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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본질)로의 회귀 그리고 시선의 확장을 경험한다. 열대병
andrew1130 2008-01-01 오전 4:04:33 1324   [2]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은 아니었다. 그럼 대체 인간이란 뭐란 말인가? 인간을 정의하는 데, 철학적, 생물학적 사고들이 동원되었다. ‘생각하는 동물, 직립보행의 포유류 등등’ 원숭이가 인간의 조상이라면 원숭이의 조상은 누군가? 더욱 몇 백만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다 속에 사는 단세포 아닌가? 그러면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가 아니다. 최초의 생명체 세포 한 덩어리다. 즉 이 세포 한 덩어리가 오늘날 인간의 조상이요. 또한 인간을 근본적으로 구성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그렇게 따지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의 조상은 단세포이므로, 인간이나 인간 외 생물이나 같은 혈육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이 세계와 역사를 의식적으로 분류한 편의지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이씨집안, 김씨집안, 최씨집안 할 것 없이, 서양인, 아프리카인, 인디언, 동양인 할 것 없이 다 같은 혈육이다. 이 세계에서 그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우리는 하나다. 그런데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며, 이 생각이라는 게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단세포에게도 생각이 있었을지 모른다) 인간의 힘의 근원이 되었고, 소위 인간끼리 지껄이길 세상을 지배하도록 만들어주었다 한다. 생각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으로 생각이 없고, 본능만 존재하는 여타 생물들은 찌그러져 있어야 한다는 논린데, 개라고 원숭이라고 살아있는데, 영혼이 없고 생각이 없겠는가? 이런 반발심이 든다. 인간의 의식은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사고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인간을 위한 사고가 아닌 인간이 인간을 조종하고 스스로를 가두는 결과를 낳는다. 사고가 많아지고, 발전하고, 만들어내고 하면서, 자연을 벗어나 문명을 이룩한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어느새 자연의 일부였던 인간은 자연을 배척하고 파괴한다. 따라서 사고도 자연의 본능과 본질에서 벗어나 먼 길을 돌아 돌아 문명과 인간 중심의 사고로 협소해진다. 인간의 활동영역과 사고의 스펙트럼은 갈수록 협소해지고 편협해진다. 고층 빌딩의 건설,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개발, 새로운 정치사상의 효용성 등등 인간은 자기들만의 사회를 이루고 발전이라는 단어를 친구 삼아 새로운 욕망과 사고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을 자신들의 스펙트럼 하에 두려한다. 하지만 첨단을 달리는 과학문명과 지식, 철학에 대해 새롭다는 인식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계라는 거대한 스펙트럼의 일부에 불과하고 거대한 스펙트럼은 하나의 원형질에 기초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수많은 의식들은 본질에 무엇을 첨가하고 어떻게 꼬임수를 두어 새롭게 보일뿐이다. 인간 이성의 발전이 해낸 일은 세상을 이성과 비이성, 이성과 본능, 이성과 광기, 육체와 영혼, 살아있음과 죽음, 인간계와 귀신계 등으로 의식적으로 재단한 것이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이러한 구분은 모호했다고 한다. 구분 짓지 않고 공존했다고 한다. 태국의 영화 중에 <낭낙>이라는 영화가 있다. 전쟁터로 떠난 남편이 고향으로 돌아와 부인과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이 부인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죽음에 대한 한으로 이승을 떠나지 못한 귀신이다. TV에서 방영되던  전설의 고향처럼 이 귀신은 자신의 죽음에서 이득을 취하고, 자신과 남편의 행복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처단한다. 현실계와 영혼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인 것이다. <열대병>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열대우림을 세상 만물과 시공간이 혼재하고 공존하는 원형질의 세계로 설정하고 그 안에서 인간이 착각에서 빠져나와 더 넓은 실세계와 마주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전작 <친애하는 당신>, <정오의 낯선 물체>를 보면 인간이 미리 그어놓은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더 멀리 나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이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아핏차퐁의 욕망이 <열대병>에서 더욱 극대화된 느낌이다. 영화의 시작, 산림 순찰대 소속의 군인(왜 그 많은 군인 중에 산림순찰대인가? 이들은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열대우림의 야생과 대칭점에 있는 집단이다)들이 발견된 사람의 시체를 앞에 두고 기념이라며 사진을 찍는다. 이 행동은 이상하다. 