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이루어진 그의 데뷔는 [철한유정]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오우삼은 친구의 투자로 독립 영화사를 세우고 독자적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지만 골든하베스트에 영입되면서 재편집등의 수정작업을 거치게 되어 개봉은 2년간 유보되었다. 물론 영화가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것 역시 상영을 제때 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철한유정]은 당시 유행하던 쿵푸영화의 장르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과다한 액션과 슬로우모션 등 이후 '오우삼 스타일'이라 불리는 것들의 모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선배 영화인인 장철과 샘 페킨파의 영향인데, 특히 주인공이 등장할 때의 슬로우 모션은 샘 페킨파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여러차례의 인터뷰에서 오우삼이 직접 밝힌 바 있다.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골든하베스트에 전속으로 고용되면서 꾸준한 영화생활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주로 쿵푸영화를 찍었는데, 45세 이상의 감독이 주류를 이루었던 당시의 풍토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1977년 허관영을 만난 오우삼은 첫 코미디물인 [발전한]을 제작한다. [머니 크레이지]라는 영문제목으로도 소개된 이 영화를 통해 코미디 장르를 다루는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이 후 10년간 코미디 영화만을 만들게 되는데, 그는 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코미디 장르의 각본만 가지고 오는 통에 코미디만 만들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홍콩의 제작풍토상 감독의 제작권한이 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단면이다.
그러나 고인 물은 썪는다고 했던가.
지속적으로 한 장르에만 자신의 능력을 투자하던 그는 본명을 숨기고 만들었던 [활계시대], 대만에서 만들었던 [소장], [양척로호] 등 몇 편이 거듭 흥행에 실패하면서 80년대까지 쇠락의 길을 걷는다.
1986년 서극이 제작을 맡고 오우삼이 감독한 [영웅본색]은 홍콩영화의 판도를 바꾸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전시대를 풍미했던 무협물적 설정에 샘 페킨파의 영향이 분명한 폭력적 화면을 결합한 이 영화는 홍콩갱영화의 효시로 자리잡았다. '홍콩느와르'라는 장르명이 생긴 것도 바로 [영웅본색] 덕분이었다. 영화에 출연한 주윤발, 적룡, 장국영이 스타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협물과 코미디물등 일부 장르영화를 답습하는 그저 그런 감독이었던 오우삼 역시 홍콩내 일급 액션영화감독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좋았던 일도 잠깐 서극과의 관계는 벌어지기 시작했고, 영웅본색 3편의 프로젝트를 논의하면서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베트남전을 무대로 하겠다던 영웅본색 3편의 프로젝트는 서극이 감독을 맡으면서 완성되고 오우삼은 기본틀을 가져다가 이후 [첩혈가두]로 만들어 발표한다.
서극과의 결별 이전에 오우삼은 [영웅본색]과는 다른 영화를 만들어보고자 했지만 회사로부터 거절당하게 된다. 그러나 주윤발의 도움으로 결국 제작에 착수하는데, 그렇게 나온 영화가 [첩혈쌍웅]이다. 이 영화는 이후 '이수현-주윤발'이라는 명콤비를 탄생시켰으며, 오우삼 불후의 명작, '홍콩 느와르'의 정점으로 꼽힌다. 발레를 연상시키는 총격씬과 유미적 화면구성은 이후에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느와르'의 명장면들로 탄생되었다. 물론 신파적 요소와 늘어지는 이야기 등 늘 지적되던 오우삼의 단점은 여전히 눈에 뜨였지만, [The Killer]라는 제목으로 서구에 소개되면서 오우삼은 할리우드의 집중적 시선을 받게 된다.
결국 오우삼은 [날수신탐](국내 개봉제목은 [첩혈속집])을 끝으로 홍콩에서의 작품활동을 접고, 할리우드로 건너가게 된다. 1997년 홍콩은 반환을 앞두고 있었고,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서극은 이미 영웅본색3편의 프로젝트로 완전히 결별한 상태였다. 절친한 지인들마저 '홍콩반환'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피해 해외로 떠났고, 그 역시 그의 영화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반환' 이후를 걱정해 왔으니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피할 이유가, 더 이상 홍콩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할리우드 진출에 선댄스와 깐느에서 주목받았던 젊은 영화천재 타란티노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타란티노는 "미켈란젤로가 천정화를 그린다면 오우삼은 액션영화를 만든다"는 말로 오우삼에 대한 경배를 표했고, 인터뷰마다 자신의 영화스승으로 그를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