 명 나온다. 괜한 칭찬이 아니라, 그 친구들이 연기를 너무나 잘한다. 나와 함께 호숫가에 앉아 몇 마디 되지 않는 대사를 나누는데 그게 어찌나 깔끔하고, 솔직하고, 직관적으로 느껴지는지 모른다. 그 친구들은 자기가 왜 그 대사를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반면 내 연기는 때가 묻었고 더러워졌다. 내가 그 친구들보다 더 잘 연기했으면 좋겠다.

누구든 자기 업계에 오래 몸담으면 어떤 습관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걸 나쁘게 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노하우가 생겼다’고 표현할 수 있는 지점도 있다고 본다.
물론이다. 하지만 진화하기 위해서라면 안 좋은 버릇은 과감하게 다이어트해야 한다. 자칫하면 “밥 먹었어요?”같은 단순한 한마디도 노래처럼 부르게 된다. 연기에 뜻이 있다면 조정석 형님, 엄기준 형님, 그리고 김무열처럼 활동해야 한다. 뮤지컬 업계에서 주연급을 맡고 있는 배우가 이런 말을 하면 이단아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한 장르에만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기준으로 작품을 선택하고 싶다. 우리 같은 사람은 자기 자리만 지키려 하지 말고 좀 더 열린 태도로 다양한 시도를 해야 한다. 문화적인 진보의 개념이 필요하다. 정치적인 의미는 아니다.(웃음)

진보, 보수라는 단어가 정치적으로 자주 쓰일 뿐, 사람의 삶에서 늘 활용할 수 있는 단어라고 본다.(웃음)
어릴 때부터 마치 공식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들에 대한 반항심이 컸던 것 같다. 나도 아직 모르는 내 자아가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타성에 젖어 주입식 교육을 받았고, 3수까지 했으니 말이다. 내 적성을 알았다면 진작 연극영화과에 진학했을 텐데, 원하는 걸 용기 있게 말해볼 수 있는 교육적 분위기가 전무했다. 그러다 보니 공황장애를 겪기도 했다.

저런…
3수 끝에 미친 척하고 연극영화과에 지원했다. 해 보니, 사람도 변할 수 있다는 걸 알겠더라.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은 어떻든) 나라도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거다. 물론 그에 따른 주변의 호불호는 있겠지만, 그마저도 즐기고 있다.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불호’ 의견 때문에 상처 받았냐고도 하는데(웃음) 아니다. 정말 즐긴다.

(웃음) 알겠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오늘처럼, 조금은 위험할 수 있는 발언이지만 내 소신을 지키는 말을 할 때 행복한 것 같다. 내가 나를 믿고, 그 힘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으니까. ‘이건 내가 바란 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바로잡고 싶다. 아마 이 인터뷰를 보고 주변에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진작에, 일찌감치 더 연기에 힘쓰지 그랬니!(웃음) 그래도 최근 <아마데우스>(2018)라는 연극에서 ‘살리에리’를 연기하며 혈이 뚫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행복함을 느꼈다. 아, 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무슨 말인가.
김무열과 함께 ‘반상회’(2006~)라는 극단을 만들어 벌써 네 번째 자체 제작 연극을 올렸다. 곧 정기 공연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인터뷰 때 이 사실을 공개할 거라고 전하진 않았지만, 뭐 말해도 괜찮겠지!(웃음)

사진 제공_씨제스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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