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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강점은 인내심 <출국> 이범수
2018년 11월 14일 수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인천상륙작전>을 선보이던 때나 <출국>을 공개한 지금이나, 이범수의 인터뷰는 한결같은 데가 있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강하다는 세간의 평가에 관해 이야기했던 <인천상륙작전> 인터뷰 당시 그는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의연하게 답했다. <출국>이 안고 있는 정치적 논란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지만, 이번에도 흥행 면에서는 쉽지 않아 보인다는 기자의 언급에 대해서는 자신 역시 그럴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영화가 관객몰이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혹독한 비난에 시달리든 그렇지 않든, 그는 자기만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90년부터 10년 가까운 조연과 단역 생활을 거쳤고, 주연으로 우뚝 서 20년에 달하는 시간을 보내온 단단한 경력이 배우 이범수의 뿌리를 공고하게 붙잡아주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그는 ‘인내심’이라고 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일희일비하지 않는 힘 말이다.

<출국> 언론시사회 때, 이 영화를 두고 <슈퍼스터 감사용>(2004)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내 바로 앞 차례에서 마이크를 잡은 노규엽 감독이 이야기를 길게 풀어놓는 걸 보니 (화이트리스트 논란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걸 알겠더라. 그 바로 다음 순서로 마이크를 건네받았는데, 그 감정을 딱 자르고 그저 영화 잘 봐주세요, 이상입니다. 하고 끊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감독의 마음을 이어 받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온 얘기다.

그 자리에 없던 독자를 위해 조금 더 풀어 설명해준다면.
<슈퍼스타 감사용>은 울림이 있는 좋은 영화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개봉 당시 기대했던 흥행 성적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추석 명절에 맞춰 개봉했는데 경쟁작이 차승원 주연의 <귀신이 산다>(2004)였다. 영화의 중요한 목적 하나가 오락성을 충족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당연히 볼거리와 재미를 위해 <귀신이 산다>를 선택했을 것이다. 내 삶 역시 배우일 때보다 관객일 때가 훨씬 많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하는 일이다. 극장에 뭐 교육받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웃음)

영화는 오락성이 중요하다는 말, 맞다.
어쨌거나 그렇게 시간이 몇 년 지나고 명절에 TV 특선 영화로 <슈퍼스타 감사용>을 방영해줬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인들이 그 영화 참 괜찮다는 말을 건네 주더라. 물론 개봉 당시에는 표를 사서 극장에 오고 싶다는 누군가의 구매욕을 충분히 불러일으키지 못했지만, 분명 영화 자체는 좋은 영화였다. <출국>도 비슷하다고 느낀다. 관객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좋은 영화일 수 있다는 소신이 있다.


<슈퍼스타 감사용>이 좋은 영화라는 데 충분히 동의한다. 하지만 당신 말대로 흥행 성적은 기대 이하였다. <출국>을 그에 비유한 건, 비슷한 결과를 예상하기 때문인가.
배우도 어느 배급사를 통해 배급되느냐에 따라 영화가 확보할 수 있는 스크린 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안다. 스크린 수가 10개인 것과 1,000개인 것은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배급에 관한 문제를 전부 부연설명 할 수는 없으니 결국은 스코어 게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안 좋은 영화인지를 스코어로만 따질 수는 없지 않겠나.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영화란 뭔가.
예를 들면, <빌리 엘리어트>(2000)라는 영화를 좋아한다. 시골 탄광에서 자란 소년이 대단한 발레리노로 성장하는 영화다. 가족의 화합이라는 소재도 녹아 있다. 이 영화 역시 개봉 당시 흥행 참패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당시 상황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하지만 나로서는 저런 영화에 한번 참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어떤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세상은 그래도 의미 있는 곳이고 살아갈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돌이켜볼 수 있다면, 그게 좋은 영화 아닐까. 돈 벌고 박수받는 것도 좋지만, 관객의 마음에 울림을 줄 수 없다면 더는 영화를 하는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공교롭게도 <출국>은 전 정부의 부당한 제작 지원을 받았다는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논란에 오르기도 했다.
(한참 망설이다가) 제작사가 안타깝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건 촬영을 다 마치고 후반 작업을 하던 때 알게 됐다. 깜짝 놀랐다. 하지만 언론매체에서 정정 기사를 내보냈다고 했고, 그렇게 흘러가는가 보다 생각했다. 물론 누구든 부당하게 이득을 보거나 피해를 보는 일이 있다면 당연히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배우로서 시나리오에 근거해서 작품에 접근했을 뿐이다.

