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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前 부산영상위원회운영위원장, 교수, 영화제작자 ‘유비콘텐츠’ 대표 최윤
2018년 7월 29일 일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시대의 100인을 만나다”

외연을 확장한다. 영화배우와 감독이 주를 이뤘던 기존의 인터뷰에서 보다 분야를 넓혀 피플 리스트를 채워 나갈 예정이다. 남다른 소신과 철학으로 우뚝 선 존재감의 이들은, 현실에 발을 붙인 흥미진진한 영화적 캐릭터에 다름 아니다. 영화 같은 자신만의 삶! 그 자체의 인문학을 들려줄 우리 시대 100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 주


임기 만료? 해임?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재신임 못 받아,
불이익 예상했으나 소신을 밝혀,
국내외 영화인이 그의 복귀 촉구에 목소리 높여,
영화 제작 전반과 영화·영상 산업 발전 관련 포괄적 지원,
한국 영화산업이 발전하려면 토대가 튼튼해야,
자유경쟁? No! 정책적인 가림막 필요,
영화의 소재와 주제에 맞게 제작 방향 결정,
제작자는 영화의 배경 같은 것,
그 영화를 알아보고 탄생시킨 것에 보람,
가정과 일 가운데 중심을 잡자,
오랜만에 영화적 고민거리 안겨준 <버닝>,
주변에서 보여준 믿음과 신뢰에 더 열심히 감사하며 살자 다짐.


지난 2월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자리에서 갑자기 물러났다. 여러 이슈가 맞물려 있는 것 같다.
원칙적으로는 임기 만료라고 할 수 있지만, 前 부산시장(서병수)으로 부터 재신임을 받지 못 한 거니 사실상 짤린 거로 봐야지.(웃음)

<다이빙벨> 상영으로 촉발된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국제) 사태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부산영상위원회와 부국제가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내가 부국제 이사로 활동했었다. 알다시피 前 부산시장과 前 집행위원장(이용관)의 갈등으로 작년 부국제에 많은 영화인이 보이콧을 선언했었다. 내가 주인이 없는데 손님이 오겠냐며 前 집행위원장 복귀를 주장하는 영화제측의 편을 드니 미운 털이 박힌 거다. 사실 이런 사태를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생각을 밝히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前 부산시장(서병수)은 영화제 관련 압력 행사를 안 했다고 주장하지만, 내 경우를 통해 그가 압박한 사실이 증명됐다고 본다.

부산아시아영화학교 출신으로 구성된 뉴아시아프로듀서네트워크(나프넷)을 비롯해 국내외 영화인이 모여 당신의 영상위원회 복귀 촉구 서명과 성명을 발표했다.
지난 6.13 지방선거로 시장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가 공석이다. 부산 독립영화협회, 부산감독협의회에서 재신임 요청 편지를 새로운 시장(오거돈)에게 보내고, 성명서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150명 가까이 되는 아시아 영화인들이 SNS상에서 서명 운동도 벌인 거로 알고 있다. 한국영화인 뿐 아니라 아시아영화인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 결과는.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새로운 시장이 7월 1일부로 취임했으니 일단 시의 내부 인사문제부터 처리하시겠지.

유임을 예상했다가 재신임을 받지 못했는데, 요즘 근황은.
재신임을 하지 않는 경우 통상 2개월 전에 알려줘야 하는데, 난 2월 13일 통보받았다. 그러다 보니 1학기는 건너뛰고 다행히 2학기에 부산대학에서 ‘영상산업론’을 강의하게 됐다.

영상위원회가 지역 별로 존재하는데, 현황과 주요 업무는.
현재 공식적인 지역 영상위원회는 12개다. 이 12개 영상위원회가 몇 년 전에 연합체 형식으로 한국영상위원회를 만들었으니, 13개로 볼 수도 있다. 광주영상위원회의 경우 관과 협력 기관이 아니라 개별적인 단체로 다른 영상위원회와는 교류가 없는데, 광주까지 포함하면 총 14개가 전국에 분포돼 있다.