보통 사람이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면 누가 죽였는지, 자살인지 수사하고 분위기는 무겁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군인들은 무슨 동물이라도 포획한 마냥 즐겁다. 사냥감을 메고 가듯이 죽은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간다. 반면 이 영화의 주인공이 켕은 같은 군인이지만, 이런 행위에 동참하지 않고 묵묵히 시체를 나무에 매단다. 그리고 무전기를 통해 여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산불처럼 화끈하게’라는 말을 한다. 야생의 자연에 대한 이들의 의식을 알 수 있다. 이 장면은 앞으로 전개될 영화의 방향과 주제의식을 함축한 상징이다. 산에서 발견된 이 인간의 시체는 생명이 없고, 인간이 모여 사는 도시문명과 동떨어져 있기에 더 이상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군인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군인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은 감독이 바라보는 세상과 반대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인간이 이루어낸 문명과 의식의 수호자로 인간들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인간 이외의 야생에서 인간을 보호하고 때로는 야생을 탄압한다. 야생성으로 퇴행하려는 인간을 조련해 다시 인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같은 군인인 켕은 이들과 행동에 동참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의 눈이 감독의 눈이요, 감독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켕은 이성애자였지만 남자인 통을 사랑한다. 통도 그 사랑을 받아들인다. 이성애자를 정상으로 보고 동성애자를 비정상으로 바라보는 사회에서 동성애자는 소수의 약자이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기 힘들다. 아핏차퐁 또한 동성애자다. 그런 그의 성정체성이 그의 영화의 시발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동성애자는 인간의 이성에서 판단했을 때, 하찮고 지저분하며 때로는 두렵기도 한 야생인 것이다. 하루의 시간의 절반이 낮이고 절반이 밤이라고 한다면 동성애자는 밤과 같은 미지의 존재인 것이다. 신분은 군인이지만 성정체성은 군인의 역할과 모순되는 켕에게 그 시체를 거둬들이는 일은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영화에서 음악은 2번 등장한다. 이 장면의 다음 장면인 통으로 보이는 벌거숭이 인간이 산속을 걷는 장면과 켕이 통과 서로의 손을 핥아주는 동물적 사랑행위(인간의 이성과 관습에서 판단했을 때) 후 오토바이를 타고 도심의 야경을 달릴 때이다. 어느 인디밴드의 ‘straight'라는 곳의 처음과 중간을 각각 삽입했다는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많지도 않은 음악이 왜 이 두 장면에 삽입되었는지 생각을 해보니 영화 전반부의 시작과  끝을 알리고, 인간의 야생성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보여주고 싶은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군인들이 사라지고 난 후의 수풀을 보여주다가 느닷없이 트랙인하며 음악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트랙인은 통이 얼음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바라보는 시점샷으로 호수를 향해 비상하기 날개짓을 시작하는 백조인형을 잡은 샷에서도 등장한다.(이 시점샷은 이상하다. 통이 위치한 얼음공장과 호숫가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통의 시선에는 도심의 거리가 호숫가로 비쳐졌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후반부에서 통이 열대우림으로 사라지고, 벌거벗고 돌아다니며, 호랑이의 영혼, 유령이 되는 것과 연관이 있다) 자연 감정이 없다고 여겨지는 일반 사물과 풍경을 향해 트랙인을 하는 일은 드문 일이다. 하나는 한계를 벗어나려는 듯 보이는 백조의 형상과 야생을 의미하는 수풀의 풍경이 영화의 주제의식과 맞닿아있기에 일부러 트랙인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풍경과 백조인형도 인간의 의식 영역 밖에서 바라보면, 즉 더 넓은 야생의 스펙트럼에서 바라보면, 감정과 영혼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을 강조하기 위해 트랙인하곤 하던 기존의 영화 메커니즘 관습에 대한 도전으로 보인다. 이렇듯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넓히려는 감독의 욕망은 이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에게도 던져진다. 오프닝 타이틀이 흐르는 가운데, 켕이 정면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을 응시하는 장면에서, 켕은 고개를 돌려 주변의 눈치를 보며 카메라를 바라본다. 일반적으로 관객은 오프닝 타이틀과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했을 때, 영화로의 몰입에서 빠져나와 이것이 영화, 허구라는 것을 인식한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관객이 극에 수동적으로 몰입하기보다, 한 걸음 물러서 능동적으로 극을 이해하고 생각하도록 함으로써, 극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했던 것처럼,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열대병>을 내러티브를 따라가서 이것저것 아귀를 맞춰보기보다는 관조적으로 이것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매순간 의심해가며 더욱 확장된 시선으로 관람하기를 제안하는 듯 하다. 