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악어>를 연출하며 <블랙 미러> 시리즈 세계관 안에서 그만의 독창성을 부여하려 힘쓴 부분, 넷플릭스와 협업하면서 느낀 점, 용기를 잃은 나머지 성인 콘텐츠 주도권을 TV 콘텐츠에 뺏긴 영화계 등을 비롯해 존 힐콧 감독과 나눈 여러 이야기를 전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블랙 미러> 시즌 4 에피소드 <악어>로 서울 드라마어워즈 참석차 내한했다. 첫 방문인데 인상은.
10대 아들이 전 세계 그 어느 곳보다 한국을 가보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한국 팬이라서 어제 가족들과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특히, 경복궁에서 한복입은 많은 여성을 봤고 한복의 아름다움에 깜짝 놀랐다. 또, 남대문 시장에도 갔었는데 정말 활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한복 입은 모습을 사진 찍어 ‘인생샷’으로 SNS상에서 올리며 한복 입는 것이 유행됐다고 들었다. <블랙 미러> 시리즈는 대체로 SNS에 대해 부정적으로 표현해왔기에 SNS가 이런 긍정적인 효과도 일으킬 수 있음이 흥미로웠다. 나중에 <블랙 미러> 총괄 제작자인 찰리 브루커(이하 찰리)가 이 한복 현상을 새롭게 ‘블랙 미러’화해서 제작할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하기도 했다.
TV 영화 단편부문 우수작품상 수상을 축하한다. 소감은.
음, 지금 소감을 작성 중이었는데 살짝 얘기 하자면, 큰 영광이다. 개인적으로 한국 영화의 오랜 팬이다. 한국 영화는 인간이 지닌 내면적 어둠을 신랄하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블랙 미러> 시리즈와 유사하다고 본다.
한국 영화 팬이라니 좋아하는 작품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살인의 추억>을 보고 큰 영감을 받았었다. 주인공 형사가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을 어떻게 다루는지, 그 내면적 갈등과 인간적으로 무너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잘 표현했다. 시간이 흐른 후 사건 현장 근처를 우연히 지나가다가 사건 해결에 힌트를 얻는 엔딩은 정말 천재적이다. 매우 놀랐었다.
오, 아주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블랙 미러>는 시즌 4까지 나온 인기 시리즈다. 시리즈의 틀 안에서 당신의 독창성을 어떤 방식으로 부여했는지.
이번<악어>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찰리는 그간 탄탄한 플롯과 스피디한 전개로 시리즈를 완성해왔다. 그와 협력하는 동시에 영화적 영상미를 추구하려 했다. 주인공과 대등할 정도로 영화 속 풍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와이드 샷으로 자연의 모습을 많이 담았다. 또, 사운드 트랙으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주변에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지만, 캐릭터 자체에는 인간미를 부여하려 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걸 다 담기엔 60분 내외의 시간이 너무 짧았다.
스산한 풍광이 극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더라. 실제 촬영 장소는.
아이슬란드다. 그곳은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고 음습하고 스산한 느낌을 지니고 있는데, 그 힘에 매료됐다. 겨울이었기에 곳곳에 눈이 많아서 어두운 스토리에 대비되는 하얀 설경을 촬영하는데 적합지였다. 촬영할 당시 1930년대 이후 최대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고생 좀 했다.(웃음)
이번 시즌 4는 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됐다. 보통 넷플릭스는 시즌이 한 번에 공개되는데, 사전에 다른 작품 관련 정보를 알고 있었나. 아니면 넷플릭스 이용자와 같이 시즌이 공개된 후에야 확인할 수 있었는지.
찰리가 제안할 당시 다른 에피소드를 누가 연출하는지 몰랐었고, 궁금하지 않았기에 문의하지도 않았었다. 후에 다른 감독과 그들의 연출작에 관해 대략적으로 알게 됐다.
넷플릭스의 경우 연출자에게 재량권을 전폭적으로 부여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 협업해 보니 어떻든가.
