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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여자, 정혜
jimmani 2005-03-09 오후 2:12:32 1451   [5]

확실히 누군가가 내 이름을 알고 불러준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25번' 이런 식으로 출석번호를 부를 때보다 '@@야'하고 이름을 불러줄 때 좀 더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가족 안에서만 해도 이름 대신에 '야!', '어이!'하는 식의 호칭을 듣게 되면 왠지 좀 인격적으로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나 역시 지금 새학교 새학기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가는 과정에 있으면서, 이렇게 누군가 나를 알고 이름을 불러주는 기쁨을 차츰 느끼고 있는 중이다.
 
이 영화 <여자, 정혜>는 제목에서부터 주인공의 이름이 들어가 있어서, 영화를 전혀 안본 사람도 주인공의 이름이 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이 주인공의 이름을 듣기가 정말 힘들다. 그만큼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가 되기 힘들었던 여인, 정혜가 무언가 의미가 되어가기까지의 과정을 이 영화는 그리고 있다. 극도로 건조하고 일상적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속을 천천히 푹 파고드는 위력을 지닌 영화다.
 
우리의 주인공 정혜는 그야말로 평범한 여인이다. 독신으로 살고 있으며 우체국에서 일하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을 법한 여인이다. 집에서는 홈쇼핑을 즐겨보며 가끔 주문도 하고, 집안 화분 관리를 즐겨 하는, 지극히 평범한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의 일상은 왠지 물기가 없어보인다. 좀체 웃지도 않고, 대인관계도 그다지 원만하지 않다. 어린 시절, 그녀가 겪은 상처와 친구와도 같았던 어머니의 죽음때문인지, 그녀의 일상은 좀처럼 기쁨이 없이 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사랑에 대해서도 오히려 겁을 내는 그녀,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부턴가 사랑의 기운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우선, 이 영화가 감성영화라고 홍보를 많이 하지만, 그런 만큼 눈물을 많이 나게 하거나 극의 전개가 드라마틱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 영화는 마치 '정혜'라는 여자의 일상을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어떤 극적인 과장도, 반전이나 긴박한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집에 돌아오는, 그녀의 일상을 그저 가까이서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뭔가 드라마틱한 전개를 원하셨다면 실망하실 테지만,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영화 속 평범한 한 여인의 삶을 마냥 따라가 보는 재미도 생각보다 크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다큐멘터리처럼 정혜의 삶만 따라가는 것만 있진 않다. 우리와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그녀이지만, 왠지 침울해보이는 그녀의 삶에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 마련일 것이다.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인지, 영화는 중간중간에 그녀에게 있었던 과거의 일을 회상 형식으로 풀어놓는다. 주로 그녀가 있는 특정 장소에서, 예전에 그 장소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 그녀의 과거를 따라가다보면, 정혜의 삶이 좀 더 입체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회상과 현실의 경계가 그다지 뚜렷하지만은 않기 때문에, 회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길.
 
이 영화를 보면서 무엇보다 느낀 건, 김지수란 배우의 새로운 발견이다. TV 드라마에서 오랫동안 모습을 보여오다 이번에 이 영화로 첫 스크린 나들이를 했는데, 정말 첫 영화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배우가 이렇게까지 연기를 잘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녀의 연기는 예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예전 드라마에서 그녀가 주로 보여온 모습은, 사실 그다지 변화가 잘 보이지 않는 역할들이었다. 언제나 청순가련형의 여인이었고, 청순가련형이 드라마 속 대표적인 캐릭터 중 하나인 것처럼 그녀의 연기도 청순가련형 배우는 이렇게 연기해야 한다는 식의 공식(다소곳하다거나, 눈물이 많다거나 하는 식의)에 왠지 틀어박혀 있는 점이 없지 않았다. 자연스럽다기 보다는, 인공적인 이미지가 강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 영화 <여자, 정혜>에서의 그녀의 연기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셀프카메라를 보기라도 하는 듯, 이전 드라마들에서 흔히 보였던 인공적인 구석이 이 영화에는 없었다. 영화 속 정혜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그녀의 연기도, 예쁘게 보이거나 깔끔하게 보이려 하지 않고 대단히 자연스럽고 털털했다. 김치를 손에 온통 묻혀가며 먹기도 하고, 기분이 불편할 때는 그 기분을 숨기려 하지 않고 얼굴에 그대로 드러낸다. 이러한 그녀의 마치 '실생활'같은 연기가 오히려 영화에 큰 활력을 불어넣어주지 않았나 싶다.
 
