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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세상의 절반이 남자고, 여자라는데 어째서 우리의 드라마속 그들은 꼭 여동생을, 오빠를 만나고 사랑하는 걸까? 주변을 둘러보면 여동생보다도 예쁘고, 오빠보다도 멋진 남자도 수두룩한데, 그들의 눈에 '팍'하고 꽂히는 것은 늘 근친이다. 다들 브라더(또는 시스터) 컴플렉스에라도 걸린 것일까? 사랑에 빠질 요건에 혈연관계라도 있는 것일까?
근친에 환장한 드라마들
평상시에도 파격적인 설정이나, 끝없는 늘리기, 시도 때도 없는 PPL 등으로 언제나 화제에 오르는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 <하늘이시여>는 요즘, 정말 한계를 모르고 달리는 중이다. 친엄마가 오래전 잃었던 딸을 며느리로 받아들인다는 설정은 이미 익히 알려진 일. 피 한 방울 안 섞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따지고 보면 남매관계인 왕모와 자경을 냅다 결혼시키더니, 첫사랑을 못 잊던 자경의 친부와 친모를 기어이 맺어주고, 거기서 한 발 나아가 아예 자경의 부부를 데리고 살기에 이르렀다. 자경의 계모는 어쨌건 사위인 왕모를 협박해 아파트를 뜯어내고, 자경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왕모는 최근 목하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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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시여> 뿐만이 아니다. 최근 새로 시작한 드라마 <어느 멋진 날>도 보고 있자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15년 만에 만난 남매의 눈빛이 어쩐지 남다르다 했더니, 여동생은 오빠의 등만 바라보고, 오빠는 여동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브라더 컴플렉스와 시스터 컴플렉스의 완벽한 만남이라니. 물론, 이 파격적 설정 안에는 '그들이 실제로는 친남매가 아니다'라는 <식스센스> 부럽지 않은 반전이 내포돼 있다. 하긴, 아직 대한민국은, 혈연관계로 맺어진 근친 간의 러브모드를 용납할 만큼 '똘레랑스'의 폭이 넓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대 논란'을 피해간 <어느 멋진 날>도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 중이다. 혜원으로 15년을 사는 동안, 하늘을 옆에서 지켜본 법률적 오빠 즉, 양오빠는 하늘에게 꽂힌지 이미 오래. 그녀의 주변을 맴돌다 못해 잠자는 동생의 방을 몰래 따고 들어와 침대 근처를 서성이고, 멋대로 여자친구인 양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하다하다 이제는 덮치려는 시도까지 했다. 그러더니, 하늘이 집을 나가자 "우리 이제 남매 아니니까 사랑하게 해주세요"란다. 사랑엔 아무리 국경도 없다지만, 이만하면 꽤 막나간다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익숙한 소재, 근친 간의사랑
근친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가 유독 최근 등장한 <하늘이시여>나 <어느 멋진 날> 뿐인 것은 아니다. 수년전 제작되어 국내의 숱한 시청자들을 울린 뒤,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서 대히트를 기록하고 이제 계절시리즈의 원조 작품으로 자리잡은 <가을동화>. 그 드라마 속 송승헌과 송혜교도 '알고보니 남매'였으며, 같은 계절 연작인 <겨울연가>에도 '헉, 혹시 남매인 거야?' 시추에이션이 묘사된 바 있다. 최지우, 권상우, 그리고 신현준이 복잡한 관계도를 그렸던 <천국의 계단>에도 '대체 남매라는 거야, 뭐야?' 시추에이션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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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다행히(?) 두 드라마는 아주 극단적 상황만은 피하긴 했지만 그런 시추에이션들이 시청자를 현혹하는 드라마적 장치로 활용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수개월 전, 아예 일본내 방영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던 드라마 <천국의 나무>는 '알고 보니 남매' 시추에이션을 가져다가 적극 활용, 비극적 러브로망을 완성해냈다. 이쁘장한 소년 소녀들이 맨발로 눈밭을 구르고 길 위에 칼을 맞고 쓰러지는 결말로, 엄숙한 양반들의 도덕적 비난만은 면하긴 했지만, 그들이 결국 죽었건 살았건 간에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남매였다는 점이다.
어쩌면 가족이 존재하지 않는 트렌디 드라마가 가족의 함정, 근친 관계를 건드리는 것은 사실 놀라운 도전일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알고 보니 오빠였고 동생이었던 그들이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더할 수 없는 비극성으로 슬퍼하고 눈물을 쏟는 데서 정지할 뿐 한 발도 나가지 않는 드라마는, 함정 안에 안주하고 있을 뿐 어떻게 그 함정의 문제점을 드러내어 그로부터 탈피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드라마들이 그러하니, 시청자라고 크게 다를 이유는 없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한껏 그들의 감정에 이입했던 시청자들은 "왜 하필!"을 외치며 함께 눈물을 쏟고, 감정이입하지 않은 시청자들은? "뭐야? 또 남매야?"라는 칼을 들고 그들의 사랑에 비판을 가한다. 논란이 생기고 시청률이 오른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그들이 남매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돼 버린다. 남는 것은 논란과 시청률, 그 자명한 함수관계와 패턴 뿐이다. 왜 하필 그들이 순애보적 사랑을 오빠나 동생에게만 쏟아붓는지는, 아무도 책임있게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설명은 커녕 대개의 경우,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그냥저냥 넘어가기 일쑤다. 하기사, 그게 뭐 중요하겠는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것을.
