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되는 영화가 있다. 캐스팅에서부터 촬영 스탭까지 하나하나 눈여겨보면서 어서 보고 싶어 칭얼거리게 하는 영화가 있다. 혹시나 신비감이 깨질까봐 신문, 잡지, tv 리뷰에 눈 꼭꼭 귀 꼭꼭 싸매게 하는 영화가 있다. 두근거리는 설레임에 못 이겨 신문을 열어 개봉일을 헤아리고 그것도 모자라 몇 번이고 시사회를 쑤석거리게 하는 영화가 있다.
내게 [파이란]이 그랬다. 그 남자 등에 업힌 단아한 눈썹 밑 동그란 눈동자가 수줍은 장백지를 본 순간....짓눌린 몸뚱이에 햇살처럼 쏟아지는 그녀를 업은 최민식을 본 순간...봐야겠다란 결심을 갖게 만든 영화...바로 [파이란]이었다.
[파이란]을 보러갔다. 사람들마다 뭔가를 가지고 온 듯한 눈치다. 아니나 다를까 앉자마자 주섬주섬 기대들을 풀러놓기 시작한다. 나라고 별수 있나? 가슴이 파르르 떨린다. 오랜만에 느끼는 긴장이다. 좋을 거야... 좋아야 돼...
손바닥만한 경품 오락실에서 삥을 뜯는 늙은 양아치(강재)가 있다. 고딩에게 포르노 팔다 구류 살다온 허접한 이 남자는 후배랑 싸우면서도 품에 쥔 토스터기는 놓지 않는다. 그런데 한번 욕심낸 것, 챙기려면 끝까지 챙기지 주접은 주접대로 다 떨어놓고 결국엔 후배를 향해 토스터기를 냅다 던져 박살을 내고 만다. 그래서다. 이 남자 밑바닥까지 썩어 문드러진 양아치지만 한 줄기 지켜야 할 자존심은 남아 있기 때문에, 뱃고동 울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희망으로 잠들기에 파이란의 사랑을 이해 할 수 있다. 아니, 이해할 뿐 아니라 돌아누운 파이란을 사랑하게 된다.
[카라]라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비디오가게에서도 묻히고 이현우의 OST마저도 묵히게 만든 영화가 있다. 송승헌, 김희선, 김현주 등 당대의 스타들의 총출동에도 불구하고 잠깐 막을 올렸던 영화이다. 보지도 않았고 보고 싶지도 않고 특선영화에서 해준대도 채널 돌려가며 볼 영화이다. 몰랐는데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바로 [카라]를 만든 감독이다. 한 번 실수 두 번할까? 싶은데, 많이 노력한 흔적은 보이는데 아직도 부족하다. 여기저기 얼기설기 엮어 논 시간의 그물이 몹시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엉성한 삼류 양아치들의 삶의 재현은 "추적 사건과 사람"만 못해 헛발질이다. 극은 절정에 도달하지 못하고 소진하고 파국의 끝까지 관객의 숨을 맡아놓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엇갈린 운명속에서 슬픈 사랑이 피어나는 영화 "파이란" 은 훅 하고 솟구치는 슬픔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강재의 삼류 인생은 단상위에서 질 나쁜 확성기로 훈시하는 교장의 인사말씀처럼 귓등을 스친다. 계속되는 깡패들의 욕설은 식상해 귀를 막고 싶게 하고 뻔히 예상되는 너절한 결말이 이 영화를 기다려온 관객들의 기대를 깎아먹는다.
그렇지만 이 엉성한 영화 속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유달리 빛이 난다. 최민식의 연기에서는 귀기(鬼氣)마저 느껴진다. 스크린 안에서 그는 이제껏 우리가 [쉬리]에서도 [해피엔드]에서도 [NO.3]에서도 본 적이 없는 삼류 깡패가 된다. 그리고는 섬세한 감정표현과 선이 굵은 인물연기로 언제 한번 눈빛을 부딪친 적도, 말을 나눈 적도, 얼굴을 본 적도 없는 그들의 사랑을 이해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대사 없이 많은 장면을 표정으로 해내야 했던 '장백지'의 연기도 '최민식'에 뒤지지 않는다. 아직 바람이 쌀쌀한 봄 바다에서 자신을 살게 하는 단 한 사람 강재를 위해 수줍게 웃으며 곱게 쥔 손으로 정성껏 노래하는 그녀는 가슴 한 켠을 저리게 한다.
배우들은 날고 싶어한다. 눈빛으로 표정으로 자신들의 사랑을 이해시키기 위해 애를 쓴다. 자신들의 사랑이 단순히 영화 속의 지어낸 운명이 아니라 당신 앞의 애처러운 삶으로 교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지만 감독은 끝내 너른 창공을 만들어 주지 못하고 배우들은 추락하고 만다. 영화적 구성이 조금만 더 완성도가 있었다면 우리의 가슴을 후려치는 또 하나의 대박이 탄생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대종상 개막식에서 화려하게 막이 오른 [파이란]은 영화는 모자르고 배우는 넘치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