영화제가 완성된 영화, 즉 개봉관에서 보기 힘든 독립영화나 예술 영화 혹은 외국 영화를 발굴 초청해서 일반에게 볼 기회를 제공한다면, 영상위원회는 지원하고 교육하고 지역 영화산업 발전을 위해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다.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려면 아이디어 단계부터 각본, 캐스팅, 촬영, 편집 그리고 개봉까지 긴 시간과 여러 과정이 필요한데, 그 과정에서 필요한 유치와 지원 등 포괄적 업무를 수행한다고 보면 된다.

영상위원회 중에서 부산영상위원회가 규모와 활동면에서 선도적인 위치에 있는데, 간략한 소개를 부탁한다.
1999년 국내 최초의 영화촬영지원기구로 출범했다. 2017년 말 기준으로 촬영 지원한 영화 영상물이 1180편이 넘었고, 부산영상위원회 제작지원작 중 <해운대>(2009), <도둑들>(2012), <변호인>(2013), <국제시장>(2014), <베테랑>(2015), <부산행>(2016) 등은 천만 관객을 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활동이 너무 많지만,(웃음) 부산아시아 영화학교 개교, 시네마하우스 호텔 부산 오픈, 수도권의 영화인 및 기업 유치 유도를 위해 영상산업센터를 증축 개관했다. 그리고 국내외 영화·영상 인력 양성을 위한 전문 프로그램 운영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또, 비단 국내뿐이 아니라 아시아권의 지역 영상위원회를 이끌어 왔다고 할 수 있는데, 18개국 59 회원이 가입한 아시아영상위원회 네트워크(AFCNet)가 그 결과물이다. 그동안 부산영상위원회를 지켜 온 직원들의 노고가 컸다고 생각한다.

제작사 유비콘텐츠 대표이자 <뷰티풀 선데이>(2007), <마이 파더>(2007)부터 최근작 <앨리스: 원더랜드에서 온 소년>(2015), <운동회>(2016)까지 제작을 주로 해왔는데, 영상위원회와 어쩌다가? 인연을 맺게 됐는지. (웃음)
2016년 초 부산 소재 대학(동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존경받는 원로이신 前 안병율 운영위원장이 새로 운영위원회장에 선임되셨고, 내가 사무처장을 맡았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주셨다. ‘한국 영화산업 발전 방안’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걸 들으셨는지 직접 와서 실천해 나가면 어떻겠냐는 거였다. 사무처장은 겸직이 안되는 자리라 망설였지만, 지금까지 했던 일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일이라 도전하기로 했다. 이후 안병율 위원장님이 건강상 사퇴하셨고, 내가 그 후임을 맡게 됐다. 사무처장이 실무 총괄이라면 위원장은 대외적으로 위원회를 대표하고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위치기에 다소 정치적이고 행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건 알았지만, 결국....

좀 전에 ‘한국 영화산업 발전 방향’ 관련하여 발표했다고 했는데, 한국 영화 산업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견해는.
세계 영화산업이 큰 변화를 맞고 있다. 모든 산업이 비슷하겠지만, 한국 영화산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려면 토대가 강해져야 한다. 공부한 학생들이 사회에 나와 바로 저예산, 독립영화 등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 많이 만들어지면 일부는 영화 예술적으로 이바지할 것이고, 일부는 상업영화로 성공할 것이고, 또 일부는 촬영, 조명, 미술 등 스태프 양성에 도움 될 거다. 지난 MB와 박근혜 정부는 정책적으로 영화 산업을 외면, 발전을 가로막았던 거로 여겨진다. 시장 경제 논리로 접근하여 자율에 맡긴 후부터 대기업의 독과점은 점차 심각해졌다. 극장 독점과 양극화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생각해봐라. 자유 경쟁 체제에서 어떻게 독립영화가 상업영화와 경쟁할 수 있겠나. 정부 차원에서 독립·중·저예산 영화, 다양성 영화를 보호, 육성해야 한다.

사실 독립영화 전용 예술극장을 운영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데, 지난 정부를 거치면서 그나마 있던 지원도 줄거나 끊어졌다. 좋게 말하면 외면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탄압이나 마찬가지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건만 보더라도 그렇다. 나 역시 리스트에 올랐었다.