근친 간의 사랑, 그 찬란한 역사
사실, 근친 간의 사랑이라는 소재가 한국의 드라마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숱하게 근친관계에 대한 묘사를 발견할 수 있으며, 프로이드씨가 만들어 낸 이후, 내용은 몰라도 이름은 다들 들어봤을 '외디푸스 컴플렉스'도 근친관계에 대한 애착을 설명한 단어였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는 형의 아내를 취하는 동생 클로디어스가 등장하고, 소설 <롤리타>에는 양딸을 사랑한 아버지가 묘사된다. 오래된 우리 소설 <배따라기>에도 근친관계에 대한 암시가 등장한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라는 성경에조차 근친관계에 대한 묘사가 있을 정도다. 실제로 고대에는 근친혼이 권장되기도 했었으니, 근친관계의 역사는 그야말로 유서깊다고 할 수 있겠다. 문자 그대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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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인간의 오욕칠정을 공감각적 미디어로 가공해내는 데 가장 앞장섰던 영화들도 이러한 금기에 수없이 도전했으니, <페드라>에는 의붓어머니를 사랑한 아들이 나오고, 루이 말 감독의 문제작 <데미지>에서는 아들의 여자를 사랑한 아버지가 등장한다. 프랑스의 또다른 문제감독 레오 까락스는 영화 <폴라 엑스>를 통해 친 남매의 사랑을 묘사하기도 했다.
서양영화만 있던가. 칸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우리 영화 <올드보이>는, 비록 최면에 의한 것이었고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나 딸과 아버지가 사랑에 빠지고, 김지운 감독의 공포 영화 <장화, 홍련>에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놓고 어머니와 경쟁하는, 그리하여 망상증에 빠지고 만 딸이 등장한다. 4촌까지 결혼을 허용하는 일본에서는 근친관계를 묘사한 작품들이 그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고.
그렇다고 권장할 수는 없잖아?
그러나 그러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졌으니 권장하자!... 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폐가 있겠다. 새삼 이런 가벼운 글에서 유전학적 문제를 논하며 근친관계의 위험성을 계몽할 이유야 없겠으나, 재미삼아 논할 만한 소재도 아닌 탓이다. 정말 오빠 말고는, 여동생 말고는(혹은 그 역의 관계도 가능하겠다) 아무도 눈에 차지 않고, 당사자 둘이 죽고 못살 지경이라면, 현실에서 그들의 관계를 두고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며 기어이 갈라놓는 것도 그리 현명하고 좋은 해결책만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디어의 근친관계에 대한 묘사가 최근 들어 유난히 증가하고 있는 것에는 소재의 다양화라는 이름을 붙여 마냥 환영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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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남매더라' 설정이 어제 오늘 있었던 것이 아니며, 눈물 쏙 빼는 순애보적 사랑이 친남매일 경우 비극, 아닐 경우 해피엔딩으로 끝나던 안일하고 진부한 결말을 하루이틀 본 것도 아니다. 그렇게 진부하고 지루한 패턴을 반복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금기를 건드리니까 환영해야 하나? 금기를 건드리는 도전은 가치있는 시도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최근 미디어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지는 근친관계에 대한 묘사가 금기를 넘어서서 인간을 들여다 보는 도전적 시도처럼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지, 그러한 소재들이 미디어를 통해 반복재생산 되는 것은 '근친' 혹은 '남매'라는 단어가 주는 자극성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왜'와 상관없이 일단 논란이 붙으면 쭉쭉 올라가는 시청률을 방패 삼아 묘사의 극단을 달리는 미디어의 뻔뻔함을, 굳이 참아줄 이유가 있겠는가. 게다가, 권장? 어이쿠. 큰일 날 소리!
금기를 건드리는 것은 좋다. 그러나...
난데없이 좀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인간의 역사를 변화시켜 온 것은 도전이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진보를 이끌어냈건 퇴보를 이끌어냈건 간에,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유의미한 변화들은 도전에 의한 것이었다. 문학과 음악, 미술과 영화가 인간들끼리 그어놓은 금기라는 선을 넘나드는 것은 그러한 유의미한 변화를 위해 어찌보면 매우 긍정적인 시도일 수 있다. 그러나 성찰이 없는 자극은 또다른 자극만을 요구할 뿐이다. 그것은 도전적인 시도도, 변화를 위한 일보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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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시작한 <어느 멋진 날>을 보면서 불안한 것은 이런 선례들 때문이다. 게다가 브라더(혹은 시스터) 컴플렉스에 걸린 주인공들이 서로 사랑에 빠질 것이란 것은 자명한 일. 친남매가 아니라니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갈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그들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악역을 위한 악역을 설정하고 미친 듯이 달리는 패착만은 피해주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다.
사랑에 대한 대단한 정의를 바라지는 않는다(드라마를 보면서 그런 걸 함부로 바라는 것도 사실 욕심이다). 그저, 진부하고 안일한 소재를 선택한 만큼, 묘사만은 새롭기를 바랄 뿐. 그리하여 금기를 다루는 방식도 시대가 변하면 달라질 수 있음을 조금이나마 보여준다면, <어느 멋진 날>은 성공한 작품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글_ 이지선 칼럼니스트
이미지출처: www.sbs.co.kr, www.imbc.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