정말 그랬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찰리와의 협업이 긍정적 체험이었던 게 창의적 지원을 하되 방해가 없었다.(웃음) 총괄 제작자인 찰리와 각본을 맡은 애나벨이 구체적이고 심플하게 요구 사항을 전달해줘서 매우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그간 새로운 영화를 출시할 때, 가령 <더 로드>(2009)의 경우 쓰라린 아픔이 있었다, 어려움이 많았었다. 그런데, <블랙 미러>의 경우는 이미 확보된 팬덤이 있고, 그들에게 바로 공개할 수 있다는 점이 신선했다.
넷플릭스가 TV 시리즈는 물론 오리지널 영화제작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 당신을 포함한 네임드 감독을 영입하여 기존 시리즈의 새로운 에피소드를 제작하고 있는데, TV와 스크린 사이의 벽이 낮아졌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수많은 감독이 TV 콘텐츠에 투자할 거로 본다. 기술의 발전으로 TV 시리즈도 영화적 영상이 가능해졌다. 이번에 <악어>를 작업하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방대한 콘텐츠를 수많은 플랫폼이 쓰나미처럼 쏟아내는 요즘 추세에서 중요한 것은 양보다 질을 높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같은 트렌는 HBO(Home Box Office, 미국의 대표적인 케이블 유료 영화 채널)가 성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콘텐츠를 제작하면서 시작했다고 본다.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게 넷플릭스다. <블랙 미러>도 성인 콘텐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관건은 어두운 콘텐츠를 두려움 없이 만들 수 있느냐인데, 영화의 경우 프랜차이즈물에 집중하고 성인 대상 콘텐츠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 산업이 조심스러워졌다고 볼 수 있는데, 용기를 잃으면서 성인 관객도 같이 잃지 않았나 싶다. 아, 한국 영화는 제외다.
왜?
한국은 아티스틱(artistic)한 측면에서 용감한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다. 특히 한국화한 공포와 호러 같은 장르물이 그렇다. 한국과는 다르게 할리우드는 사업성을 우선에 놓는 경향이 있다. 어떤 문화가 생성된 후 그것에서 나오는 스토리에 감동하고 그 결과 흥행에 성공하여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런 문화를 놓치고 있다. 대본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마케팅에 대해 논의하는 게 현실이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다. 모든 에너지를 훌륭한 대본 완성에 쏟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안타깝다.
당신이 연출한 세 번째 에피소드인 <악어>에 대해 얘기해 보자. 주요 소재가 기억을 읽어내는 ‘리콜러’라는 기계다. 냄새와 소리로 기억을 촉진한다는 설정이 특이한데, 시나리오를 읽은 후 어떤 생각이 들던가.
찰리와 논의를 가장 많이 한 부분이다. 시나리오를 본 후, 나는 리서치를 사랑하는 감독이기에(웃음), 기억과 관련된 여러 이론을 찾아봤었다. 기억이란 것은 아주 복잡한 메카니즘을 지닌 것으로 주관적 성향에 많이 좌우된다. 어떻게 보면 정확한, 유일한 기억이란 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오감을 통해 자극을 받는 거로 표현해 봤다. <블랙 미러>의 다른 에피소드 중 비슷한 소재가 있는데 그 경우는 눈이 카메라로 돼 있어서 사진 찍듯 기억을 떠올린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좀 더 주관적이고 유기적이다. 기억신은 인상적인 질감을 주기 위해 특별히 필름으로 촬영했다.
기억신이 필름 촬영이었군!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좀 더 심도있게 표현하고 싶었다. 작은 모니터 영상으로 기억이 재현되는 게 아니라 풀스크린으로 표현하고 싶었는데... 아쉬운 점이다. 다음 기회에 시도해보려 한다.
극 중 시간과 공간적 배경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리콜러’라는 기계가 존재하는 거로 보아 현재보다 과학 기술이 발달한 근미래라고 추측되는데.... 시·공간적 배경을 언제 어디로 설정한 것인가.
