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검색
검색
아름다운 공허와 외로움이 닮았다 <레토> 유태오
2019년 1월 2일 수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구소련 80년대 개혁 개방 자유의 아이콘이었던 고려인 출신 락커 '빅토르 최'의 젊은 시절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파릇하고 예민한 청춘인 갓 20세를 넘긴 그를 연기한 건 독일을 주 무대로 활약 중인 배우 유태오다.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아름다운 공허와 외로움을 진하게 공유한다고 말하는 유태오는 그렇기에 ‘빅토르 최’에 자신 만한 적역은 없을 거라 확신한다. ‘빅토르 최’가 음악으로 뼛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우울함과 감수성을 노래했다면, 유태오는 연기로 그 감정을 승화했을 것이다.

<레토>를 연출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평소 반체제 인사로 알려진 인물로 영화 촬영 도중 횡령 혐의로 연행됐다. 이런 역경을 딛고 완성된 <레토>는 2018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전 세계 팬들의 마음을 울렸다. 귀에 친숙한 7080년대 서구 락 음악의 활용과 극 중 해설자의 등장 등 참신한 방식을 과감하게 시도한 <레토>. 실험적이나 난해하지 않게 멜랑꼴리한 감성의 세계로 관객을 인도한다.


<레토>에서 갓 20대에 접어든 청년 ‘빅토르 최’로, 청춘의 방황과 불안과 열정을 훌륭히 묘사했다. 81년생으로서 20대 감성 표현과 러시아어 연기 등 여러모로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 같다.
나이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살이 찌고 빠지고 혹은 헤어와 메이크업을 하고 안 하고에 따라 이미지의 변화가 큰 편이다. 당시 ‘빅토르 최’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감독님이 어련히 알아서 캐스팅했을 거로 생각했다. 다만 그가 날씬한 스타일이기에 감독님께서 살을 좀 빼길 원하셨고, 그에 맞춰 감량하니 나중에는 얼굴 상하니 그만 빼라고 하시더라. 그리고 제스처와 포스처를 다각적으로 연구했다. 러시아어는 흠….

‘빅토르 최’의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한국 출신으로 유럽에서 자란 퍼포먼서는 그 분야가 연기든 음악이든 나와 ‘빅토르 최’밖에 없는 것 같다. 물론 그는 고려인 후손으로 한국 태생은 아니지만 말이다. 우린 이방인의 감수성을 공유한다고 본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데, 유럽 어느 일요일 아침 교회 종소리 들으며 빵을 사러 길을 걷는 그 순간에 엄습하는 아름다운 공허감이 있다. 부정적인 감정에서 오는 공허와 외로움이 아니라 근원적인 외로움이라고 할까.

보통 ‘빅토르 최’하면 개방 전 소련에서 활동한 변화와 반항과 자유를 대변한 락커로서 상징성이 있지만, 우리 영화는 좀 더 젊은 멜랑꼴리한 그의 청춘을 조명한다. 젊은 ‘빅토르 최’가 쓴 시적인 가사를 연구하며 그의 감정에 다가가려 했다.

영화를 본 소감은. 자막과 더빙 버전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 있겠다.
맞다. 칸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봤고 그 후 모스크바에서 또 봤다. 그리고 독일 말로 더빙된 버전을 봤는데 정말 느낌이 달랐다. 영화를 촬영할 때 번역본이 있긴 했는데 그리 정확하지 않았고, 현장에서 프리하게 애드립을 많이 치니 알아듣는 척(?)하고 받아쳐야 했었다. 감을 잡는다고 잡았지만, 사실 불안하고 긴장했었다. 정확히 그 의미를 모르기도 했었고. 독일어로 더빙한 버전을 보고 처음으로 ‘생각보다 괜찮게 연기했네’라고 느꼈다.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아들으면서 섬세하게 보니 나름 연기에 자부심이 들었다.

한국어를 잘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능숙하다. 공부를 정말 많이 했나 보다. (웃음)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 이전에는 솔직히 수준이 너무 낮았다.(웃음) 처음으로 오디션을 본 한국 영화가 <고지전> (2011)이었다. 당시 A4 용지 한 장 반 분량을 5일 이내 외워야 했는데 한 번 읽는 데만 3일이 걸렸었다. 한 10년 정도 배우니 한국어가 어느 정도 편해지더라. 이젠 10분 정도면 읽고 하룻밤 내에 외울 수 있게 됐다. 아직 눈은 느리지만 소화하고 외우는 데 문제없는 수준까지 왔다.