켕은 카메라를 응시할 때, 관객에게 뭔가 비밀이 있지만 숨기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는 냥,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는 두 가지 의미로 풀이된다. 앞으로 전개될 전반부의 이야기는 거짓이라는 것,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눈매와 카메라를 응시하는 눈매의 차이에서 알 수 있듯, 인간세상에서 이성에 의해 억압받지만, 인간본성에 내재해있는 야성을 몰래 드러내는 순간이다. 눈치를 보는 것은 이성의 감시를 살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은 전동차 안에서 통과  한 여자가 서로 시선을 마주치는 장면에서 변주된다. 서로에게 호감을 갖지만, 이제껏 몸에 익은 예절과 관습, 이성이 만들어낸 행동의 테두리 내에서 욕망을 억제하고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전화 받느라 외면하고 시선이 불안정하지만, 통은 계속 여자를 응시한다. 통에게는 야생의 응시가 내재해 있다고 보여진다. 만약 야생의 동물이었다면, 어땠을까? 발정기가 되어 서로 호감을 느끼면 바로 교미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 부분은 인간의 성의 탐닉에 대한 원초적 욕망과도 맞닿아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기존의 체제에게 가하는 강력한 펀치다. 전에 전반부의 이야기는 거짓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전반부의 인물들이 활동하는 공간은 인간들이 모여 사는 도심이고, 후반부는 열대우림이다. 감독은 후반부의 열대우림에서 인간이 경험하지 못하는 차원의 세계를 경험케 한다. 켕이 소를 총으로 쏴서 죽여서, 소의 영혼과 반딧불의 영혼을 보고, 네발 달린 짐승처럼 기면, 또 다른 켕이 이 켕을 짐승으로 생각하여 총으로 쏜다.(이 부분은 어떤 켕이 어떤 켕을 죽였는지 모호하다. 이젠 이런 것은 중요치 않게 여겨진다) 그리고 나무 위에서 또 다른 켕이 은신하고 있다. 켕이 발견하는 사람의 발자국과 손자국은 켕의 자신의 것이고, 발견된 무전기와 나무에 걸린 배낭은 다른 자신의 것이다. 학설의 명칭은 기억이 안 난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가 하나의 구슬에 불과하고 그 구슬을 신들이 갖고 노는데, 그 구슬을 갖고 노는 신들의 세상도 또 하나의 구슬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하나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살아가는 데 있어, 현재의 나 말고 과거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가 동시에 다른 차원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듯 이 세상은 그 한계를 어떻게 규정할 수 없다. 무엇이 진실인지도 인간의 한계로서는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감독은 인간이 규정한 테두리의 세상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세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구상했고, 그것이 가능한 공간으로 열대우림을 생각했다. 4차원의 시공간이 마구 섞인 이 미지의 세계에서 인간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감각에 의지해 이 세계를 느낄 뿐이다. 그 감각이라는 것도 그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매우 미약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과 감각으로 재단되어진 세상이 진실일 리가 없다. 열대우림은 전반부의 인간도심의 비현실성을 꼬집는 중요한 모티브이다. 전반부의 중반 통은 켕에게 전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전생이라는 것 또한 영화가 지향하는 세계를 지지한다. 불교를 국교로 믿는 태국에서 윤회사상은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그렇지만 동굴의 부처상에는 크리스마스 전구가 둘러져있고, 크리스마스 캐롤이 흐른다. 내 눈에는 불교의 폭넓은 세계관을 기독교의 이성으로 가두려는 것에 대한 감독의 비판으로 보인다. 어쨌든 윤회사상에서 기초한 전생은 진화이론과 더불어 인간의 본질에 대해 되묻게 한다. 한 인간의 전생이 돼지였다면, 그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한 생명은 몇백년을 걸쳐 인간이기도 했다가, 새이기도 했다가, 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윤회사상이다. 여러 동물로 변신할 수 있다는 크메르인 무당은 윤회사상을 한 인생에서 한걸음에 실천한 인물이다. 그에게는 다양한 동물(인간포함)들의 기억과 시간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일반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세상의 본질,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에 대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윤회사상에 근거해 통이 아끼는 개와 통, 켕의 관계가 새로이 인식된다. 개는 췌장에 물이 차 종양으로 고생하다가 도로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병원에서 애지중지하던 개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통은 인간세계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한다. 