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11테러 직후, 미국이 받아들여야 했던 본능적 교훈은 ‘공격은 최선의 방어’였다. 무너진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바라보던 미국인의 경악은 테러와의 전쟁에 명분을 실어주는 최고의 자양분이 됐고, 반테러의 명분을 위시한 이성의 밑바닥에존재하는 미국인의 분노-탈레반의 섬멸과 빈 라덴의 주검을 갈구하는-는 폭력의 전시로 확장되었다. 그 결과, 미국이 얻은 건 2003년부터 시작된 이라크전이 지금까지 남긴 사상자의 수가 최소한 3555명이라는 뼈저린 통계와 테러와의 전쟁이란 명분이 허상처럼 추락한 6년 간의 서사다.
전쟁과 정치의 함수 관계. 승리와 표심은 어떤 연관성의 곡선을 그리는가. <로스트 라이언즈>(이하, <라이언즈>)는 그 현실에 대한 어떤 고찰이다. 정치에 대한 늙은 야망이 정의에 대한 젊은 신념을 소비하는 어떤 방식은 1차 대전 당시 영국군 장교들의 어리석은 작전에 무참히 희생되던 용감한 병사들에 대한 은유로 연결된다. <라이언즈>의 원제인 <사자들을 이끄는 양떼들 Lions for lambs>는 ‘양처럼 어리석은 영국 장교들 때문에 사자처럼 용맹한 영국군이 희생되는구나’라고 한 독일군 장교의 말에서 발췌됐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젊은 정치가는 9.11테러의 참상을 밑천으로 야망에 박차를 가했으나 그로부터 6년 후, 그 전쟁은 실패작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테러 근절 신뢰도의 하락과 함께 공화당의 지지도가 동반 하락하며 그 야망도 추락의 가도를 달리는 중이다. <라이언즈>는 현실을 스크린에 반영한 역할극이다. 각각의 인물들은 정치인과 언론, 지식인 등의 사회적 계층들을 대변한다. 탁상 위의 정치로부터 계획된 시나리오가 전장의 살육으로 전개되는 과정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묘사되고 주관적인 논조로 서술된다. 무엇보다도 <라이언즈>가 현실을 비유가 아닌 직설 그 자체로 드러낸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건 이 작품이 현실적 사안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관통하기 위한 전달의 매체로 활용되고자 하는 정체성을 거리낌없이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며, 영화의 말미에 잔존하는 어떤 감상 역시 그런 사실에 대한 고뇌와 직결돼야 마땅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라이언즈>가 단순히 어떤 주도자에 대한 책임을 묻고 단죄하고자 하는 단순한 결의로 불타오르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그 이유에 대한 질문은 이렇다. 당신은 그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대테러전의 대립관계가 지정학적으로 상정되던 미국과 중동의 대결 구조를 통해 딜레마 같은 감상적 여운을 남기던 영화들과 달리 <라이언즈>는 적극적인 정치성을 띠고 있다. 그 정치적 메시지는 각기 다른 세 개의 장소에서 두 논박과 하나의 행동으로 물음표와 느낌표의 공박을 오간다. 40년 경력의 저널리스트 재닌 로스(메릴 스트립)과 야심에 찬 젊은 상원의원 어빙(톰 크루즈), 사회적 참여를 이상으로 추구하는 정치과학과의 교수 스티븐 말리(로버트 레드포드)와 냉소적인 학생 간의 각기 다른 설전은 아프가니스탄의 급박한 전장의 표정과 교차된다. 그 표정의 궁극적인 주인공은 미국이다. 각각의 인물은 미국의 계층과 세대의 표정을 대변한다. 정치와 언론, 구세대와 신세대, 행동주의자와 염세주의자, 신념과 방관. 결국 역사의 흐름 위에 놓인 개개인은 저마다의 역할에 따른 권리와 의무 속에서 살아간다.
<라이언즈>는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개인이 관계를 맺는 어떤 과정에 대한 세밀한 시선과도 같다. 정치가의 정책이 희생을 요구하는 전장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단순히 어느 사욕에서 비롯되는 거대한 비극처럼 보이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그 모든 순간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은 결과물에 부과되는 책임으로 직결된다. 결국 어떤 상황, 예를 들면 이라크전 같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은 -현장에서의 직접적인 목격이든 혹은 TV브라운관을 통해서든-결과적으로 그 모든 상황에 대한 동참의 책임이 있다. 물론 그에 대한 결과적 행위는 제각각이다. 다만 그 행위는 선택으로 명명되며 그 선택에 따른 결과적 책임은 역사적 기록 안에서 되돌이표를 그린다. 참여하는가, 방관하는가. <라이언즈>의 정치성을 그 선택에 대한 어떤 설득적 목적을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사실 <라이언즈>는 미국 내부의 어떤 지점에 맞닿아 있는 사안 그 자체이며 그렇게 전송되는 메시지를 수신할 대상 역시 미국인이어야 마땅하다. 또한 명백함 이상으로 직접적인 의도를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열띤 대사량의 압박은 어떤 인내심을 자극할만큼 만만찮다. 하지만 <라이언즈>가 전달하는 메시지, 즉 적극적인 사회적 동참에 대한 어떤 설득은 국경 너머의 사안을 넘어 개개인의 뇌리 속을 침투한다. 공범 의식은 단순히 그것에 직접적으로 손이 닿고 있는가의 여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가에서 비롯된다.
회의와 방관은 개인을 편하게 할지언정 역사의 노폐물을 정화시키지 못한다. 결국 역사는 그렇게 개인을 소비하고 탐식하며 희생의 우열 관계를 순차적으로 지정한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시작된 전쟁은 결국 누군가의 손에 피를 묻힌다. 여전히 희생은 계속되고 있다. 개인주의가 어떤 책임에 대한 포기와 방관의 권리로 남용되는 사회적 태도는 때론 큰 비극을 방치한다. 물론 우리 중 그 누구도 그 전쟁을 막을 힘은 없다. 하지만 알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고뇌를 짊어지게 한다. 사회를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힘은 작은 참여를 통해 비롯되는 결실임을 <라이언즈>는 다소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강인한 어조와 눈빛을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라이언즈>의 마지막 표정은 미국의 기성 세대-로버트 레드포드로 상징되는-가 바라는 젊은 세대의 진지한 참여 의식에 대한 갈망처럼 느껴진다. 사자가 되느냐, 양이 되느냐, 그건 결국 신념의 문제다.
2007년 11월 5일 월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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