영화를 선택하게 된 계기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주인공 ‘오영민’은 80년대 독일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한 학자인 동시에, 아내와 두 딸과 함께하는 아버지 역이다. 나 역시 두 아이를 둔 40대 후반의 아빠이다 보니 ‘오영민’에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내가 초,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80년대가 영화적 배경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 아버지 세대도 떠올려보게 됐다. 그때는 부모님 말씀을 무조건 잘 따라야만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이 다 옳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나약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강인함을 지키신 게 아닌가 싶다. ‘오영민’의 삶도 그렇다.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를 손가락질하거나 비웃기보다는 오히려 다독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영민’은 자기 학문을 인정해준다는 북한으로 갔다가 약속과는 다른 현실을 깨닫고 탈출을 감행한다. 그 과정에서 아내와 막내딸을 북한 세력에 빼앗긴다.
아마 공부는 열심히 했겠지만 사회성이 부족해 동서남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꽉 막힌 아버지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가족을 가장 우선시하는 인물이라는 건 분명하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이 인물의 그런 특징 때문에 가슴이 먹먹했다. 화려한 볼거리를 보여주는 블록버스터에도 물론 참여해봤고 그런 영화들의 강점도 잘 알지만, <출국>은 배우의 연기력과 감정선으로 작품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폴란드 현지 촬영을 진행했다.
그래서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 했다. 현장이라는 게 변수의 연속 아닌가. 차량이 고장 나든, 배우가 아프든, 소품 문제가 생기든 수많은 경우로 일정이 유동적인 상황이 된다. 한 회 한 회가 다 돈과 연관돼 있으니 시간과 비용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상황에서 연출자의 리더십이 발휘되는 게 아닌가 싶다. 구성원도 일사분란하게 조화를 이뤄줬다. 애틋하고 기쁜 추억이다.

당신이 촬영 현장에서 가장 선배였을 것 같은데.
노규엽 감독은 물론 제작사, 촬영팀, 조명팀까지 모두 신인이었다. 상대적으로 내가 연륜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젊은 패기로 도전하는 그들 팀에게 힘이 돼 주려고 무척 응원했던 기억이 난다. 시사회에서 완성본을 보고 나서는 특히 안도할 수 있었다. 어떤 명감독이 만든 영화도 트집을 잡으려 들면 얼마든 그럴 수 있겠지만, 좌충우돌하는 신인 감독과 제작진이 이 정도 결과물을 내놓았다면 안정감 있는 편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들과 함께한 걸 후회하지는 않겠다.
당연하다. 노규엽 감독의 차기작이 뭔지는 모르지만 제안을 준다면 또 같이 일하고 싶은 감독이다. 물론… 내가 <출국>에 출연하지 않았다고 해도 배우 인생이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출국>이 2천만 관객쯤 동원한다고 해도 배우 인생에 엄청난 변화가 생기지도 않을 것 같다. 시나리오가 조금 더 들어오는 것 말고 더 있겠나. 어찌됐든 나는 그저 영화인으로서 뚜벅뚜벅 걸어가려 할 뿐이다.

<

세간의 말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미로 들린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 한다는 뜻이다. 시간이 지나 보면, 당시에는 죽을 것처럼 느껴지던 문제도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게 태반이더라. 그걸 가지고 왜 그렇게 지지고 볶고 죽네 사네 했을까 싶다.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한다. 햇살이 비춰도 가고, 비가 와도 간다. 자유롭게 갈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인터뷰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거로 기억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면의 어떤 단단함 같은 게 느껴진다.
내 강점은 인내심이다. 일자리가 없던 무명 때는 한 달에 10만 원씩 벌어서 몇 년을 살았다. 하고 싶은 일 한 개를 하려고 하기 싫은 예닐곱 개를 해야 했으니까. 그럴 때마다 4년제 대학을 나온 나에게 케이블 TV에서 기획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등의 여러 제안이 들어왔다. 하지만 배가 고파도 배우가 하고 싶었다. 좌고우면하거나 요동치지 않았다. 선천적인 기질일 수도 있지만, 일관적으로 살았다.

어쨌든 스타가 됐다. 그 인내를 보상받은 셈이다.
스타를 꿈꾸지는 않았다. 모두가 이름을 남길 수는 없지 않은가.(웃음) 그저 배우가 돼서 내 나이에 맞는 보수를 받고, 경제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제 역할을 하며 살아갈 정도만 되길 바랐다. 그 바람보다 과분하게 많이 온 것 같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아이들이 엄청난 개구장이로 커 가고 있다. 갈수록 더 사랑스럽다. 아이들과 말하고, 정이 쌓이고, 이제는 ‘작당’같은 것도 할 수 있다. 무척 소중한 시간이다.(웃음) 지난 주에는 붕어빵을 만들어줬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요일이 늘 기대된다.


2018년 11월 14일 수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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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D.s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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