극 중 당신의 러시아어가 아주 훌륭하게 들리더라. 좀 전에 말을 하다 말았는데 러시아 대사를 준비한 과정이 혹독했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외국에서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작업하다 보니 한국말이 더 편해졌다. 뇌가 자연스럽게 돌아간다고 할까. 러시아 촬영 이후 한국 드라마 <아스날 연대기>와 <배가본드>를 촬영했는데 액션 합을 맞추는 게 예전보다 수월했다. 마치 이전이 대나무였다면 이젠 벼가 된 느낌?

<레토> 들어가기 전에 더빙이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막상 도착하니 모두 러시아어로 연기해야 한다는 거다! 그때부터 고통의 시간이 시작됐다. (읏음) 일단 시나리오를 외우는 게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했나 싶다. 3주 안에 해결해야 했기에 문장과 단어를 소리로 쪼개서 연습했다. 무슨 소리와 의미인지 모르니까 육체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시간표를 짜서, 최소 5시간 자고 나머지 19시간 연습했었다. 한 소리를 100번 정도 반복해서 입에 붙으면 다음 소리로 넘어가는 식이었다. 러시아어 코치와 제스처, 포스처 코치가 다 따로 전문, 세분돼 있어 코칭 받고 배우들과 리허설하고 혼자 음악 듣고 대사를 연습했다. 촬영 내내 혼자만의 세계에 있었던 것 같다. 솔직히 힘들었다.

그렇게 힘들 게 촬영한 <레토>가 지난 2018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분에 초청이라는 쾌거를 거뒀다. 고생한 보람이 있겠다.
상 받고 흥행에 성공하면 당연히 기쁘지만, 평소 그것을 목표로 혹은 어떤 수상을 기대하고 일하지 않는다. 나는 페이를 받고 일하는 사람이다. 크리에이티브는 감독이고, 연기자는 예술가 이전에 기술자 혹은 단순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그간 베트남과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찍은 영화가 수상하는 등 좋은 결과를 거뒀지만, 흥행이 좋지 않았다. 한국에서 역시 그런 영화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개인적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지만 그게 꼭 흥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었다.

<레토>가 그간 했던 작업 중에도 힘들었던 것은 맞다. 이후 참여한 영화인 <버티고>의 경우 비교적 편했다. 이렇게 편해도 되는지 죄책감 혹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내가 편해지면 의심이 드는 성격으로 혹 자기 발전을 게을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 검열이 강한 편이다.(웃음)

칸에 다녀온 후 변화가 있던가.
일상이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운동과 스피치를 11월까지 연습했고 이후 새 작품에 들어갔다. (좀 전에 말했듯) 전계수 감독의 영화 <버티고>는 촬영 완료했고, 좀 전에 말한 드라마 두 개는 현재 촬영 중이다.

<레토>를 보면 흑백 영상 속에 뮤직비디오 같이 7080년 대 유행했던 락을 비롯한 서구권 음악이 다수 등장해 복고적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또, 가이드가 등장해서 영화를 해설해주는 등 형식적으로도 참신한 면이 많더라.
아, 그 이야기를 하자면 연극 얘기를 좀 해야 한다. 19세기 말 무렵 안톤 체호프의 유명한 희곡 <갈매기>, <세자매> 등을 무대에 올리며 스타니슬랍스키가 처음으로 배우가 관객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시도했었다. 러시아가 정통적으로 연극에 강한 면이 있다. 연극에 보통 ‘제4의 벽’이라고 불리는 관객과 무대 사이의 거리가 있는데, 그걸 부순 역할을 하는 것이 극 중 관찰자(스펙터)다. 이를 셰익스피어가 잘 활용했는데, 그의 연극을 보면 시작하기 전 해설자가 나와서 설명을 하곤 한다. 그런 형식을 접목했다고 본다.

자세히 보면 스펙터가 처음 등장해서 하는 말이 “그다지 ‘빅토르 최’ 같지 않네” 다. 관객, 특히 러시아 사람들이 보고 비난할 것 같으니 미리 선수치는 거지. 사실 영화를 보고 비평한 권리는 관객에게 있는데 그 권위를 빼앗는 동시에 코믹과 유머를 불어넣는다고 할까.

실험적인 시도가 많은데, 시나리오상에 다 표현돼 있던 건가.
대부분은 책(시나리오)에 나와 있었다. 초현실적인 장면 즉 해변가 신의 경우 시나리오에 단순히 해변에 사이코킬러가 나온다고만 표현됐었다. 책을 읽으면서 참 궁금했던 장면인데, 현장에 가보니 파악되더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던 전작 <스튜던드>(2016)를 비롯해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님이 워낙 창의성이 뛰어나다. 현장에 가면서 한편으론 불안했던 게 또 뭐가 있을지 몰라서…(웃음) 배우뿐만 아니라 스태프 모두에게 유연성이 필요했다. 완벽하게 세팅하고 시작하는 감독님도 있지만, 그는 같이 알아가자는 주의다. 관객이 <레토>를 어떻게 봤을지 궁금하다. 솔직히 어떻게 봤나?

