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큐 한 자리의 서바이벌 게임
스토리의 어리석음을 어디까지 용납해야 할까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남자로 변장한 여자 주인공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하는 설정을 빼버린다면 셰익스피어의 로맨틱 코미디 절반이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살인마를 피해 2층으로 달아나는 금발여자 설정을 빼버린다면 슬래셔 영화의 살상률은 10분의 1로 줄겠죠. 어리석은 설정에는 대부분 장르적 이유가 있고 팬들은 거기에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억>에 대해서는 어떻게 변명을 해야할지 생각이 안 나는군요. <10억>은 미스터리가 가미된 스릴러 영화입니다. 관객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일단 영리해야 하는 장르죠. 어리석은 설정을 깐다고 해도 그 설정의 활용만은 영리해야 하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런 영리함을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기본 설정을 볼까요? 영화의 주인공들은 인터넷 방송국에서 주최한 <서바이버> 스타일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참여한 열 명의 사람들입니다. 참가자 여덟 명, PD 한 명, 촬영기사 한 명. 영화가 시작되면 이들 중 한 명만 살아남았고 이 유일한 생존자의 회상으로 이들이 그 동안 서호주의 황무지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밝혀집니다. 무슨 일이냐고요? PD가 낙오된 사람들을 한 명씩 죽이기 시작한 겁니다. 어느 순간부터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진짜가 된 것이죠. 그리고 아마도 그 PD에게는 그들을 죽이고 싶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설정을 신선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유행인 요새는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니까요. 아마 잘 모르기는 해도 비슷한 설정을 다룬 영화가 수십 편은 나왔을 겁니다. 문제는 이 설정이 충분히 우리나라 설정에 잘 녹아있는가인데, 전 여전히 그냥 어색하다고 할 수밖에 없군요.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종류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그렇게 인기 있는 편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 큰 문제는 도저히 이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PD는 개인적인 이유로 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선정해 게임에 참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일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프로그램에 스스로 응모를 했어요.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요? 게다가 PD는 이 살인 과정을 인터넷으로 중계했습니다. 생방송까지는 아니고 한 명씩 죽을 때마다 편집본을 올렸죠. 그런데 과연 이걸 보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경찰에 신고를 안 했다는 건가요? 정말 모든 사람들이 이걸 가짜로 알았을까요?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의 친구나 가족들 중 이 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단 한 명도 없었나요? 우린 오지랖 공화국에 사는 게 아니었습니까?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의 행동은 이보다 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일단 이들은 별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사람들은 오지 한가운데에 있는 통나무집 안에 있습니다. 밖에는 무기를 가진 살인마가 설치고 있고요. 이런 경우 정상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일단 통나무집 안에서 안전을 확보하고 외부와 연락을 취할 방법을 연구할 것입니다.
정 방법이 없다면 식량과 식수를 챙기고 지리를 확인한 다음 가장 안전한 길로 가겠죠. 이 경우 가장 안전한 길은 바닷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첫 번째 게임을 하려고 거기 가 본 적이 있죠. 이들에게 지도 한 장 없다고 해도 바닷가를 따라가다 보면 퍼스나 부근 마을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모두가 모를 리가 없죠. 다른 나라로 여행 가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게 지도를 보는 건데.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하나요? 식량도, 식수도 없이 모래사막으로 들어갑니다. 그것도 낮이 되어 더 더우면 못 가니까 빨리 통과하자면서요.
엉? 앞으로 일어나는 일들은 더 가관인데, 이것들을 하나하나 제가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한 가지만 더 지적하겠습니다. 돈이 든 상자 말입니다. 장PD는 아무도 열지 못한다면서 이걸 아무데나 굴리던데, 자물쇠는 겨우 네 자리 암호로 묶여있습니다. 농담합니까?
더 이상한 건 살인자 PD의 계획입니다. 게임 참가자들이 그냥 어리석다면 살인자 PD는 초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 사람은 도대체 카메라를 몇 대나 설치한 걸까요? 아무리 게임 참가자들의 행동을 완벽하게 예측한다고 해도 이 사람들이 가는 모든 장소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건 그냥 불가능하거든요.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요. 게다가 그는 조종도 할 줄 아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엉성한 함정에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빠지는 일 따위는 일어날 리가 없거든요.
후반에 제시되는 살인마의 동기도 실망스럽습니다. 우선 이 진상은 드라마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요. 게다가 동기를 알고 봐도 그의 행동은 정당화되기 힘듭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참가자들은 살인마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영화가 모티브를 따온 특정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과 같은 입장도 아니고요. 적어도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쟁쟁한 배우들이 참가한 영화지만 배우들의 연기를 보러 오시는 분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배우들보다는 각본과 연기 연출의 문제입니다. 일단 캐릭터가 단순하고 대사가 나빠요. 그리고 감독이 연기에 대해 깊은 생각 없이 작업에 들어간 것이 거의 확실한데, 그건 몇몇 통일된 연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사람들이 사막의 모래 언덕을 기어오르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연출된 동작 같은 걸 보세요.
늘 하는 말이지만 다양한 수준의 배우들로부터 일관적인 나쁜 연기가 나온다면 십중팔구 그건 감독의 탓입니다. 캐릭터 문제도 큽니다. 배우들은 모두 큰 덩어리로 대충 다듬어진 장르 상황에 빠진 장르 캐릭터들을 연기할 수밖에 없는데 양쪽 모두 무척 건성으로 그려졌거든요.
대사에 욕을 섞는다고 이게 특별히 사실적인 무언가가 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영화의 서스펜스는 그렇게 대단한 편이 아닙니다. 일단 병렬식 구조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그를 극복할 고어 장면과 같은 건 없거든요. 함정들이 대부분 안이해서 특별한 재미를 찾기는 어렵고요. 게다가 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좀 많습니다. 이 사람들을 다 다루다보니 필연적으로 이야기가 불필요하게 길어지는 거거든요. 워낙 아이디어가 친숙하다보니 비슷한 영역을 커버하는 고전들과 자꾸 비교 대상이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최근에 나온 한국 영화들과 비교해봤을 때 <10억>의 경쟁력은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닙니다. <차우>의 괴상함도 없고 <해운대>의 코믹 신파도 없지요. 여전히 저처럼 배우들 얼굴 보려고 극장을 찾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들이 얼마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인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한 명만 빼고 다 죽는 영화잖아요.
기타등등
1. 그 '특정 사건'에서 모티브를 취한 영화가 몇 개월 전에 한 편 더 나왔었죠. 영화 만드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건인 모양입니다.
2. 제목이 한국어로는 <10억>이고 영어로는 <백만>이죠. 정확히 따지면 후자가 맞습니다. 상금은 달러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