에피소드내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인지 명시된 경우가 간혹 있지만, 사실 <블랙 미러> 시리즈는 그 안에서 구체적 시간과 공간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략 근미래 어딘가로 유추하게끔 한다. 우리끼리 작업하며 대영제국 식민지 중 하나였던 스코틀랜드 같은 곳이 아닐까 혹은 지구 온난화가 심해진 런던 외곽 어딘가인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했었다. 찰리와 논의했던 점이 미래에 기술이 발전하고 그로 인해 생활 전반에 걸쳐 변화가 생기겠지만, 모든 것이 동일한 속도로 변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였다. 건축과 의상 등 기술 발전에 따른 변화의 속도를 차별화하려 했다. 아까 ‘리콜러’에 대해 가장 많이 논의했다고 했는데, 그다음으로 많이 논의한 것은 무엇 같은가?
글쎄....
훗, 바로 자동운전되는 피자 배달 벤이었다. 무인 운전을 어떻게 표현할지, 사건과 어떻게 엮을지 많이 고민했다. 왜냐하면 미래에도 배달 음식은 있을 것이고 보험과 세금은 여전히 내야 할 것 아닌가! (웃음)
수긍된다. (웃음) 기니피그를 비추는 엔딩이 의미심장하던데, 혹시 동물의 기억도 볼 수 있는 건가.
당연하다. 단 기니피그의 기억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의 수명보다 훨씬 짧으니 아마도 빨리 기억을 추출해야겠지!
극 중 ‘악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음에도 타이틀이 <악어>이다. 이유는.
좋은 질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본을 쓴 찰리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다. 수개월 (그에게) 알아내려고 노력했지만, 얘기 안 해주더라. 아마도 비유적 표현이고 시청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둔 거로 본다. 내 개인적 해석은 스토리와 플롯이 점점 쪼여 오는 게, 마치 입을 벌린 악어가 점점 입을 다물며 먹이를 죄이는 것을 연상시키는 게 아닐까 한다. 또, 보호 본능이 발동한 인간, 즉 가정과 사회적 지위를 지키고자 냉혈인간이 된 주인공을 상징하는 걸 수도 있다. 아, 그리고 자세히 보면 주인공의 집에 악어 인형이 있다.
데뷔작 <프로퍼지션>(2005) 이후 <더 로드>(2009), <로우리스: 나쁜 영웅들>(2012), <트리플 9>(2016) 로 관객을 찾았다. 감독 데뷔 이전의 이력이 개인적으로 궁금하다.(웃음)
10대 때는 미술을 전공했고, 이후 멜버른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당시 뮤직비디오 산업이 새롭게 떠오르며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활동했었는데, 내가 가장 잘한 분야는 편집이었다. 이후 미술 공부했던 게 실사 영상 작업에 도움이 됐고, 뮤직비디오 촬영 경험이 영화로 이어졌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었는데, 각자 분야가 교차하며 이후 새로운 분야 활동에 도움받았다. 이번 <악어>로 TV 콘텐츠를 접할 수 있게 돼 매우 흥미로웠다. 앞으로 다큐멘터리를 포함해 여러 분야를 밸런싱하려고 한다. 아, 90년대 런던에서 잠시 아시아 갱스터 영화 대본을 쓴 적도 있다.(웃음)
최근 관심사는. 혹시 꽂힌 이야기가 있다면.
음, 책 읽고 음악 감상하는 걸 좋아한다. 오디오북을 많이 듣고 있다.
마지막 질문! 최근 행복했던 순간이나 인상적인 기억이 있다면.
영화일의 특성상 일과 가정 사이 균형을 맞추는 게 어려운데, 10대 아들을 포함해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어제 경복궁에 가서 한복 입은 여성들을 본 건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아들에게 새로운 문화를 보여주며 많은 것을 알려주려 했는데, 오히려 내가 아들에게 많이 배운 것 같다.
2018년 9월 4일 화요일 | 박은영 기자(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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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_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