이 뿐이 아니었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주인공 정혜가 절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인데, 벅차보인다 하는 느낌없이 정혜를 온전히 자신의 캐릭터로 받아들임으로써 영화 전체를 훌륭히 이끌어나갔다. 영화 중간중간엔 카메라의 움직임이 없이 오래 머무르는 롱테이크신이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나 이런 장면은 정혜의 표정을 근접해서 잘 잡는다. 이럴 때 김지수 씨의 표정연기는 가히 일품이었다. 기쁜 표정, 슬픈 표정 이렇게 극단적으로 하나의 기분만 나타내지 않고 한편으론 찜찜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런 복합적인 기분을 표정에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이전에 김지수 씨가 뮤직비디오에서 오로지 3,4분 가량의 한 컷으로 계속되는 눈물연기를 훌륭히 보여준 적이 있는데, 이번 영화를 통해 정말 그녀는 표정 연기(코미디 배우의 표정 연기가 아니고, 표정에 온갖 감정을 담아내는 연기)의 상당한 실력자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더불어 후반부에 나오는 눈물 연기, 예쁘게 울려거나 하지 않고 오로지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는 듯한 눈물 연기도 역시나 훌륭했다.
 
크레딧에 김지수 씨와 함께 황정민 씨가 등장하긴 하지만, 사실 작가남자 역할(엔딩크레딧에 이렇게 써 있다)인 그의 비중은 특별출연 수준 정도로 비교가 안된다. 다만 중간중간에 우체국이나 편의점 등 정혜와 마주치는 장면에서는 은근히 어리버리한 구석이 웃음을 주기도 한다.
 
이 영화가 사랑을 그리고 있긴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건 아니다. 사랑을 하지 않던 사람이 사랑을 시작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마지막 엔딩이 좀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이제 사랑이 시작될 거 같다는 순간 끝을 맺는다. 주인공 정혜에겐 어쩌면 사랑을 하는 것보다, 사랑을 시작하는 게 더 힘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정혜는, 사실 살아오면서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쌓아오지 못한 듯 싶다. 어렸을 때에도 친척으로부터 안좋은 경험을 겪은 적이 있고, 한번 결혼을 했었지만 역시나 순탄치 못한 결말로 끝을 맺어야 했다. 이후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단순히 '여자'가 아닌 '정혜'로 인정해 줄 때를 기다려왔지만, 그 여정은 짧지 않았다. 이러한 그녀의 마음은 영화 중간중간에 잘 드러난다. 구두를 사러 구두상점에 들어갔을 때의 장면이 그것인데, 점원은 계속 정혜를 '언니'라고 부른다. 물론 우리가 보통 듣기에는 좀 친근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던 정혜에겐 그것이 그렇게 편하게만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인간인, '정혜'일 뿐인데 그 점원을 자신을 그냥 흔하디 흔한 여자 중 한 명으로 지나가듯 취급하고 있으니 말이다. 정혜가 점원에게 항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타인을 그리워하면서도 타인을 두려워하는 정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이름을 불러주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보면 아시겠지만, 영화 등장인물 중 주인공 정혜를 빼고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비중이 두번째로 큰 황정민 씨의 역할도 이름이 아닌 '작가남자'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신의 독립적 존재감을 인정받고 싶은 정혜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적인 관계를 쌓고 있든, 사무적인 관계를 쌓고 있든,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참 중요하다. 우리는 사실 각각 독립적인 인간으로써, 누구나 나 자신이 타인들로부터 존중받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 자신부터가 타인들을 존중하는 데에 인색하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같은 경우도,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긴 사람이 아니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좀 꺼려지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 <여자, 정혜>를 보고,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그 사람은 나에게 단순히 지나가는 사람 이상의 어떤 의미 있는 존재로 마음 속에 새겨지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정혜가 비로소 상대방으로부터 이름이 불려지게 되면서, 단순히 개성 없는 '여자'가 아닌 자신만의 성격이 오롯이 존재하는 '정혜'가 되었던 것이고.
 
이런 얘기 하면 머리 아프다 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문득 김춘수 님의 시 '꽃'이 생각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구절에서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그 사람을 꽃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영화 속 정혜도,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듣는 순간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가슴 속에 심었듯, 우리들도 누군가의 상처를 걷어내고, 거기에 새로운 사랑의 희망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이름을 불러주는 것 만으로도. 이 영화 <여자, 정혜>는, 이렇게 새삼 이름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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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정혜(2005, This Charming Girl)
제작사 : 엘제이 필름 / 배급사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공식홈페이지 : http://www.jeongha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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