다양성 영화의 경우 지원 대상이 극장에서 작품으로 정책이 바뀌었다. 그 결과 메이저 극장의 예술관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성 영화 내부 경쟁이 치열해졌다.
맞다, 꼭 집어 말한다면 CGV 아트하우스에 걸리려 노력하는 거지. 프랑스처럼 지원 대상을 작품 뿐만이 아니라 예술영화 전용극장으로도 확대해야 한다. 최소한의 가림막을 만들어 주는 게 장기적으로 한국 영화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이다. 또, 최근 노동법 개정으로 영화 산업이 특수업종에서 제외되어 주 52시간 노동 시간을 준수하게 됐다. 물론 스태프 처우 개선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영화라는 게 창의적인 작업으로 날씨나 이동 등 여러 요인의 영향을 받다 보니 일률적으로 적용한다면 제작비 상승은 불가피하고, 영세한 제작사나 독립영화들은 더 어려워지는 상황이 되지 않을까 한다. 앞으로 추이를 지켜보겠지만, 해법 모색이 필요하다.

최근 저(?)예산 영화를 작업했던 제작자로서 고충이 느껴진다.(웃음)
그런가? (웃음) <앨리스: 원더랜드에서 온 소년>(2015), <운동회>(2016) 그리고 공개 준비 중인 <아빠는 예쁘다>의 경우 여러 경로로 지원받아 제작한 작품인데 제작비가 1억 원이 안되는 초저예산 영화다. 여유 없는 환경에서 감독들 스스로 너무 잘 만들어 냈다. 다들 국제영화제에 진출했고 수상도 했다.

제작 영화를 선정하는 기준이 있다면.
대부분의 제작자가 그렇듯이 직접 기획해서 작가와 감독을 섭외할 때도 있고, 의뢰를 받는 경우도 있다. 독립영화부터 저예산 영화 그리고 블록버스터까지 다양한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기획 중에 있다.

제작자로서 얻는 재미 혹은 기쁨이라고 할까. 제작자 역할의 매력은 무엇인지.
영화에서 감독과 제작자의 역할은 많은 차이가 있다. 감독이 작품 자체라면 제작자는 작품이 세상에 나오게 하는 배경이라고 할까.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얻는 수익이 크겠지만, 실패할 경우 책임이 크고, 배우나 감독처럼 전면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영화를 탄생시켰다는 보람이 크고, 내가 알아보고 만들었다는 데 뿌듯하다. 내가 제작을 계속하는 이유다.

지금까지 제작한 작품들 모두 소중하겠지만, 유난히 애착가는 작품을 꼽는다면.
내가 제작한 것은 아니고 라인프로듀서로 참여했던 <청연>(연출 윤종찬, 2005)이다. <청연>의 주인공이었던 두 배우, 정진영에 이어 김주혁까지 세상을 떴으니 생각할수록 참 가슴 아픈 영화다. 당시 이상한 소문(기자 주 <청연>은 한국 최초의 여자 조종사였던 ‘박경원’(장진영 분)을 모티브로 한 영화로, 박경원의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됐었음)이 돌기 시작하며 영화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었다.

조한선, 김갑수, 유민이 출연했던 <특별시 사람들>(연출 박철웅, 2007)은 당시 제작사가 공중분해되면서 개봉 못 했었다. 해외에서 수상하는 등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안타깝다.

<마이 파더>(연출 황동혁, 2007)는 연출을 맡았던 황동혁 감독이 이후 잘 돼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황 감독이 그후 <도가니>(2011), <수상한 그녀>(2014), <남한산성>(2017) 등 좋은 작품을 많이 선보이고 있다. 이렇듯 작품으로 인연 맺은 감독이나 배우가 잘 되면 마치 내 일처럼 뿌듯하다.

기억에 남는 배우나 스태프들이 많을 것 같다.
많은 분들이 있다. <특별시 사람들>에 출연했던 배우 중 연극만 계속하다가 단역이지만, 처음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가 있다. 요즘 카리스마 강한 조연으로 활동 중인 배우 진경이다. 또, <앨리스: 원더랜드에서 온 소년>의 정소민도 영화 후 잘 되고 있고. <청연>을 같이 했던 스탭들이 지금 조명, 촬영, 녹음 등 각 분야에서 최고로 우뚝 섰다. 이제는 섭외가 힘들 정도다.(웃음)