매우 흥미롭게 봤다. 실험적인 시도를 했지만, 난해하지 않고, 멜랑꼴리한 청춘의 초상이 아련함을 안기더라. <레토>에 귀에 익숙한 음악이 다수 등장하지만, 사실 ‘빅토르 최’의 음악과 구소련 시대상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관객에게 소구할 지점을 꼽는다면. 최근 개봉한 <보헤미안 랩소디> 가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데….
<레토>가 지닌 다른 음악 영화와의 차별성에 대해 자주 질문받았다. 우리 영화가 지닌 감수성과 새로운 시도를 단어화, 즉 어떤 키워드를 붙여줘야 할 것 같은데….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 <라라랜드>(2016)는 뮤지컬 시대의 노스텔지어,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룹 퀸의 전성기를, <원스>(2006)은 (배낭) 여행을 떠올린다고 본다. 그런데 <레토>는 뮤직비디오도 아니고, 그렇다고 ‘빅토르 최’의 전기 영화도 아니다. 가볍지도 모던하지도 않고 흑백이지만 무겁지도 않다. 하나의 키워드를 찾기 힘들다. 평소 객관화를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잘 안 된다. 해석과 평가는 관객의 몫인 것 같다. (웃음)

다만 백인주의 영화 안에서 한국사람(고려인)이 주인공인데 극 중 그 점이 한 번도 이슈가 되지 않는다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극 중 인물 모두가 모습이 달라도 ‘그’(빅토를 최)를 오로지 재능만을 보고 평가하고 사람 자체로 받아들인다. 그 점이 흥미로웠다.

<레토> 이후 영화와 드라마 등 다수의 한국 작품에 참여 혹은 계획 중이다. 앞으로 한국 활동에 주력하는 건가. 또, 배우로서 지향점은.
그렇진 않다. 재미있는 걸 하고 싶다. 여기서 재미있다는 건 관객으로서 배우로서 이제까지 못 봤던 것, 안 해본 역할을 의미한다. 작품 전체적으로 혹은 차별화된 캐릭터를 만들고 싶다. 그런 기준에서 선택한 작품이 한국 작품일 뿐으로 국가에 따라 선택한 건 아니다. 요즘 한국 작품이 소재와 주제 면에서 흥미롭고 다양해졌지 않나. 앞으로 다문화적인 작품 역시 하고 싶고, 지금까지 없었던 배우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다.

K-pop을 위주로 한 한국 문화 콘텐츠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한류가 글로벌 활동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넷플릭스나 아마존 등 콘텐츠 배급 환경 등의 변화에 힘입어 K-콘텐츠가 전 세계로 퍼져가고 있고, 이런 기술적 문화적 환경 변화가 내게 기회인 것은 확실하다. 또, 외국에서 가만히 기다린 게 아니라 한국적인 나를 찾았던 그간의 집요한 노력이 만나 지금의 결실을 이루지 않았나 한다.

처음 배우 활동하며 많이 힘들었다. 교포 친구들은 내게 왜 미국 가서 활동하지 않냐고 자주 묻곤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있었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영화를 좋아하게 된 첫 단추가 90년대 후반 방학 기간 한국에 들어왔을 때 비디오방에서 빌려 봤던 영화들 덕분이었다. 당시 <접속>(1997), <약속>(1998),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을 정말 좋아했거든. 독일에 살며 내가 느꼈던 외로움과 공허함을 달래 줄 영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거다. 그게 숨기고 혹은 모르고 살았던 내 안의 감수성을 깨웠고, 한국에서 내 한국적 정체성을 찾고 싶었다. 이후 배우로 활동하며 한국어의 벽을 만났고, 깼고, 지금까지 왔다. 고생하더라도 언어를 뛰어넘어 한국적인 정체성을 갖게 된다면 어떤 교포 배우보다 영역을 확장할 수 있을 거로 항상 생각해왔다.

마지막 질문! 최근 행복한 일은 있다면. 혹은 당신을 웃게 만드는 것은.
어떤 질문인지 알겠지만, 행복이라는 감정을 믿지 않는다.(웃음) 존재하지 않는 걸 어떻게 증명할까. 다만 기쁘고 화나고 고생하고 그 과정을 즐기는 게 좋다. 힘든 시간도 좋은 시간도 각각 즐기며 그 밸런스를 찾으려 한다. 요즘엔 일이 갑자기 밀어닥쳐서 정신없이 보냈기에, 앞으로 하고 싶은 것과 지향점에 대해 페이스와 기준을 수정 보완하려 한다. 그리고 또 열심히 해야겠지!


2019년 1월 2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

사진제공. 씨제스

0 )
1

 

1

 

1일동안 이 창을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