겉으로는 안 그랬지만 마음으로는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리고 통은 켕의 얼굴을 기억하지만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켕과 대화를 나누면서 개의 흉내를 낸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서 통의 유령으로 보이는 호랑이가 켕을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고 슬퍼하며 자신의 모든 기억을 준다. 또한 통의 손에 난 상처가 후반부에 켕에게도 똑같이 난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개는 통의 전생이고, 통은 켕의 전생으로 이들은 전생으로 엮어진 한 야생이다. 이상하게도 전반부의 후반 통과 켕이 서로의 손을 핥아주는 장면은 개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그 사랑의 기억이 열대우림에서 가시화된다. 한다. 영화 전반부에 식구들이 밥을 먹는 장면에서 켕은 유령처럼 존재한다. 그의 시선이 통을 바라보는 시점 샷의 각도가 틀어져 있기 때문이다. 마치 관조적으로 통을 잡는 카메라는 켕의 시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시선은 켕의 시선이고 따뜻하다. 이는 영화 후반, 호랑이의 영혼이 켕의 기어가는 행동거지를 지켜보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한 생명체의 좁은 시야가 아닌, 모든 것을 꿰뚫는 듯한 신의 시선으로 느껴진다. 왜 그런 시선을 던지는가? 둘은 전생으로 엮어진 한 몸이고 그 기억에 의해 사랑하기 때문이다. 전반부의 켕은 도시의 생활에 적응 못하고 힘들어하는 통에게 사랑의 감정을 전달하고, 호랑이(통)는 켕에게 자신이 보아오고 느낀 영혼의 기억을 준다. 그리고 통의 과거 군 시절 사진에서 보면 통은 동성애자로 보인다. 통의 군 시절의 기억은 켕의 현재의 군 생활과 겹쳐있다. 그래서 켕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외로운 자신의 영혼을 달래줄 켕에게 모든 것을 준다. 전반부에서 켕은 통에게 춥냐고 물으며 생뚱맞게 태국 밴드 CLASH의 테이프를 준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CLASH의 노래 중에 kor ched nam ta (눈물을 닦아 주세요)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한 남자가 과거에 사랑을 했고 현재는 다른 남자의 연인이 된 여자에게 지금 사랑하는 그 남자와 이별할 때, 자신이 욕심 내지 않고 여자의 연인이 되길 바라진 않겠으니, 대신 여자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이런 아련한 사랑의 감정을 통에게 전했으니, 통은 후반부에서 호랑이의 유령이 되어 미래의 자신인 켕에게 자신의 모든 기억들을 주고, 켕은 눈물을 흘린다. 통은 켕의 눈물을 닦아주는 의미로 행복의 노래를 부르자고 한다. 이렇듯 인간의 세상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 사랑을 열대우림이라는 너무나 현실적인 공간에서 또렷하게 성립시킨다. 태초의 모든 것이 인공적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공간에서 인간사회에서 가둬두었던 사랑과 본질을 경험하는 것은 감독 개인의 판타지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감독은 행복을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낸 자동차 소음, TV소리 등 인간사회의 소리에 묻혀있던 태초의 자연의 소리(나무에 부딪히는 바람소리, 동물의 울음소리, 풀벌레소리 등)를 아무 방해 없이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야생의 공간을 그리워한다. 그 태초로의 복귀, 그리고 갇히지 않은 시선의 확장이 주는 아름다움과 숭고함, 시간의 기억을 절감하게 하기 위해, 이러한 본질을 가둬두고 영혼이 메마른 인간세상을 전반부에 배치하고, 이에서 점프하여 야생의 영혼을 풀어주는 열대우림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사랑과 기억을 시공간을 뛰어넘는 전생의 이야기로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영화 초반 켕이 통에게 ’나무들이 나에게 화났어‘라고 말하자 통은 ’무슨 영화 같은 소리야‘로 대답한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이라는 영화가 이야기하고픈 바는 여기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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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p1434
잘봤습니다   
2010-08-22 14:44
thesmall
글쿤요   
2010-03-1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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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병(2003, Tropical Malady / Sud Pral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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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59 [열대병] 동물도 인간도 아닌 우리들 redface98 06.02.01 52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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