흥행하는 영화가 있으면 실패하는 영화도 있는 게 당연하지만, 죄송한데 그간 제작한 영화가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죄송할 것까지야! 비록 나는 잘 안되고 빚도 졌지만, 같이 했던 사람들이 잘 됐으니 그거로 좋다. 다만, 집에서 반대가 심했지.(웃음) 집에서 나보고 하고 싶은 일은 다 했지 않냐고 하는데 정말 미안하다. 일과 가정 그 가운데서 중심을 잡는 게 내 숙제다. 공적으로 교수, 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지만, 생활면에서는 넉넉하지 못했거든. 아이들에게도 미안하고, 항상 보상해준다고 말은 하는데....대기만성과 전화위복, 두 고사성어를 떠올리며 위로하고 믿는 중이다. 앞으로는 영화로 흥행도 좀 해야겠다.(웃음)

지금까지 독립영화를 제작하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프로듀서로서 다양한 관점으로 영화의 특성에 맞게, 즉 작품의 소재와 주제에 따라 독립영화 혹은 상업영화로 제작하여 (영화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었다. 프랑스 유학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감독을 매니지먼트하고 영화를 전반적으로 조율하는 게 프로듀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거였다.

프랑스 유학 얘기 좀.
결혼하고 신혼여행도 안 가고 바로 프랑스로 유학 갔었다. 영화를 하고 싶어서 대학 졸업 후 프로덕션에 입사했는데, 막상 가보니 광고회사더라. 광고를 그만둘 핑계로 1~2년 다녀오려고 계획했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욕심이 생기더라.. 영화 전공이 아니었기에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었거든.. 그러다 보니 5년 걸렸다.

쉽지 않았겠다.
아버지가 자식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불안하셨는지 빨리 돌아오라고 재촉하고, 대부분 유학생이 그렇듯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또, 20대 초반의 어린 학생들과 같이 공부했으니....처음에는 연출을 공부했는데, 회사에서 했던 일을 다시 배우게 돼서 전공을 프로듀싱으로 바꿨다.

유학에 동행한 부인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촬영으로 집을 비울 날이 많았거든. 두 아들을 잘 보살피고 가정을 든든하게 지켜준 아내한테 항상 고맙다.

만약 자녀가 영화일 하는 것을 희망한다면.
굳이 하라고는 안 하겠지만 하고 싶다면 찬성이다. 아이들이 정말 원하는 분야의 일을 했으면 하거든. 큰 애가 어릴 때 아빠가 하는 일을 하겠다고 했는데, 영화인은 집안에 한 사람이면 족하다며 아내가 반대하더라.(웃음) 지금도 기억나는 게 큰 애 초등학교 졸업 앨범에 꿈이 영화감독이라고 써놨던 거다. 제 엄마가 반대하니 대놓고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현재 대학에서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하고 있다.

좋아하는 영화 혹은 감독은.
나를 영화로 이끈 건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연출 배용균, 1989), <파리, 텍사스>(연출 빔 벤더스, 1984)였다. 당시 정말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웃음) 공통으로 무엇인가를 찾아 떠나는 영화를 좋아했었던 것 같다. 요즘엔 인도나 동남아시아 영화를 즐겨 찾아본다. 최근에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버닝>은 평단과 관객의 온도 차가 심했는데, 인상적인 이유는.
그 작품 안으로 들어가 보면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좋다. 오랜만에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을 만난 것 같다. 아마도 그게 (이창동)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영화적, 사회적, 현실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 나중에 감독님을 만나면 내 의문점을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품었던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더라. <버닝>을 본 후 우리나라에서 영화예술가로 존경할만한 분이 나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전에도 이창동 감독과 (그의) 영화들을 좋아했지만, 거기에 더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영화적으로도 더 존경하게 됐다.

마지막 질문! 최근 행복한 일이 있다면.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일이 있었고, 지금도 부산영상위원회 관련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최근 한 지인이 많은 영화인이 나를 위해 힘써주는 모습을 보며 참 잘 살아온 거 같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부끄럽다고 답했지만, 한편으로 내가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씁쓸하면서도 지금까지 내 삶에 감사했고, 앞으로 더 감사하며 잘 살겠다고 다짐했다.


2018년 7월 29일 일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

사진.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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